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02화 (20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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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도, 몸값도, 가보도 모두 주겠다! 살려만다오!”

“응. 필요 없어.”

차가운 칼날이 무릎 꿇은 기사의 목을 관통했다. 상대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칼날을 뽑아들고 나서야 구멍 난 목으로 새어나오는 숨소리와 피냄새가 가득 뿌려졌다. 힐데군드의 몸을 타고 비견할 데 없는 짜릿함이 흘렀다.

“크흐흐어어억…….”

그녀는 기어가는 기사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만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적들이 살아남기 위해 부질없는 애원하는 꼴은 전쟁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었다. 눈앞의 젊은 기사는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그녀가 볼 때 젊은 문명인 귀족들은, 전쟁을 자긴 죽지 않으면서 남들은 편히 죽일 수 있는 놀이인 줄 알았다. 그러니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이다. 자신에게 이상한 말을 씨부린 놈들은 모두 죽었다. 이놈도 죽었다.

“고향 놈들은 칼이 안 보이면 난폭해지던데 너희 같은 새끼들은 칼을 차고 있어도 정중하질 않더라고?”

그녀는 성큼성큼 기사에게 다가가 턱을 쥐고 들어올렸다. 이미 상대는 너무 피를 많이 흘려 가망이 없었지만 기어이 눈알에 단검을 쑤셔 넣어 박았다. 기사가 단발마를 터뜨렸고, 터진 안구 사이로 뒤죽박죽이 된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옆에 아르투르가 있었다면 항복한 상대를 죽여선 안 된다는 소리를 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복했다고 목숨을 살려주는 건 문명인들의 멍청한 관습이야.’

그녀는 고향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몇 가지 풍습만큼은 문명인들도 배워야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서로에 대한 정중함 말이다. 도발을 할 때는 목숨을 건 대결을 전제하는 게 당연했다. 오직 피로만 해소할 수 있는 원한을 쌓아두고 말로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니 늘 내뱉는 말에 신중해야했다.

대담하게 결투를 걸어온 기사를 쓰러뜨린 힐데군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냄새가 너무 짙어 코가 막혀왔고 시선을 어디 두어도 시체 밭이 보이며 피의 강이 흘렀다. 평생 본 어디에도 비견할 곳 없는 살육의 현장을 보는 모습은 정말 짜릿했다. 머리 위로 화살이 지나갈 때의 흥분은 정말 강렬하다!

‘쳇. 그런데 끝나버렸네.’

수많은 포로들이 머리에 손을 올린 채 아르투르의 병사들을 뒤따라갔다. 그녀의 시선은 시체 더미를 뒤지고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얼굴은 피범벅이라 알아보기 어렵지만 체격에 비대한 어깨를 보니 아르투르의 측근인 장궁수였다. 시시한 사내여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힐데군드는 그가 필사적으로 시체 더미를 뒤집어엎는 모습을 보며 무슨 귀한 전리품을 찾나 싶었다. 왕의 측근이니 보수도 두둑하게 받을 텐데 돈이 그렇게 급한가?

하지만 그가 시체 더미 속에서 꺼내든 건 부상을 입은 청년 병사였다. 그것도 적군의 휘장을 달고 있는 병사 말이다. 그는 손바닥을 들어 눈을 껌뻑거리는 병사의 뺨을 때렸다.

“일어나라! 잠들면 죽는다. 정신 똑바로 차려!”

“컥, 컥.”

장궁수는 서둘러 청년을 시체 더미에서 끌어낸 후 갑옷을 벗기고 응급 처치를 했다. 붕대로 지혈이 끝나자 그는 청년을 들춰 매고 서둘러 의료 막사로 향했다.

“싸움은 끝났다! 널 전쟁터로 몰아넣은 놈들은 다 얌전히 포로로 잡혔다! 그러니 너도 살아야지!”

그의 목소리에선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 느껴졌다. 장궁수는 의료 막사로 청년을 데려간 뒤로도 계속 사람들을 구출했다. 도움의 손길은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이. 라밀카.”

장궁수는 힐데군드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야. 사람 말 무시하냐?! 라밀카! 너 말야! 너!”

상대는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무뚝뚝하고 불쾌한 얼굴이었다.

“나 말이오?”

“여기 라말카가 너 말고 누가 있어?”

“난 카밀이외만.”

“아 그래? 아무튼, 하나만 묻자. 라밀카.”

