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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04화 (20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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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조율 아래 아르투르의 친서가 데네토르의 모든 제후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르투르는 서신에서 자신은 군주로서 영토를 방어했을 뿐이며, 합당한 조건 하에서라면 평화 조약을 맺을 의사가 있다고 전했다. 또한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루이스 대왕과 제후들 사이의 평화를 조속히 촉구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만약 양자 간에 불화가 있을 경우 자신이 나서 직접 중재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이 서신을 보낸 건가?”

그의 편지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기사왕의 신화적인 무용과 명예로운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위대한 이로 존경 받던 선왕을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이 가문원들을 통해 아르투르의 활약을 직접 전달 받았고, 그와 맞서게 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흘려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많은 귀족들은 루이스를 따르는 충성파에도, 요제프의 귀족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곧장 군대를 몰아 수도로 진격하려던 요제프도 돌발 상황에 군사 행동을 멈추었다. 급속도로 불안정해져가던 정국이 단숨에 진정된 것이다. 루이스는 대외적으론 침묵을 지켰지만 속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위험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지만, 최악은 면한 것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샤를로트 왕비는 요제프 공작과 만났다.

이 년 전까지만 해도 샤를로트가 하이에버의 성주를 향해 고개를 숙여야했던 입장인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에서 경의는 계급에게 바치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요제프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레무리아의 왕비이시여. 저희 성을 방문해주셔서 영광입니다. 하지만 부군께서 전투를 자제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신 까닭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루이스 대왕에 맞서 공동 전선을 펼쳐야 할 때가 아닌지요?”

샤를로트는 미소의 가면을 쓴 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아르길락 가문의 융숭한 환대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군. 국왕 폐하께선 다 뜻하신 바가 있어서 보내신 걸세. 자네들도 그분과 싸우는 건 원치 않을 테지? 특히 공작은 직접 부군과 싸워본 적이 있지 않은가.”

요제프에겐 7:3으로 결투를 벌이고도 대패를 당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랐다.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정말 쪽팔린 일이었다. 한때는 왕을 칭하던 무인 가문의 후계자였건만 정말 형편없이 패배했었다. 망신을 당한 뒤, 더욱 철저한 각오로 스스로를 갈고 닦았지만 오히려 아르투르와의 격차는 더욱 커져있었다. 이제 요제프는 아르투르에게 필적하는 기사가 된다는 꿈을 포기했다. 바야르 경을 이긴 인간을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하하하. 그렇지만 전쟁의 승패는 개인의 무용에만 달린 건 아니지요.”

샤를로트는 부채를 펼쳐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날카로워진 눈매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께선 여태 한 번의 전쟁도 패하신 적이 없으시다네. 루이스 대왕도 하지 못한 걸 자네가 해낼 수 있을 리는 없잖나? 조금 더 겸손해지는 편이 좋겠군.”

요제프도 웃음기를 거두며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 혼자라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제겐 강력한 친구들이 많습니다.”

왕비는 이쯤에서 기싸움을 정리하기로 했다. 적당한 심리적 압박은 이미 충분히 될 터였다. 요제프는 겉으론 태연한 척하지만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길도 자신을 마주 보길 부담스러워했다. 이제 누가 되었건 아르투르와 싸우는 건 두려워해 마땅한 일이었으니 이해가 가는 반응이었다.

“자네들이 내건 반란 명분은 귀족권의 회복이었지. 그런데 권리 회복을 넘어 사실상의 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이더군. 애초부터 대왕과 협상하려는 의도가 아니겠지. 그럴 거였으면 칼부터 들이밀고 조약서에 서명하라는 짓은 안했을 거야. 어떤 왕이 그따위 제안에 응하겠나?”

“아닙니다. 저희 아르길락 가문은 지난 삼백년 간 독자적으로 이 땅을 다스려왔습니다. 그 권리를 찾고자 할 뿐입니다.”

왕비는 부채를 치워 자신의 실망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피곤하게 구는 군. 요제프 공작. 자네 배후가 누구인지 내가 모르겠나? 지금 소집된 제후들은 옛날에 페르디난트 대공을 따르던 귀족들이 주류잖나. 군자금도 대공 측에서 몇 번 돌아서 건네준거고. 긴 말 하지 않겠네. 루이스를 폐위하려는 방안은 집어치우게. 그가 폐위되면 적법한 계승자는 페르디난트 대공만 남게 되지. 그러면 힘의 균형은 완전히 깨질 거야. 자네한테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요제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실은 요제프라고 페르디난트 대공이 대왕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을 보고 싶진 않았다. 대공은 강철의 군주라는 불렸다. 피도 눈물도 없이 철저하게 패도를 거닐 자에 대한 이명이었다. 제후의 입장에서 결코 선호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네는 루이스의 눈 밖에 났던 탓에 대공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던 거잖나? 이젠 엘라카르시스 왕조가 그대의 후원자가 되어주겠네.”

왕비는 지긋이 요제프를 바라보았고 두 사람 간의 기세 싸움 끝에 요제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르투르 왕께서는 분명 강력한 군주이시나 제위 경쟁에는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결국 대왕의 자리에 오르실 수 없으니 가질 수 있는 힘은 한정되시는 편이죠.”

“바로 그러니 자네가 손을 잡을 쪽은 우리지. 오’데르만 왕가의 사람들에겐 결국 자네가 끌려 다닐거야. 반면 우리와 손을 잡으면 자네가 바라는 독립성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지. 지금 난 동맹 제안을 하는 걸세.”

