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00화 (20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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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 !

두 사람의 검이 중간 지점에서 맞부딪쳤다. 서로 힘을 가득 주지만 백중세여서 누구도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여공작 베르타의 푸른 눈은 복수를 갈망하며 강렬하게 흔들렸고, 만프레드의 갈색 눈은 탐욕에 물들어 번득거렸다. 힘싸움에서 점차 열세가 된 베르타는 겨루고 있던 검을 재빨리 빼들었으나 만프레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갑옷이 비어있는 겨드랑이를 향해 검을 내찔렀다.

“최신 공법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으셨어야지!”

그러나 검이 겨드랑이에 닿기 직전, 베르타가 만프레드의 무릎을 걷어찼고, 만프레드의 몸은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어?”

만프레드의 보검은 겨드랑이가 아닌 잘 보호된 옆구리를 쳤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왔다. 베르타는 한철검을 반대로 쥐었고, 무게중심을 칼자루에 실었다. 쇳덩어리 둔기가 된 한철검이 만프레드의 가슴을 후려쳤고 그는 명치에 고통을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베르타의 공세는 계속 되었다. 그녀는 갑주 전투에 아주 능숙하게 대응했다. 만프레드의 날아드는 공격을 노련하게 흘려낸 뒤 곧장 만프레드의 몸 곳곳을 강타하며 피로를 누적시켰고, 그때마다 만프레드는 속으로 신음을 참으며 뒷걸음질을 쳐야했다.

‘이, 이런 씨발. 이 정도 일줄은 몰랐는데.’

“흥. 용병 놈이 입만 살아서 까분거였군. 이제 죽어라! 네 주인의 목을 치러 가야 하니까!”

만프레드를 몰아붙인 베르타는 다시 위에서 아래로 한철검을 내리찍었다. 만프레드는 간신히 받아냈지만 힘에 부쳤고, 결국 투구에 정통으로 칼날을 얻어맞고 뒤로 쓰러졌다. 만프레드는 곧장 일어나려 했으나 베르타의 발걸음이 먼저 만프레드의 손목을 짓밟고 비틀었다.

“아악!”

“자, 끝을 내자고.”

베르타는 칼끝을 쥐고 만프레드의 투구를 향해 내리찍었다. 용병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 변경백이 코앞인데 여기서 죽어야하는구나.

푸슝- ! 푸슈슝 -! 푸슝!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 후방에서 벌떼같이 쏟아진 볼트들이 베르타의 몸 곳곳을 꿰뚫었고 그녀는 고통으로 몸을 뒤틀었다. 만프레드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쓰러진 장검을 주운 후 곧 바로 베르타의 목을 찔렀고 그녀는 몸을 떨며 손에서 무기를 떨어뜨렸다.

“이, 이런 비겁한 쓰레기 새끼…….”

“헹. 이기면 장땡이지.”

만프레드는 상처 부위에서 거칠게 검을 뽑아들었고 여공작은 앞으로 쓰러졌다. 강대한 여공작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르투르가 당신들은 포로로 잡지 말랬어. 우리편 포로들을 죽인 대가를 치러야한다면서.”

서슬퍼런 장검이 이번에는 그녀의 미간을 관통했다. 잠시 뒤, 란트레서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의 숨이 멎었고 포위된 북부군들은 점차 죽어나갔다. 선봉대의 궤멸을 본 후방의 영주들은 앞으로 나아가길 미적거렸다. 충분히 싸울 수 있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만약 이번 전쟁이 대왕의 승리로 돌아간다면 제후인 자신들은 쥐죽은 듯 살아야할 게 뻔했다. 그들은 슬그머니 중앙의 싸움에 집중했다.

***

“대왕 폐하께서 나가신다!”

“루이스! 루이스! 루이스! 루이스!”

