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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리에도 극적인 환호는 나오지 않았다. 승리를 기뻐하기에는 아르투르 군도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기사들의 돌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던 피오렌치아 인들과 두라노 인들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정상적인 전투 수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승리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는 극적이었다. 루이스의 군대는 허둥지둥 본국으로 철수해야만 했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의 군대도 뒤따라 철수했다. 레무리아 침공이 실패한 것이다.
“우리의 왕께서 마스터 나이트의 유지를 이으셨다!”
“기사왕! 기사왕! 기사왕!”
이로 인해 대륙의 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정치의 화제의 중심은 루이스가 아닌 아르투르가 차지했다. 눈앞에서 아르투르를 목격하고 간 참전자들은 그의 무용을 고향 마을마다 퍼뜨렸다. 아르투르는 혼자서 수백 명을 죽여 길을 뚫고 명성 높은 왕실 기사들마저 여럿 쓰러뜨린, 누구에게도 비견할 수 없는 기사였다. 특히 바야르의 명성은 대륙을 아울렀기에 그를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효과가 컸다.
“마스터 나이트를 사생아 왕이 쓰러뜨렸다고?”
“그래! 그것도 일 대 일 결투에서 말이야! 나머지 왕실 기사 셋은 다 같이 덤볐는데도 죽었어!”
“예끼! 아무리 과장하기로서니 그건 심하지!”
“진짜라니까?!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봐!”
처음엔 믿지 않던 이들도 모두가 똑같은 증언을 하자 결국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르투르는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모두가 그의 행동을 주목했으며 다음 행보에 관심을 보였다. 반면 루이스의 이름 역시 사람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렸다. 전투에서 그가 보였던 추태들은 순식간에 조롱거리가 되었다.
“등을 보이고 도망을 갔다고? 사자의 새끼가 알고보니 닭이었구만!”
“낄낄낄. 자기 근위 기사한테 대신 싸우라고 시켰다지? 사신으로 온 기사왕도 잡으려 들고? 선왕은 항상 앞에서 싸웠는데 말이야.”
“쉿.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왕이시네. 말 잘못 했다간 목이 잘리는 수가 있어.”
“아, 거. 지금은 사형 집행인도 비웃고 있을테니 신경쓰지 마시구려. 이제 우리 주군이 기사왕이 된다고 해도 이상하질 않잖소?”
분명히 루이스의 세력은 여전히 아르투르를 압도했다. 여전히 그가 보유한 영토와 군대, 페르넬의 장자라는 권위는 고작 전투 한번으로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론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로 바뀌었다. 이제 누구도 루이스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대륙을 정복하고 황제가 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서방 대륙을 통일하고 동방을 정벌하겠다는 원대한 야망은 이제 술자리 농담으로 전락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동안 우리는 오’데르만 왕실의 횡포를 대륙의 통일이란 명목 하에 오랫동안 참아왔습니다. 패배하는 왕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에게 일방적인 복종만을 요구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왕과 귀족이 상의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이스 대왕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란트레서 가문의 요제프 공작이 제후들에게 격문을 돌리며 공공연한 반기의 뜻을 드러냈다. 요제프는 그들의 군대를 하이에버에 소집했다. 선왕 시절부터 지속된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가진 제후들이 많았던 터라 요제프의 군세는 눈더미처럼 불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회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빠르게 철수한 덕에 주력을 보존한 자들이었다.
“옳소! 이제 오’데르만 왕가는 우리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오!”
“대왕 폐하께서 여러분에게 복종을 명하십니다!”
요제프 공작은 사신에게 두루마리를 내던지며 말했다.
“대왕 폐하께 전하시오! 우리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왕좌의 주인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말이오!”
루이스가 소집했을 때는 돈도, 군대도 별로 없다고 버티던 제후들이 반란 음모에 가담하자 갑자기 군대가 불어나고 재산이 급증했다. 이제 대륙의 최대 군세를 이끄는 건 루이스 대왕이 아니라 귀족파의 우두머리 아르길락 공작이 되었다.
“어찌 신성한 왕권에 이런 식으로 도전한단 말이오? 이런 막무가내 반역을 벌인다면 모든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말 거요! 당장 그만 두시오!”