카밀은 번거롭다는 표정으로, 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급하니까 빨리 말하시오.”

“신들의 곁으로 가길 거부하는 거야 문명인 놈들 공통이라고 치는데 넌 왜 적병들을 그리 열심히 구하는 거냐? 방금 전까지 저놈들 눈깔에 화살 쏴재끼던 게 너잖아.”

“싸움이 끝났는데 죽여야 할 이유가 있소?”

“살려야 할 이유는?”

“다 같이 왕들에게 끌려나온 동네 청년들이오. 세상 살기 거지같은 데 없는 사람들끼리라도 도와야지.”

대답을 마친 카밀은 쌀쌀맞게 가버렸고 힐데군드는 기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카밀이 아니더라도 적병들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특히 종군 사제들이 열심을 다했다. 그들은 부상병을 살리지 못할 것 같으면 최후의 고백을 들어주며 위안을 주었다.

‘지들이 죽여 놓고 뭐하는 병신짓이람?’

힐데군드는 마음속에서 기묘한 느낌이 올라오는 것을 떨쳐냈다. 저런 멍청한 풍습을 좋아할 날은 결코 없을 터이다. 그녀는 전장을 더 둘러보던 중, 전장 한가운데 우뚝 선 아르투르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쓰러뜨린 기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전투 끝났잖아. 쟤 뭐하냐?”

힐데군드가 다가서려 할 때 케이가 손으로 그녀를 가로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묵을 지키란 신호였다. 지금 아르투르는 폭풍을 몰고 다니는 성난 신처럼 보였다. 투구를 벗은 왕의 금발머리는 바람에 휘날렸고 스스로 깨문 입술에선 피가 주르륵 흘렀다. 손은 부들부들 떨렸으며 눈빛에선 헤아릴 수 없는 격한 감정들이 요동쳤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러 전령들이 보고할 이야기를 잔뜩 가져왔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 서서 침묵을 깰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전, 기사왕의 가신들은 아르투르의 본성을 보았다. 그는 명예로운 기사일지는 모르나 자신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아르투르는 아직 신들이 땅을 걷던 신화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 떨어진 최후의 영웅이었다. 기사왕은 경외받 아 마땅한 자였다. 자신들은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가 자신들을 부를 때까지는 말이다.

“저 새끼 추격은 포기하고 개폼만 잡고 있네.”

힐데군드는 한숨을 쉬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케이가 허둥지둥 막으려했지만 힐데군드가 휙 밀쳐버리자 간단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야. 뭐하냐고. 얘들 다 니 명령만 기다리잖아.”

다가선 힐데군드가 아르투르의 어깨에 팔을 걸치려 들 때, 아르투르는 분노에 찬 적의로 팔을 잡아끌며 힐데군드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그녀는 힘으로 주먹으로 맞받아치고도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시비 거니?”

아르투르는 즉각 검을 뽑으려다가 상황을 자각하고 스스로도 놀라 손을 놓았다. 힐데군드도 그제서야 팔을 내리고 휙휙 털었다. 그들의 앞에는 노기사의 시신이 놓여있었다. 갑옷은 곳곳이 금이 갔고 목뼈가 부러져 죽은 터라 머리 방향은 기괴하게 뒤틀려있었다. 힐데군드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노기사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뻐끔거리다가 노기사의 차갑게 식은 피부를 만져보고야 바야르의 죽음을 납득했다.

“데른 강의 붉은 학살자를 진짜로 죽였구나.”

경탄에 찬 힐데군드의 눈빛과 달리 아르투르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회한의 눈빛을 노인에게 보냈다.

“죽이고 싶지 않았어. 그렇지만 제압하기엔 너무 위험했어. 노인답게 체력이라도 약할 것이지………… 한창을 싸워도 기어이 버티시더군. 내가 위험한 순간들도 많았다고.”

힐데군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야. 이제 네가 최강이야. 북구와 문명 세계를 다 합쳐도 네게 맞설 자가 없다는 증명을 한 거라고. 넌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게 된 거야.”

아르투르는 정제된 목소리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답했다.

“……이 분은 내 마스터셨다. 내 모든 걸 이분에게 배웠다. 무술은 물론 삶의 자세와 기사도까지 말이야. 사실상 아버지나 다름없던 분이다. 어찌 그런 분을 쓰러뜨리고 기뻐한다는 말이냐?”