대왕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선 아그라베인은 그들의 환호에 무기를 들어 올려 화답해주었다. 병사들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 속에서 그는 적군들을 향해 돌격했다. 지금의 왕실 기사들은 전설을 썼던 기사들에게 직접 배운 자들이었고 숱한 전란의 시대를 거쳐 온 괴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 막는 이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겼다. 대왕이 직접 전투에 나서자 혼란스러워하던 병사들도 열의를 되찾고 반격에 나섰다. 한번 사기를 되찾자 그들은 다시 정예군의 위용을 뽐냈다. 장교들의 함성 소리에 맞추어 진형을 짜고, 쉴 새 없이 창을 내질렀다.

“이 정도면 되겠군. 물러납시다.”

아그라베인의 말에 다른 왕실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라베인과 그의 동료들은 개인적인 공명심보다는 목표에 충실한 편이었다. 왕을 대신해서 싸우고 있는 이상, 위험을 무릎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으, 으아아악!”

왕실 기사들의 뒤를 따르던 한 무리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고 그들의 뒤로 피에 물든 거구의 기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위대한 왕실 기사들께서 도망치시는 거요? 전장에 뛰어들 때마다 적장의 목을 취해오는 게 당신들의 관례였을 텐데.”

피를 뒤집어쓴 기사왕의 모습은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왕실 기사들에게도 약간의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그들은 검을 겨누며 적대감을 표출함으로서 스스로의 두려움을 숨겼다. 기사왕은 조금의 긴장도 없이 투구 속에서 웃음소리를 냈다.

“한 분씩 정체를 맞춰보겠소. 형님의 갑옷을 대신 입고 나온 게 아그라베인 경이시고 나머지 두 분은 랄프 경과 제프리 경이군. 신중한 분들만 오셨구만. 형님이 적재적소에 사람을 알아보고 적절한 임무를 주는 안목은 있다니까. 그건 나도 꼭 본받고 싶소.”

왕실 기사들은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기사 삼인방은 냉철한 판단력과 노련함을 장기로 삼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아르투르와 싸우는 일을 피하고자 했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전세를 걸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그런 심리를 읽은 듯 양손을 펼쳐보였다.

“도망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소. 하지만 병사들이 어느 왕이 더 강한 지는 똑똑히 보게 되겠지.”

뒤로 돌아서려던 아그라베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군왕의 자질이란 개인의 무위에 있는 게 아니오.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에 있는 것이지.”

아르투르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그렇소? 스스로 전장에 나서기 무서워서 신하를 대신 보내는 왕이 백성들에게 어찌 존경을 받는단 말이오?”

아그라베인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반박할 수 없는 비난 사이에 낑긴 느낌이었다.

“당신이 날 도망자라고 부르는 건 개의치 않겠지만………… 주군을 모욕할 생각이라면 참을 수 없군.”

아르투르는 여명을 쥔 양손을 가슴팍에 두어 칼날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기본자세를 취했다.

“논증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건 샌님들이나 하는 짓이 아니겠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아르투르를 보며 왕실 기사들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못 본 사이 많이 영악해지셨구려. 도련님.”

“왕이 되면 많은 게 보이더군요. 아그라베인 경.”

두 사람은 동시에 검을 내뻗었다. 아르투르의 칼날이 좌상단에서 내리쳐졌으나 아그라베인은 노련하게 내려오는 일격을 걷어내며 내찔렀다. 아르투르는 잽싸게 피해냈다. 다른 두 왕실 기사도 아그라베인을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랄프는 차분히 아르투르의 후방으로 옮겨려 했고, 제프리는 우측에서 압박해왔다.

‘동시에 세 곳에서 공격을 당해선 승산이 없다.’

아르투르는 후방으로 돌려던 랄프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어 통째로 부딪쳤고, 그는 공성추로 얻어맞은 양 나가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프리가 휘두른 칼날은 왼손의 건틀렛으로 아슬아슬하게 붙잡아 목보호대를 꿰뚫리는 걸 막았고, 오른손의 검으론 아그라베인의 이어지는 공격을 받아쳤다.

“흡!”

