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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베르 마을 주민들도 돌아온 영웅을 환영했다. 이곳 주민들은 다른 백성들처럼 아르투르를 두려워하는 대신 여전히 친근하게 다가와 주었다. 그는 왕관을 벗어둔 뒤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들과 어울렸다. 아르투르에게도 도파뉴 영지와 엘베르 마을은 각별한 곳이었다. 아직 모든 것이 미숙하고 어릴 때, 처음으로 얻은 영지였고 그런 만큼 진심을 다해 관리하고자 했었다.
“폐하께서 성공하신 걸 보니 정말 기쁘지만 한편으론 아쉽습니다. 우리들만의 영웅으로 남기에는 너무 커지신 것 같군요.”
촌장의 말에 아르투르는 빙긋 웃었다.
“대신 선물을 많이 가져왔으니 거기에 만족해주시구려. 노인장.”
엘베르에는 많은 왕의 은사가 베풀어졌다. 우선 면세 혜택이 주어졌으며 마을에서 똑똑한 젊은이들은 피오렌치아로 와서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주민들이 가장 좋아한 선물은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황금이었다. 만프레드의 조언은 적절할 때가 많았다. 좀 더 충성심만 있다면 더 큰 역할을 부여할 수 있을 텐데.
연회가 진행되던 차, 새롭게 마을 회관에 들어온 붉은 머리의 젊은 여인이 아르투르의 눈길을 끌었다. 아르투르의 가까이 있는 손꼽히는 미녀들에 비하면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차림새가 제법 사는 축에 속해보였다.
“잘 지낸 것 같구나. 엘로디.”
그녀는 굉장히 놀란, 황송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잊었을 리가 없잖느냐.”
엘로디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 고개를 수그렸다.
“딸을 낳았다고 들었다. 그것도 삼년 전 쯤에.”
“알고 계셨군요.”
아르투르는 굉장히 누그러진 표정으로 답했다.
“네 아이를 볼 수 있겠느냐?”
엘로디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이죠.”
그녀는 자리를 뜬 후 마을 노파들을 찾아갔다. 얼마 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어린 아이를 본 아르투르는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수그려 어린 아이와 눈을 마주 쳤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이는 낯선 어른의 시선에 두려움을 먼저 드러냈다.
“이 분은 우리의 보호자이신 국왕 폐하시란다. 안심하고 널 소개하렴.”
하지만 엄마가 짓는 인자한 미소에 경계심을 풀고 입을 여는 소녀.
“아벨린이에요.”
아르투르는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선명한 녹안과 또래에 비해 눈에 띄게 좋은 발육 상태, 큰 골격은 모두 아버지와 친척들의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자신과 닮은 금발까지 있었다. 그녀는 분명한 자신의 딸이었다. 자신도 이미 아버지가 되어있던 것이다.
“……반갑구나. 아벨린. 내가 네 아버지란다.”
꼬마 숙녀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되묻는다.
“친구들 아버지는 다 농사짓느라 바쁘시던데 아버지는 왜 여태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왕국을 세우느라 그랬다.”
“그럼 이제부터 같이 살아요?”
“미안하다. 그럴 수는 없단다. 하지만 종종 볼 수는 있겠지.”
아르투르는 빙긋 웃으며 아벨린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녀도 싫지는 않은 듯 내빼지 않았다. 엘로디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르투르는 샘솟는 부성애를 억누르려 노력해야했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건 정말 특별한 감정이었다. 내면의 무엇인가가 변한 느낌이었다. 여정을 시작한 이후 매 순간 느끼던 투쟁에 대한 갈망이 빠르게 가라앉아갔다. 이제 자신은 얻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에서 소중한 것을 지켜야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사왕은 이제 평화가 오길 진정으로 열망했다. 아벨린이 살아갈 세상이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떨렸다.
***
며칠 뒤, 바이스부르크에 마련된 원탁에는 강력한 군주들이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로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이었으며 서로를 충분히 알 정도로 오랫동안 교류해온 사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아주 어색했다. 서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울 뿐, 서로 시선을 마주치는 일도 피하고 싶어 했다.
