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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돌격하세요!”
아르투르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케이는 산악 부족들의 돌격을 이끌고 있었다. 선봉대장의 역할은 자신에게 너무 버거웠지만 수천 쌍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데 떠밀리듯 나아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훈련 상태가 형편없어 보이는 산악 부족들의 모습을 보고 케이는 그들을 괜히 데려왔나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걱정을 싹 걷어 들였다.
‘이 사람들 뭐야?’
산악 부족들은 광포한 함성을 내지르며 싸웠다. 산악 전사들과 대왕의 상비군의 싸움은 잘 훈련받은 군인과 맹수의 싸움이었다. 대열이 유지될 때는 군인들이 일방적인 학살을 벌였지만 한번 난전으로 들어가면 우위가 뒤바뀌었다. 무질서하게 달려들어 비웃음의 대상이 되던 산악 전사들은 전열로 파고들어 난전이 일어나는 순간부터는, 문명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광기 가득한 맹수가 되어 미쳐 날뛰었다.
“크하하하하하!”
자신의 갈라진 배에서 쏟아지는 내장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적병의 머리를 따서 허리춤에 들고 다니는 야만인들은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지금 케이는 그들의 사이에 묻어갈 수 있었다.
“천천히 가요! 천천히!”
“대족장님의 새 사위가 될 사람이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쓰나!”
푸샥 - !
날카로운 창날이 소리치던 부족민의 목을 꿰뚫고 나왔다. 곧 바로 빼내진 창날은 적의 기사에게 돌아간 후, 곁에 있는 또 다른 부족 전사에게 쇄도했다. 너무 빠른 공격이었던 터라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크헉!”
케이는 온 몸을 긴장시키며 칼과 방패를 들어올렸다. 자신의 눈앞엔 창 한 자루를 쥔 중간 체격의 기사가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창을 제 몸의 일부인 것마냥 자유자재로 휘둘렀으며 갑옷을 입고도 아무런 행동의 제약이 없었다. 그는 부족민들의 급소만을 찔렀다. 일격, 이격, 삼격, 사격! 케이를 둘러싸고 있던 네 명의 부족민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에, 에잇!’
케이는 앞으로 나서 장검을 내리치려 했으나
졸지간에 적들의 앞으로 내몰린 케이는 날아드는 화살을 방패를 들어 막았다. 이번에는 우측에서 철퇴가 날아들었다. 칼로 받아냈지만 쥐고 있는 팔이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좌측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자신의 목젖을 노렸다. 급히 방패를 들자 창은 방패에 균열을 낸 후 튕겨나갔고 몸이 한 쪽으로 기울며 균형을 잃었다.
“어, 어, 어!”
아직 판금 갑옷의 무게에 익숙지 않은 케이는 휘청거리다 옆으로 쓰러졌다. 재빨리 땅을 짚고 일어나려 할 때, 묵직한 금속이 뒷목을 건드리는 걸 느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아르투르 왕의 종자지? 이름이 케이던가?”
케이는 잽싸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상대방은 그대로 발을 걸어 다시금 넘어뜨렸다. 케이는 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가득 주고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신을 공격한 자를 올려다보았다. 완전 무장한 기사가 투구만을 열어젖힌 상태였다. 구릿빛 얼굴을 보며 케이는 기시감을 느꼈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 케이의 의식은 기억을 순식간에 헤집었다. 귀족 나리를 볼 만한 곳이 어디가 있었지.
기억이 났다. 상대는 하이에버에서 아르투르와 결투 재판을 벌였던 기사였다. 서부의 창, 로드리고였다. 노기사 알론소를 죽이고 마스터를 위기로 몰아넣었지만 안면을 얻어맞고 일어나지 못했던 자였다. 평기사도 못되는 자신이 상대할 자가 도저히 아니었다.
“기사왕의 종자라기에 기대를 했는데 너무 형편이 없군. 내가 네 나이 때도 이미 경험 많은 기사들과 겨룰 수 있었다. 이건 아무 종자나 데려놔도 비슷한 수준이겠어.”
케이는 구태여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무튼 얌전히 일어나서 내 지시에 따라라. 널 포로로 잡고 있으면 네 마스터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겠지.”