힐데군드는 답답한 듯 가슴을 몇 차례 쳤다.

“기사들의 삶은 우리 북구인들처럼 전사로 끝나는 게 영광이라면서. 그렇다면 더 기뻐해야지. 너와 네 스승 모두에게 좋은 일이잖아.”

아르투르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바야르의 시신만을 바라보았다. 눈을 뜬 채 식어가는 모습은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깊은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느낌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었다. 기사가 마스터에게 취해야 하는 예우는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나 답답했지만 참아야 했다.

“적당히 하고 내려와. 지금 까마귀들 회식하고 있잖아? 자꾸 시간 끌면 네 스승도 쟤네들 밥상에 오를 거라고.”

힐데군드는 아르투르의 표정을 보며 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보통의 여인들이 보내는 격려나 위로 따위의 시선이 아니었다. 순수한 축하의 뜻이었고 기쁨의 표현이었다. 지금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성공을 축하하고 있었다. 당연히 화를 내는 게 정상이었다. 제대로 교육 받은 기사라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게 드는 감정은 애정과 욕망에 가까웠다. 비정상적이지만 분명히 그랬다.

자신의 한없는 분노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한 스승인가, 전쟁을 몰고 온 큰형님인가.

‘둘 다 아니다.’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은 지금 환희와 뿌듯함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자신은 방금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아주 뿌듯했으며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면 슬픔의 눈물이 아닌 환희의 눈물일 테고, 심지어는 하늘이 떠나가라 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은 스승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모든 걸 쟁취했다. 자랑스러워 할 만 하지 않은가!

‘적어도 네가 죽인 마스터의 시신 앞에서 느낄 감정은 아니지. 이 괴물아.’

이건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한 거야. 이제 세상은 내 것이다.

‘천만의 말씀. 검을 잘 다룬다고 세상을 불태울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

아르투르는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분노를 내재화했다. 날뛰도록 풀어놓은 야수는 다시 단단한 사슬에 묶여 본능의 지하 감옥 속으로 처박았다. 심호흡을 해서 정신을 맑게 했다. 아르투르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장례를 치를 나무 제단을 마련하도록 명령했다. 금세 장작과 기름이 준비되자 아르투르는 직접 스승의 시신을 모셨다.

“마스터, 편히 쉬십시오.”

아르투르는 장작 위로 올라가 바야르의 눈을 감겨준 후 그의 인장 반지를 비롯한 가문의 물건들을 따로 챙겼다. 직후 그는 마스터의 굳어버린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모아주었고 가문의 보검을 손에 들려주었다. 아르투르는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스승의 얼굴을 바라보다 회한이 담긴 한숨을 쉬며 내려왔다.

왕이 내려오자 횃불을 들고 있던 케이가 불을 붙였다. 불은 삽시간에 기름칠을 잘해둔 장작 전체로 퍼져나가며 바야르의 시신을 감쌌다. 피어오른 불꽃이 밤하늘 속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한 시대를 상징하던 마스터 나이트가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마스터 나이트께서는 명예로운 싸움 끝에, 기사로서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신 겁니다.”

케이는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을 했지만 아르투르를 납득시키려면 이런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법 효과가 있던 지 아르투르는 바닥에 성검을 꽂고 칼자루에 잡으며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페르넬의 아들, 아르투르는 맹세합니다. 용감하게 적들을 마주하겠습니다. 신과 정의 앞에 항상 진실하겠습니다. 명예를 목숨보다 귀히 여기겠습니다.”

아르투르는 기도문을 외듯 서임 받을 때의 맹세를 계속 되뇌었다. 둘의 실력은 맞수였지만 자신은 젊었고 마스터는 늙었다. 자신이 이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스터도 분명 이 싸움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 기사로서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마땅히 기사로서 삶을 마쳐야했다.

자신은 아르투르 폰 엘라카르시스였다. 정복자 페르넬의 사생아이며 어머니는 북구인 이교도라는 것 외엔 알 길이 없다. 발타리아의 성검의 주인이자 레무리아의 국왕이며 홀로 백인을 베었던 기사였다. 이제는 기사 중의 기사인 마스터 나이트가 된 사내.

이제 자신의 이름에는 스스로의 삶만 걸린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과 계승 받은 의지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런 사내가 쫓을 것이라곤 언제나 하나뿐이다.

명예가 자신을 이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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