레오폴트만 빼고.
“이야. 이게 얼마 만입니까? 루이스 형님. 이번엔 율리안 형님도 오셨네요. 펠릭스 형님이 안 오신게 좀 아쉽군요. 그분 표정이 구겨진 걸 보고 싶었는데.”
레오폴트는 친척들의 앞에서 소리내어 웃었다. 한껏 귀공자다운 치장을 한 레오폴트는 미남공이라는 별명이 정말 어울렸지만 보이는 행동거지에선 왕족의 품격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의 부친은 아니꼬운 시선을 내보였지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삼촌이 승하하시고 신년에 모이지 않은 지가 꽤 됐군요. 다들 형수님들이랑 조카들은 안 데려오셨네. 간만에 보고 싶었는데.”
참석자 모두가 불의의 습격을 대비해 갑옷 차림을 하고 있는 살얼음판 회담 분위기에선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특히 루이스 측의 인사들은 아델라이데 백작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더욱 신중을 기울이고 있었다.
“넌 예나 지금이나 참 눈치를 못 읽는구나.”
모두가 애써 무시하던 차, 대답을 꺼낸 것은 대왕의 어머니, 왕대비 엘레노어였다. 중년과 노년 사이에 위치한 기품 있는 노부인은 가장 막강한 제후의 한 사람으로서 아들의 전쟁을 도와왔던 터였다. 특히 페르디난트 대공의 가문과는 오랫동안 감정이 쌓여온 사이였다.
“숙모님 가문이야 저희 가문에 패하고 복속된 입장이니 눈치를 잘 보셔야죠. 이번에도 지셨잖습니까. 그런데 저희 집안은 정복자의 후예거든요? 눈치 같은 거 안 봐도 됩니다.”
레오폴트는 실실 쪼개면서 답했고 왕대비의 이마엔 핏줄이 올라왔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 선왕께서 널 그렇게 아껴주셨는데 내게 이따위로 굴 수 있느냐? 스티리아 사람은 인륜이란 걸 모르나보지?”
“페르넬 삼촌이 살아있었으면 우리끼리 싸울 거 없이 동방 대륙이나 정복하러 갔겠죠. 그런데 잘난 사촌형들이 서로 싸워서 삼촌 계획을 다 날려버렸네요?”
레오폴트는 원탁에 놓여있던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
“하. 네놈에게 예의 같은걸 기대한 내가 잘못 했구나. 위아래도 없고 친척 간의 정도 없는 패륜아 같으니라고.”
“눼이. 눼이. 아무튼 전쟁은 우리가 이겼네요. 그것도 가문원으로 인정도 안하던 사생아한테 깨져서 말이죠? 재밌는 일입니다.”
페르디난트는 엄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레오폴트. 네겐 증인으로 온 제후 가문의 자제들이 보이지 않느냐?”
“그들도 이제 힘의 균형이 어디로 기울었는지 똑똑히 봐야죠. 그래야 앞으론 줄을 잘 설테니까.”
“너…….”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숙부님. 레오폴트 말도 맞습니다. 아직 큰형님의 목이 굉장히 뻣뻣하시거든요. 쿨럭. 쿨럭.”
이번에 말을 꺼낸 건 둘째 왕자, 율리안이었다. 사람들은 남성미가 넘치는 근육질 몸매의 전사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쪼그라들고 병든 사내가 되어있었다. 오랜 지하 감옥 생활이 모습을 바꿔 놓은 것이다.
“이젠 아르투르의 시대죠. 녀석과 동맹을 유지하던 숙부님은 승자인거고 저희는 말뿐인 대왕 작위만 남고 다 뺏긴 겁니다. 쌤통이군요.”
율리안은 다시 기침이 들려 콜록이면서도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왕대비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율리안은 외려 그의 어머니에게 따지고 들었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제가 지하 감옥에서 썩어가는 동안 내버려두시지 않았습니까? 펠릭스는 보호해주시면서 말이죠.”
