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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05화 (20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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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의 지지를 얻어낸 샤를로트는 루이스가 있는 아헨의 궁정으로 향했다. 샤를로트 왕비가 요구한 내용은 한때 황제를 꿈꾸던 루이스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내용이었다. 외교전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위협에 가까운 살벌한 고성이 오갔다.

“지금 이 따위 조건을 받아들이란 건가?! 전쟁을 더 하자는 뜻이군!”

“폐하의 군대는 패배했고 절반의 봉신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중립으로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제 부군과 페르디난트 대공은 손을 잡았지요. 폐하께선 결국 이 협정문에 서명하시게 될 겁니다.”

샤를로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루이스는 분노 속에서 책상을 내리쳤다. 이 조약을 받아들인다면 선대로부터 이어진 모든 꿈은 돌이킬 수 없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정세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최대 승자인 아르투르 왕은 도파뉴 백작령을 비롯해 상당한 면적의 영토를 넘겨줘야했다.//넘겨 받았다. 할양된 영토의 대부분은 레무리아를 둘러싼 지역이어서 이로서 레무리아 왕국은 두터운 방어선을 갖추게 되었다.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 또한 제공 받았다.

페르디난트 대공도 조약문을 읽어본 후 바로 서명했다. 아르투르의 약속대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페르디난트가 통치하는 스티리아 대공국의 독립이 공인되었으며 데네토르 왕국의 동부 영토는 모두 할양받은 결과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르투르와 함께 가장 강력한 군주로 거듭났다.

교황인 우르술라 2세도 반 루이스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원하던 바를 얻어냈다. 각 왕국의 교회는 왕실에 우선해 교황청에 충성을 바친다는 내용이 명문화되자 더 이상 루이스는 교회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교황령 역시 이번 전쟁의 가장 큰 승자라고 할 만 했다.

루이스가 고함을 지르게 만든 건 마지막 두 조항이었다. 앞선 부분들은 패전을 겪은 이상 어쩔 수 없이 수용했지만 마지막 부분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넷째 조건. 요제프 공을 비롯한 귀족파들의 요구를 수용하십시오. 데네토르의 대왕은 귀족들의 동의 없이는 직할령 바깥에서 어떤 세금도 거둘 수 없습니다. 또한 각 제후들은 국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할 권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데네토르는 가장 크고 부유한 왕국이었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회복한다면 충분히 제 2의 기회를 노려볼 만했다. 하지만 이 조항으로 인해 유력 제후들은 반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루이스는 명목상의 지도자에 불과한 꼴이 될 게 뻔했다.

“다섯 번째 조건입니다. 지하 감옥에 갇혀 계신 율리안 왕자님을 레무리아 왕국 쪽으로 인도해주십시오.”

이제 루이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맏동생을 데리고 있으면 언제건 왕국으로 진격해와 왕좌의 주인을 갈아치우겠다고 위협을 할 수 있게 된다.

“샤를로트 왕비. 참으로 당신은 피오렌치아 사람답소. 정말 지독한 음모를 꾸미서 왔군.”

샤를로트는 오히려 빙긋 웃어보였다. 정적에게 비방 받는 것은 아주 짜릿한 일이었다.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대왕 폐하. 하지만 마지막 조건은 부군께서 내거신 겁니다. 다른 조건은 몰라도 작은 형님은 꼭 구출해오라고 하시더군요.”

루이스는 기가 찬 듯이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하. 이제는 형을 챙기는 아우의 모습까지 연기하겠다. 정말 어이가 없군. 그 단순한 녀석이 몇 년 사이 변해버렸군. 좋아. 그렇게 해라. 기사왕께서 내놓으시라면 전부 드려야지. 율리안은 가는 길에 데려가도록 하시오.”

“마지막. 조약의 이행과 상호 간의 불가침을 한 곳에 모여 맹세를 하며 교황 성하께서 직접 보증을 서실 겁니다. 이상입니다.”

루이스는 아르투르가 철저하게 자신의 재기와 반격을 막는데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교회의 보증 아래 이루어진 맹세를 어길 수 있는 왕은 거의 없었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왕은 누구의 신뢰도 얻지 못했다. 이미 많은 평판을 잃은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한다면 뒷감당이 어려운 게 자신의 처지였다.

“그래. 알겠다. 이제 그만 가봐라.”

우아하게 고개를 숙인 왕비는 걸어 나가다가 깜빡한 말이 있다는 듯 뒤돌아섰다.

“참. 하나 빠뜨렸군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허?”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대왕의 칭호는 직계 후계자인 폐하와 폐하의 후계자들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독립 군주들도 폐하를 상전으로 모실 겁니다. 이만 가보지요.”

루이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화낼 기운도 없었다. 자신은 이제 황제의 자리를 목전에 두었던 대왕에서 중견급 국가의 왕 정도로 격하된 것이었다. 여전히 대륙의 지도자, 페르넬의 후계자라는 칭호가 있었으나 그야말로 말 뿐일 지위가 될 터였다. 이제 대륙의 질서는 모두 아르투르의 손아귀에서 조율될 것이다. 제후들은 자신을 보면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하겠으나,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기사왕을 찾아가게 될 터였다.

“페르넬의 후계자가 땅바닥에 떨어졌구나.”

루이스는 혼자 중얼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어쩌면 자신이 저지른 실수들에 비하면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해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르투르가 더 많은 권력을 원했다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더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는 이번 조약으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었고 제후들은 완전히 자율권을 얻었다. 그는 항상 자신의 곁을 지키던 왕실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노련한 이들은 모두 쓰러지고 신입만 남은 모양새가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유독 오늘 따라 아그라베인 경이 그리워졌다.

‘바야르의 말을 따랐다면 이겼을까?’