요제프는 그제서야 웃음을 지었다.

“역시 피오렌치아인답게 셈이 빠르시군요. 좋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해주시죠.”

샤를로트는 아르투르와의 상의해둔 정국 구상을 요제프에게 밝혀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요제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같은 시각,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끄는 행렬이 아르투르의 진영에 도착했다. 온통 검은색으로만 이뤄진 행렬이었으며, 기사들을 이끄는 건 대공의 후계자인 레오폴트 백작이었다.

“이런 시국에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숙부님.”

아르투르는 왕관을 쓰고 있었지만 대공을 향해선 거침없이 고개를 숙였다.

“큰일을 해냈더구나. 아르투르.”

페르디난트는 절도 있는 자세로 흑마에서 내려와 아르투르의 손을 맞잡았다. 사람들은 대공의 겉모습을 보면서 진정 왕족다운 인물이라며 수군거렸다. 대공의 행동거지와 외견에서는 왕족다운 위엄이 돋보였기에 절로 고개가 수그려졌다. 물론 카밀 같이 경험 많은 병사들은 먼지 한 점 없는 갑옷과 잘 정돈된 수염을 보며 오히려 거리감과 경멸을 느끼기도 했다.

“궁정에서 많은 도움을 베풀어주셨지요. 숙부님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호의가 담긴 아르투르의 목소리였지만 페르디난트는 쌀쌀 맞은 목소리로 답했다.

“과거는 아무래도 좋다. 우리의 초점은 현실을 바꾸고 미래를 만드는 일에 집중되어야한다.”

“물론 그래야지요.”

대공은 발걸음을 옮기다 멈춘 후 아르투르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묻겠다. 내가 루이스의 반군들을 사주했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

아르투르는 대공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어려서는 마주하기 정말 어려운 시선이었건만 이제는 떨림 없이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숙부님.”

대공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런데도 반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단 말이냐? 어째서?”

“제 계획에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페르디난트 대공.”

아르투르는 담담한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페르디난트의 표정은 의지의 대립이 오가는 와중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네가 계획하면 내가 따라야하는가?”

“그렇게 해주시는 편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이롭겠지요.”

페르디난트는 아르투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재능이 넘치지만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불만 많던 사생아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흠.”

페르디난트는 손을 들어 수염을 매만졌다.

“제 계획을 따라주신다면 납득하실 만한 결과를 얻으실 겁니다.”

납득할 수 있는 결과라는 말은 만족스러운 결과는 주지 못할 거란 이야기였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아들들이 모두 부적격자로 드러났으니 제위는 내게 돌아오는 게 합당하다만.”

“만약 대공께서 루이스 대왕의 군대를 격파하셨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춘 채 도열된 양측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페르디난트 쪽의 군대가 훨씬 활력이 넘치는 정예병들이었지만 규모는 절반을 넘지 못했다. 침묵 속에 아르투르의 군대를 바라보던 대공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삼촌에게 모진 요구를 하는 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저도 이제 아랫사람들을 거느린 처지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페르디난트는 대답 없이 지평선만 바라보았다. 레무리아의 광활한 옥토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형제의 꿈은 대륙을 통일해 옛 제국을 부활시키는 일이었다. 그게 분열된 땅에 평화를 가져올 유일한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이제 대공은 아르투르를 향해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내가 대륙을 통일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대업을 네가 이어받거라.”

아르투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숙부께서 원하시는 게 평화라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모든 군주들은 각자의 영토를 잘 다스리며 백성을 보살피면 됩니다. 이젠 무기를 녹여 쟁기를 만들 시간입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콧방귀를 꼈다.

“그런 일시적인 평화는 네가 죽으면 바로 깨지게 될 거다. 평화를 만드는 건 명예 따위가 아니야. 모든 권력을 한 사람이 쥐고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것만이 평화를 담보할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의 군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종교만이 필요한 법이다.”

아르투르는 삼촌과 아버지와 어떻게 나라를 일구고 훌륭하게 다스려 왔는지도 곁에서 잘 지켜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 이면에서 고통 받은 사람들의 기억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삼촌을 좋아했고 그의 신념을 눈앞에서 부정해서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기에 신중히 단어를 골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거라.”

기사왕은 차분하고 정제된 태도로 말했다.

“제가 만들 평화가 제가 죽으면 깨질 수 있다고 하셨지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나 숙부님이 제국을 세운다 한들 다를 바는 없습니다. 황제의 자리가 생기면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겠지요. 그때도 언제고 평화는 깨질겁니다.”

“네가 정복을 완수하고 천년 왕조를 세운다면 네 신민들은 오래도록 네 은혜를 기억할 것이다. 정복의 와중에 흐를 피는 아껴질 피에 비하면 사소한 양에 불과하다.”

천년 왕조라. 모든 왕가가 부르짖으며 전쟁터로 사람들을 내몰았던 구호였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통합 전쟁. 군주들은 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했으며 스스로도 거기에 도취되곤 했다. 한때는 그런 왕조의 창시자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허황된 꿈을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자는 현실을 악몽으로 만들 뿐이었다.

“천년을 이어가는 왕조란 허상에 불과합니다. 통일 제국을 세워놓고 죽으면 그 다음엔 왕자들끼리 제위를 두고 싸우겠지요. 제가 바꿀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지금뿐입니다. 저는 텅 빈 말이나 허상보다는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왕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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