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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쟁의 명분은 공격 측이나 수비 측이나 백성들에게 와 닿지는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데르만 왕가의 집안싸움에 휘말렸다고만 여겼다. 대왕의 적장자나, 사생아나 평민들에겐 큰 차이도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선왕의 피를 이었고 백성을 지킬 능력이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정당한 계승권이나 명분은 형제 다툼에 짓던 농사도 내팽겨치고 끌려나와 서로 죽여야하는 의문에 대한 썩 만족스런 대답은 되지 못했다.
전장에서 만나보니 상대편도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지 않는가. 같은 십자가를 모시는 형제에, 생긴 것도 비슷했다. 언어야 지역마다 다른데 굳이 싸울 필요까지 있을까? 그냥 형제가 알아서 싸워서 결판을 내고, 이기는 쪽을 섬기는 쪽이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하는 바램들이 있었다. 그랬다가는 왕의 권위를 부정하는 불경한 말이 되어 목이 내걸릴 일이기에 차마 그러진 못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전투의 열기에 가득 찬 백성들도 있기는 했다. 음유시인들의 노래를 통해 위대한 전투의 영광을 들었던 청년들이었다. 전공을 세워 기사 작위를 받고 출세하는 모험담은 언제나 농촌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모험주의자들의 열정이 군대를 움직이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자신들이 공을 세워볼 거라 믿던 사람들의 착각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식어갔다. 그들은 전공을 세워 출세를 한다는 게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그건 타고난 운과 재능을 가진 자, 혹은 평생 무술을 수련해온 귀족 나으리들의 몫이었다.
“하하하! 평민 놈들을 쓸어버려라!”
“For the king!”
어떤 왕인지는 달라도, 기사들이 대열을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아, 그들은 마침내야 깨닫고 말았다. 자기들은 영웅담의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에게 쓸려나가는 이름도 없는 악역들이었다. 그제서야 모험주의자들은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같이 자란 고향 친구가 눈알에 볼트가 박혀 쓰러지고, 이웃집 아저씨는 팔이 잘려 울부짖고 있었다. 자기도 배를 깊게 베여 장기 자랑을 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어머니….”
대군이 맞붙은 벌판은 도살장이 되어있었다. 깃발도 뒤섞이고 대열도 깨져서 눈앞의 사람의 피아 구분조차 힘들었다. 승리니, 영광이니 모두 부질없는 말이었다! 병사들은 서로 살아남기 위해 피의 진창을 헤쳐 나갈 뿐이었다. 까마귀들이 향연을 벌이고 지옥을 연상케하는 수라도가 벌어지는 그곳에서, 병사들은 단 하나만을 생각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제발, 제발, 제발, 빨리 끝나라!
두 왕의 결투가 벌어진 건 그때였다. 그들의 대결은 눈에 띄는 고지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모든 병사들은 숨을 죽인 채 그 광경만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던 병사들은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이걸로 어느 쪽이든 전투가 끝나리란 기대를 말이다. 또한 가슴 속에 품어두었던 불만이 떠올랐다.
‘그래. 그냥 너희 둘끼리 해결하라고. 우리를 끼우지 말고! 제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적막 속에서 왕들의 싸움이 이어졌다. 마침내 아르투르의 검이 루이스 대왕의 투구를 꿰뚫었을 때, 한 측의 병사들은 기쁨의 탄성을, 다른 측의 병사들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성을 질렀다.
“기사왕께서 승리하셨다!”
“대왕께서 쓰러지셨다!”
함성이 교차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변수가 등장했다. 수평선 너머에 휘날리는 그리폰 깃발과 완전한 규율을 갖춘 새로운 부대의 등장이었다. 평범한 왕과도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세를 모아온 랑트리뷔아체의 군단이었다. 그들은 전투에 지치고 피곤했던 이들과 달리 완전히 쌩쌩했으며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사기도 높았다. 양측의 지휘관들은 동시에 승리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각자가 랑트리뷔아체의 군세가 아군이라고 생각했다.
랑트리뷔아체의 군대를 이끄는 이는 도리에론 원수의 장남, 클라우디오였다. 그는 두라노 전쟁에서 아르투르와 싸워 포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는 이미 뿌려둔 정찰 기병들을 통해 전세를 훤히 꿰뚫고 보고 있었다.
“흐음. 보고받은 대로군. 기사왕이 스스로 혼자서 역사를 써내려갔어. 루이스 왕이 무조건 이길 군세라고 생각했는데.”
곁에 있던 노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도련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딜 치느냐에 우리 도시의 운명이 달렸습니다.”
젊은 클라우디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진군 속도를 늦추어가며 전투 장소에 도달하는 걸 최대한 지연했다. 전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상황을 봐서 전략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에 가담해 공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즉, 양 측에 약속은 모두 해두었지만 어느 쪽의 약속을 지킬 지는 자신들의 재량이었다.
“중석궁병대를 내보내세요. 루이스 쪽을 쳐야겠습니다.”
“잠깐만요. 지금은 만약 기사왕의 군대를 돕는다면 루이스 군은 곧 바로 무너질지 모릅니다. 레무리아는 물론이고 잘못되면 서부 대륙 전체가 기사왕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건 저희에겐 지정학적 재앙입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우려하시는 일은 안 생길 겁니다. 최적은 양쪽이 모두 쓰러지는 거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아르투르 쪽에 붙어서 편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전군! 강철 건틀렛의 군대를 향해 쏟아부어라!”