왕대비의 목소리는 냉엄했다.
“그 아이는 너와 다르게 승산이 없어지니 일찍 항복을 했지 않느냐. 네놈은 어미 말도 지지리 안 듣다가 바야르한테 져서 끌려온 거고.”
“흥. 어머니께선 항상 제가 큰형님을 잘 따르지 착한 동생이 되지 않는 게 늘 불만이셨죠. 그게 문제였잖아요.”
뾰족한 율리안 왕자의 말에 왕대비 역시 표독스런 목소리에 대답했다.
“그럼 동생이 형을 따라야지, 형이 동생을 따르겠느냐? 네놈이 다 말아먹은 게다.”
“형님이 혼자 다 쳐 먹으려다가 일어난 사건을 제 책임으로 돌리지 마십쇼! 빌어먹을 집구석 같으니. 아르투르가 봐주지 말고 큰형님이고 어머니고 제대로 박살을 냈어야 되는데 말입니다. 퉷!”
율리안의 행동에 대부분의 왕족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옥에서도 깨달은 게 전혀 없나보구나.”
“깨달은 건 형님의 좆같음을 다시 실감한 거요. 펠릭스 놈이 도중에 내빼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싸워볼만 했는데! 자기가 먼저 싸우자고 해놓고 먼저 투항을 해? 겁쟁이 새끼 같으니라고!”
조약을 참관하러 모인 제후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내심 페르넬의 아들들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생생히 보고 마음에 새겼다. 더 이상 페르넬의 유산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에게 충성을 바치던 공신들은 죽거나 대체되었으며 왕가는 분열로 인해 산산이 찢겨나갔다. 더 이상 힘의 중심은 페르넬의 아들들에게 있지 않았다.
“천국의 문지기이자 목자이신 교황 성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왕족들과 제후들은 기립해서 교황을 맞이했다. 삼중관을 쓴 노인의 뒤로 레무리아 국왕 부부가 들어와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모든 왕족들이 긴장해 갑옷을 입고 왔지만 아르투르는 보석 박힌 붉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제후들은 그걸 자신감과 여유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다. 진정한 힘을 누가 가지고 있는 지 명백하게 알 수 있는 표시였다.
“짜샤. 출세 축하한다. 나보다 먼저 왕이 되다니, 좀 건방진 거 아냐?”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고 레오폴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먹을 부딪친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교황이 착석하자 평화 조약의 비준이 시작되었다. 교황은 아르투르가 내린 결단이 평화를 가져왔다며 긴 칭찬을 늘어두었고 아르투르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곧 교황은 품에서 쪽지를 주섬주섬 꺼내 읽어내려 갔다. 통치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가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내용이었다. 칠순이 되어가는 노인이 밤을 새어가며 쓴 무척 잘 쓰여진 연설이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멍청한 새끼야. 빨리 일어나.’
심지어 대놓고 졸던 레오폴트는 이마에 손가락을 맞은 뒤에 깨어났다.
교황의 연설이 끝나자 아르투르는 원탁 중앙에 놓여있던 두루마리를 가져와 서명했다. 레오폴트도 쓱쓱 서명한 뒤 옆으로 넘겼고, 돌고 돌아 마침내 루이스의 앞에 두루마리가 내려졌다. 이미 모두 아는 내용이었건만 루이스는 읽고 또 읽었다. 손을 부르르 떨던 그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뒤 손바닥을 움직여 서명 절차를 마쳤다.
“나, 주님의 대리인인 우르술라 2세가 대륙에 평화가 찾아왔음을 선언하노라! 모두가 동의하고 맹세한 이 조약을 깨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필시 주님의 뜻에 반하는 자일 것이다!”
제후들은 모두 자신의 칼을 하늘로 치켜들며 외쳤다.
“주님의 평화가 영원하기를! 우리가 증인이 된 평화를 깨뜨리는 자가 있다면 충성을 거두고 정의의 칼날을 겨누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