충성파의 수장 라이네 공작의 항변에 요제프 공은 그를 비웃었다.
“내가 명분도 없이 일을 벌일 정도로 멍청해 보이시오? 이미 교황 성하께서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인증해주셨소. 폐하가 계속 우리를 부당하게 핍박한다면 파문의 형벌에 처하실 수도 있다고 하시더군.”
“뭐라고?!”
파문이란 교황의 고유 권한으로 발타리아 교도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선언이었다. 발타리아의 신자가 아니면 대관식도 무효가 되므로 제후들은 충성 맹세에서 자동으로 풀려났다. 백성들도 그의 통치를 따를 이유가 없었다. 루이스의 권세가 강할 때는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이젠 치명적일 수 있었다. 우르술라 2세는 루이스를 본보기로 삼아 세속 군주들에게 뼈저린 교훈을 주고자 했다.
‘네놈들이 권력을 가지고 뭘 하건 간섭은 안하겠지만 교회의 영역을 침해하려 들면 박살을 내버리겠다!’
혼란이 커질수록 시선이 아르투르에게 모여들었다. 아르투르를 지원하러 왔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그와 합류하기 위해 움직여갔다. 사람들은 이제 두 사람의 회담이 대륙의 운명을 정하게 될 거라 속삭였다. 운명의 회담이 다가오고 있었다.
***
붉은 용의 깃발이 휘날리는 왕의 야전 막사 속, 아르투르가 상석에 앉은 채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니 여러분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정상적인 방법으론 전쟁 지속이 어렵다?”
일동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아니에요! 저희 도파뉴 사람들은 폐하께서 원하시면 언제까지고 싸울 수 있답니다!”
아델라이데 변경백은 이번에도 눈을 빛내며 좋다고 했다. 그녀가 나이에 비해 책임감이 있다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지만 왕 앞에선 늘 바보가 되었다. 모든 참석자들은 그녀가 왕에게 드러내는 열정이 왕비가 있는 자리에서 내보이기엔 부적절하다고 여겼지만 정작 왕비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한창 어린 동생을 귀엽게 봐주는 보는 시선에 가까웠다.
아르투르는 아델라이데의 반응에 한숨을 쉬며 그녀의 곁에 있는 알튼 남작을 보았다. 남작은 주군 몰래 아르투르에게 필사적으로 x표를 그었다. 남작은 지금 병력 절반이 무력화됐는데 무슨 전쟁 속행이냐고 주군에게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군은 절대 아르투르에 대한 건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소? 아무튼 도파뉴 병력만 가지고 싸울 순 없으니 우리 군은 지금 무력화 상태라고 봐야하는 건 마찬가지군.”
모든 제장들이 일제히 동감을 표했다. 만프레드의 용병 부대는 이미 많은 전리품을 얻었기에 더 싸우고 싶은 의향이 없었다. 타에라트 백작이 데려온 징집병이나 자유 도시의 시민들도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지난 회전이 너무 처절했던 터라 대부분의 병사들이 귀향을 원하고 있었다. 아르투르도 그걸 여러 차례 느끼고 있었다.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폐하.”
샤를로트 왕비는 손에 쥐고 있던 회계장부를 왕에게 내밀었다. 아르투르는 받아서 읽는 척을 한 후 돌려주었다. 머리도 아픈데 회계 장부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빨간 줄이 많으니 심각한 게 분명했다!
“피오레 가문의 많던 재산과 교황청의 지원금은 어디로 가고 이것만 남은거요?”
왕비는 아르투르는 회계 장부를 볼 줄 모른다고 확신했다. 분명히 다 장부에 써놨는데.
“폐하는 단기간에 근 10만의 병력을 모집하고 반년 간 유지하셨습니다.”
“음.”
아르투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직접 보급 관리를 도맡아본 그는 함축된 의미를 이해했다. 10만 명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그들이 먹을 보급품을 나르는 일은 엄청나게 돈이 들어갔다. 엄청나게!
“하지만 지금 물러나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전후에 보상을 약속하고 진군하시죠.”