클라우디오는 포로로 지내며 기사왕에게 많은 호감을 느꼈었다. 그는 부하들의 반발을 감수하고 포로들의 신변을 보호해주었으며 장교들에겐 특별 대접을 해주는 에티켓도 잊지 않았다. 몸값의 책정도 합리적이었다. 명예로운 적수는 곧, 명예로운 동맹이 될 수도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쏴라!”
루이스 군의 머리 위로 볼트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병사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랑트리뷔아체의 기병대는 루이스 군의 우측으로 돌아가 위협적인 기동을 선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려가 있던 루이스 군의 사기는 한없이 낮아졌다. 후방에서 이를 지켜보던 루이스가 직접 나서서 독려하러 나섰다.
“그대들의 왕이 아직 살아있다! 후퇴하지마라! 전반적인 형세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왕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주군이 죽었다고 생각한 루이스 군은 살금살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왕이 죽었다면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을 독려하거나 진실을 알려 전열을 재정비해야 할 제후들은 오히려 눈을 빛냈다. 그들은 쓰러진 자가 아그라베인이란 걸 알고도 무시했다.
“후퇴! 후퇴하라! 국왕께서 쓰러지셨다! 물러나서 재정비한다! 랑트리뷔아체 놈들이 배신했다!”
그들은 이번 전쟁에서 루이스가 승리해서 황제가 되면 자신들의 권리가 제약받을 바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러나서 재정비한 후, 협상을 거쳐 철수하는 것이 제후들의 복안이었다. 그런데, 병사들은 제후들의 후퇴 명령을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
우리가 졌다!
극도의 무기력함과 허무함이 잠시간 그들을 찾아왔다. 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 열심히 싸웠지?
‘그렇다는 건 이제 도망쳐도 된다는 것 아닌가?!’
루이스를 따르던 대부분의 군대는 아예 무기를 내던지고 뒤로 돌아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모시던 제후도 옆자리의 동료도 잊어버렸다. 지금 중요한 것은 목숨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반면 아르투르 군은 사기가 가득 올라 총공세를 시작했고, 도저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 같던 루이스 군은 완전히 붕괴해서 혼란스런 상태로 들어갔다.
“형님! 이제 끝났으니 거기 서시오!”
아르투르는 인파를 헤집으며 빠르게 루이스를 향해 나아갔고, 대왕은 하는 수 없이 가마를 버리고 말 위에 올라타 도주를 시작했다. 아르투르 역시 주인을 잃고 전장에 흩어져 있던 아무 군마나 잡아타고 루이스를 쫓았다. 도중에 그를 저지하려는 기사들이 달려들고는 했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기사왕은 말과 자신이 마치 한 몸인것처럼 다루며 그들을 능숙하게 따돌리거나 한 두 합안에 제압해버렸다.
“치잇!”
루이스는 더욱 속력을 높였고, 아르투르는 재깍 따라잡으러 달려 나갔다. 둘의 사이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아르투르는 손을 내뻗어 왕의 망토를 붙잡으려 할 때, 백마를 탄 기사 한 명이 마상창을 앞세운 채 자신에게 돌격해왔다. 앞서 덤볐다가 나가떨어진 자들과는 다르게 무척 빠르고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 - !”
아르투르의 목덜미를 마상창이 스쳐지나갔다. 약간의 차이로 투구 틈새를 찔리는 건 피했으나 벗겨진 투구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급격한 방향 전환에 타고 있던 군마가 날뛰었지만 아르투르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달려온 기사를 마주 보았다.
“방금 전엔 운이 좋았구나.”
투구 속에서 옛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력으로 피한 겁니다.”
아르투르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멀어져가는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지만 근위 기병들과 달아날 뿐 돌아와 바야르를 도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직접 칼 한번 맞대지 않는 왕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냥 가시죠.”
노기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목소리엔 분노가 담겨있었다.
“뭐라고?! 이제는 마스터에게 기어오르는 걸 보아하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그러나 뒤이어 투구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유쾌한 어조였다.
“하지만 정말 대단하긴 하더구나. 나도 요샌 늙어서 아그라베인을 상대로 저렇게 쉽게 이기진 못했을 거야. 단언컨데 넌 내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최고의 기사라고 불릴만 해. 네 조카가 장성하기 전에는 대륙의 기사 가운데는 적수가 없을거다. 둘이 싸워보는걸 한번 보고 싶긴하구나.”
투구의 눈 틈 사이로 두 사내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서로의 결의와 물러날 수 없는 신념의 대결이었다.
아르투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별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형님은 그냥 보내드리지요. 어차피 이런 군대는 다시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바야르는 날이 선 태도로 받아친다.
“날 세상의 비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이 아니면 군말 말고 덤빌 준비나 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기사는 서로에게 마상창을 겨눈 채 각자를 향해 돌진했다. 첫번째 격돌에서 두 사람의 창은 서로 얽매들면서 부서졌고 보조 무장이던 검을 뽑아들었다. 아침의 태양처럼 새롭게 떠오른 전설의 기사와, 세 명의 왕을 모신 후 이제는 저물어가는 황혼의 기사의 싸움이었다.
두 사람은 저물어가는 석양을 향해 나아가며 검무를 추었다. 두 기사는 모든 것을 잊은 채 상대방과의 결투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