두 검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이런 투박한 방식은 마스터 급의 싸움에선 흔치 않았고, 아그라베인의 칼날은 아르투르의 힘에 눌려 뒤로 밀려났다. 왕실 기사들은 분명 대륙 최고의 기사들이었지만 젊을 때만큼 힘이 세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사왕은 이제 막 신체적 전성기를 맞이한 나이였다. 중년들이 앞서는 건 경험이 가져다주는 앞선 감각과 정교한 기술이었으나 아르투르는 그 분야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하이에버에서도 강했지만 상대하기 어려운 수준은 분명히 아니었는데, 2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수준이 되어 버렸군.’

제프리는 아르투르의 손아귀에서 검을 빼내려 힘을 가득 주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제프리의 안면갑을 여명의 손잡이로 후려쳤고, 제프리는 코가 으깨지며 뒤로 쓰러졌다. 도로 달려든 랄프와 아그라베인이 앞뒤로 협공을 가했다. 분노의 화신처럼 싸우던 기사왕은 지금은 아주 냉철한 전사가 되어있었다. 그는 모든 사념을 정지한 채 전투 감각에만 몰두했다. 수천 번의 싸움을 겪은 그의 두뇌는 경험적으로 적들의 공결로를 두 세 방향 정도로 추릴 수 있었다.

‘어느 쪽이지?’

이 대 일 대결에서 한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해 방어 자세가 무너지면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몸으로 감당하는 건 고를 일이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전투에 최적화된 기사왕의 감각은 어렸을 적, 두 사람이 궁정에서 대련을 하며 뽐냈던 검술을 기억해냈다. 아그라베인의 검술은 성격답게 최소한의 위험으로 최대한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 들었고 랄프 경은 우직하고 정석적인 검술을 장기로 했다.

‘십년 전에 보았던 모습을 신뢰해도 되는가?’

저들은 그때도 이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있었다. 달인의 검술은 스스로의 천성과 재능, 신체 조건에 맞도록 최적화되어있다. 그러니 한번 익히면 당사자도 바꾸기가 극히 어려웠다. 신뢰할만한 근거였다. 아니라면? 지는 것이겠지. 아르투르의 본능은 이 모든 계산을 “잠깐의 잠깐” 사이에 불과한 시간 사이에 해냈다.

아르투르는 일생동안 보인 방어 동작 중 가장 예술적인 대응을 했다. 그는 상체를 돌려 랄프의 우직한 공격은 정확히 받아내고 아그라베인의 얕게 들어오는 일격은 아슬아슬하게 목을 움직여 피해냈다. 아르투르의 감각은 스스로의 판단에 전율하며 다음 판단을 내렸다. 아그라베인의 신중한 공격은 방어 자세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으나 랄프의 공격에는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틈이 생겼다.

충분한 시간이었다.

랄프의 투구 눈틈 사이를 여명이 비집고 들어갔다. 아르투르의 손에 피부를 찢고 살점을 헤집는 감각이 전달되었다. 아그라베인의 시선은 나자빠지는 랄프를 보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생의 전우가 죽었다고? 그 전에, 랄프가 이렇게 단숨에 쓰러질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아그라베인의 손은 이미 움직여 제 2격을 가하고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팔등으로 날아오는 검격을 쳐내며 어깨로 아그라베인을 부딪쳤다. 그는 바닥에 나뒹굴었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벌써 여명이 자신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그는 칼날이 눈동자 앞에 다가서고 나서야 모든 상황을 인지했다.

세간 사람들은 왕실 기사들을 두고 천재 기사라고 불렀다. 뭘 모르는 소리다. 진짜 천재는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백년에 한번 나올 기사라고 불렀고, 자신도 거기 동의했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사였다. 이런 자라면 능히 전설을 넘어선 신화가 될 것이고 역사를 새롭게 쓸 자격이 충분했다.

이런 죽음이라면 만족할 수 있었다.

그의 몸은 곧 잠시간의 고통을 겪었고, 아그라베인은 자신의 몸을 감싸는 냉기와 꺼매져가는 시야를 받아들였다. 지평선 너머에선 처음 들어보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쪽의 군대인가?

아니, 아니지. 자신은 이제 죽은 사람이다. 역사는 산 자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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