만프레드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승전의 냄새를 맡았을 때만 몰려드는 타고난 하이에나였다. 손쉬운 먹을거리가 가득한 잔칫상을 마다하진 않았다.
“지금 폐하와 페르디난트 대공이 합류하면 대륙 전체를 석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뒤엔 대왕이건 황제건 하시죠.”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꿍꿍이가 있구만.”
“아! 폐하가 작위가 올라야 저도 대공 정도는 해보죠!”
이번에는 일동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솔직한 말이었다.
“그래! 포부는 멋있구만! 그래서 병사들 임금은 나중에 지불한다고 치고, 보급은 어떻게 할건가?”
만프레드는 목청을 가다듬은 후,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흠. 흠. 혹시 여러분은 현지 보급이라는 개념을 아십니까?”
“?”
“현지 마을에서 물자를 모아 진군하는 행태를 일컫는 용어인데…….”
아르투르가 손바닥을 딱하고 치며 탄성을 내질렀다. 왕은 껄껄 웃었다.
“약탈을 하겠다는 말이로군!”
“예? 약탈이 아닙니다. 현지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 얻는 것으로…….”
아르투르는 만프레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래! 자네도 좀 맞다보면 자발적으로 영지를 반납하겠구만!”
만프레드는 새파래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아르투르는 대륙의 전도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전쟁을 지속하고자 한다면 이어갈 방법은 분명히 있었고 그 경우에 이득은 확실했다. 왕으로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잠깐만. 정말로 확실한 이득인가?’
단기적으론 분명히 그랬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그럴 것인가?
침묵이 오래 이어지자,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타에라트 백작이 말을 꺼냈다.
“용병공의 제안이 거친 면이 있으나 중요한 지점을 짚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이 루이스 대왕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우위를 점할 기회입니다. 폐하의 숙부인 페르디난트 대공께선 본토로의 진격을 요구하실 겁니다. 부족한 자금은 그쪽에서 제공해주겠지요. 굉장히 부유한 분이니까요.”
아르투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누구에게 가장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지 깨달았다. 전투에서 승리해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는 데 만족할 상황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은 아주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그는 회의를 파한 후 샤를로트 왕비만을 별도로 불러냈다.
“어떤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폐하?”
왕비는 언제나처럼 정중히 부름에 응했다.
“급하니까 격식은 생략하자. 하이에버 쪽에 충분히 정보망이 있지?”
샤를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 영지니까 당연하지. 거기서 처음 만났던 것 잊었어? 그런데?”
“좋아. 당장 하이에버로 가서 요제프를 만나 동맹을 위한 담판을 짓고 와. 그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큰형님께 가서 평화 조약을 맺어오고. 세부 사항은 완전히 위임하겠다. 너라면 어떤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는지는 충분히 알테니까.”
샤를로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잠깐만. 방금 전까지 무리해서라도 진격할 방법을 논의하던 거 아니었어? 그건 나도 일리가 있다고 봐. 그래서 다양하게 돈을 꿀 방법을 검토 중이었고.”
아르투르는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냐. 너도, 나도, 교황도 큰형님을 막아내는데 집중한 나머지 대국을 잊었어. 지금 루이스 형님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붙여서 폐위 당하게 만들면 안 돼. 감정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야. 힘의 균형이 완전히 깨질 거라고.”
샤를로트는 잠깐 생각을 해보곤 바로 아르투르가 말하는 있는 문제를 떠올렸다. 아주 단순한 문제였지만 눈앞의 위협이 너무 커서 잊고 있었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였다. 페르넬의 세 아들이 모두 제위 경쟁에서 탈락한다면 계승권이 넘어갈 곳은 오직 한 곳이었다.
“젠장. 고생만 잔뜩 하고 성과는 다른 사람이 채가게 할 뻔 했네. 당장 출발할 게. 그 약아빠진 요제프가 믿는 구석도 없이 이 상황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지. 호위로는 북구인들을 데려갈게. 물론 힐데군드도 포함해서.”
아르투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사람, 물자는 누구든지 데려가. 지금의 문제는 순수한 칼로는 절대 못 풀어. 지금 시점이 가장 유리하고, 평화롭게 전쟁을 끝낼 기회야. 네 능력을 다시 선보이라고. 샤를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