어차피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었다. 대왕은 긴 한숨을 쉰 채 술잔을 비워낼 뿐이었다.

***

평화의 맹세는 교통의 요지인 도파뉴 백작령에서 진행되었다. 아델라이데 백작이 다스리는 영토인지라 그녀는 제왕들을 영접할 준비로 분주했다. 아델라이데는 성 내의 모든 주민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아르투르 공께서 이젠 왕이 되어서 돌아오신다고 한다. 우리 모두 그분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알거야. 내가 꼼꼼하게 감독할 거니까 성심성의껏 준비해주길 바래.”

영지민들도 아델라이데의 선포에 호응해 힘껏 외쳤다.

“네! 백작 마님!”

기사왕의 위업은 이제 고립된 산골 사람들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도파뉴 백작령의 사람들은 아르투르의 첫 행보 때부터 그의 성공을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르투르가 자신들에게 돌아와 줄 거라고 믿었고, 하이에버에서 영주의 어머니인 소피 부인이 아르투르를 저버렸을 때 함께 분노했던 이들이었다. 아델라이데가 직접 어머니를 몰아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스스로 그렇게 했을 터이다. 아르투르의 방문 소식은 영지의 모든 마을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모두가 기뻐했지만 특히 아르투르에게 구원을 받았던 엘베르 마을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드디어 아르투르 공께서 돌아오신다고 한다! 이제는 교황 성하께 대관을 받은 몸이시라네!”

듣던 이들은 큰 소리를 내어 소리친다.

“우와아아아! 그러면 돌아오셔서 영주님과 결혼하고 우릴 다스려 주시겠구만!”

주민들의 기대 어린 얼굴을 본 포고꾼의 얼굴엔 암운이 드리웠다.

“……그게……이미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뭐, 뭐야?! 우리 영주님이 약혼자인 거 아니었어?!”

“멍청아! 마녀가 파혼시켰잖아!”

“하지만 그분의 심장은 당연히 우리 땅과 우리 영주님에게 있는 줄 알았지!”

“그러면 다시 그분을 모실 기회가 없는 건가?!”

마을 주민들은 당연히 기대했던 선물을 뺏긴 어린 아이의 기분이 되어 서로 웅성거렸다. 몇몇은 아르투르의 행동이 너무 섭섭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우린 그렇다쳐도, 그분만 기다리던 영주님은 무슨 꼴이 된거여?! 남자가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옳소! 왕께 따져 물어야한다!!”

“옳소! 따져 묻자!”

“잠깐만. 이미 결혼을 하셨어도 또 하시면 되는 거 아녀?”

빡 -!

청년 한 명이 노인의 지팡이에 두들겨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뿔난 표정의 촌장이었다.

“고얀 놈. 그건 몹쓸 이교도 놈들 풍습이여! 높으신 분들 애정사는 그분들이 알아서 할 거니께! 니들은 잠자코 시키는 거나 잘하면 되는거여! 농땡이 그만 피우고 밭이나 갈구와! 이눔들아!”

“네이……네이…….”

주민들은 축 쳐진 태도로 생업으로 돌아갔고 지역 유지들은 영주의 명에 따라 왕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마침내 붉은 용의 깃발이 지평선에 나타나자 모든 마을 주민들이 생계를 내팽개치고 뛰쳐나와 기사왕의 행렬을 맞이했다. 선두에는 왕관을 쓴 국왕 부부가 있었고 만프레드와 같은 제후와 측근들이 뒤를 따랐다. 대열의 맨 마지막에는 북구인들이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우, 우와. 저게 아르투르 경이신가?”

왕의 위엄에 걸맞는 화려한 차림에 황금관을 쓴 아르투르의 모습은 그를 알던 이들마저 달라보이게 만들었다. 심지어 에쿠잘루스의 마구와 안장에도 보석이 박혀있어 그가 얼마나 부유하고 위엄 있는 군주인지 내보이고 있었다.

“Long live the king!”

촌장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뒤따라 외쳤다. 기사왕은 구김 한 점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백작령의 기사장인 알튼 남작이 기사들을 데리고 나와 아르투르를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국왕 폐하. 결국은 이 모든 일 끝에 도파뉴 땅으로 돌아오셨군요.”

“인연이란 재밌는 법이지. 짐도 이 땅이 좋네. 처음으로 짐이 쓸모 있다는 걸 인정해준 땅이었거든.”

“도파뉴 사람들은 언제고 폐하께 심장을 바칠 것입니다. 바로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것 없네. 일찍 온 까닭은 이곳 주민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야. 들리고 싶은 마을도 있었고.”

“하지만 민가에는 폐하와 제후들께서 머무르실 만한 장소가 없습니다. 특히 고귀한 레이디 분들께 계속 야영을 하셔야한다는 점이 염려됩니다.”

“짐은 아직 왕궁도 없는 처지이니 걱정하지 말게. 레이디들도 구멍 난 텐트에서도 자보고 해야 모르는 세상을 알 수 있는 거 아니겠나?”

왕비는 태평했지만 시녀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표정 관리도 궁중 생활의 일부인 걸 어쩌겠는가. 그들은 곧 웃음기를 띄며 폐하의 말씀이 옳다며 동조해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뜻대로 머무르시지요.”

“고맙네. 일행의 접대는 자네에게 맡기지. 난 이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아르투르는 행렬을 쉬게 한 후 케이와 카밀만 데리고 엘베르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을 보호하던 목책은 철거되었고 개간된 농토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 벌판에서 에쿠잘루스와 함께 백 명의 도적들을 향해 돌격했었다.

“이 마을에서 모든 게 시작되었지.”

왕의 곁에서 말을 몰던 케이와 카밀도 당시의 생각이 난 지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긴 여정 끝에 그들은 모든 것이 시작된 마을로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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