“잠깐만요. 로드리고 경. 제안할 게 있습니다.”
이 서부의 강건한 기사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 눈을 갸늘게 뜨며 다시금 물었다.
“함성 소리에 파묻혀 네 말이 안들린다만. 지금 내게 제안이라고 한 게냐?”
“네. 제안이요. 간단한 제안입니다. 저와 함께 전장을 이탈하시죠. 만약 대왕이 이긴다면 저는 얌전히 포로가 되겠습니다. 반대로 기사왕께서 이기신다면 저를 풀어주세요.”
“난 이미 널 죽이거나 붙잡을 수 있는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같잖아하는 로드리고의 시선을 케이는 당당히 바라보며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들어올렸다.
“두 가지 이유가 있지요. 하나, 이번 전쟁엔 로드리고 경께서 목숨을 거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지금은 패배를 인정하고 대왕의 밑으로 들어간 펠릭스 왕의 수하이셨죠? 만약 이 전투에서 대왕이 승리하신다고 해도 알짜배기 전리품들은 친위 세력에게 나눠줄테고 경은 수고했다는 칭찬이나 듣겠죠. 아무리 공을 세우셔도 대왕의 성향상 분명히 내전에서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던 자들에 대한 무언의 보복이 있을 겁니다.”
로드리고의 눈빛이 불쾌함으로 가득 찼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나쁘던 판에 그 정곡을 찔리니 더욱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는 중지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둘, 이제 전세는 누가 이길 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미래에도 밑밥을 까셔야죠. 저를 포로로 잡으시는 것보다는 제게 은혜를 베푸시는 쪽이 경의 장래에 좋다는 겁니다. 만약 기사왕께서 승리하신다면 분명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거물이 되실 터, 그 때 제가 살아있다면 결국 저도 권력의 중추로 들어갈 겁니다. 기사왕의 총애를 받는 측근이 되겠지요.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지어두는 건 영리한 일이 되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분함이 느껴졌다.
“널 포로로 잡고 싸움을 계속 할 수도 있잖나? 그러면 누가 이겨도 나는 얻는 게 있는데.”
“그 경우엔 저도 계속 저항할 수밖에 없죠. 곁에서 제 처갓집 식구들이 죽어가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저를 죽이셔봐야 시체만 남을 뿐입니다. 물론 언제나 선택은 강자의 권리입니다. 고르시지요. 로드리고 경.”
“내가 뭘 보고 널 믿지?”
로드리고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제 스승이 기사왕 아니겠습니까? 가장 먼저 배운 것이 명예, 맹세를 지키란 거였습니다.”
케이의 거침없는 대답에 로드리고는 선택을 망설였다. 저 어린 종자는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꿋꿋이 제 주장의 요점을 풀어냈다. 소년 종자답지 않은 당돌함과 재치가 엿보였다. 무력은 평범할지 모르나, 살아남는다면 분명히 거물이 될 자질은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저 자를 해친다면 기사왕의 영원한 원수가 될 것은 뻔했다.
“너는 궤변을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군.”
로드리고는 매섭게 겨눠졌던 창을 거둬들였다.
“네 말을 믿어는 보마. 딴 소리를 했다는 게 밝혀지면 그땐 가만있지 않겠다.”
“그럴리가요.”
케이는 웃어보였다. 이런 괴물을 전장에서 이탈시킨다면 자기 몫은 넘치게 한 것이었다. 꼭 칼싸움으로만 전공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
만프레드가 이끄는 우익에서의 전투는 한층 거칠어지고 있었다. 여공작이 이끄는 북부군은 방어선을 줄줄이 돌파하며 적의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을 가로 막는 어쭙잖은 용병 부대들이 있었지만 모두 휩쓸려나간 지 오래였다. 남은 건 본진뿐이었다.
“자! 겨울의 늑대들이여! 그대들의 주군의 복수를 할 시간이다! 돌격!”
“겨울은 길고 우리는 원한을 기억한다!”
여공작은 여느 귀족 아가씨들과 달랐다. 북방의 동토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거칠고 잔인해질 것을 요구했다. 시험에 실패한다면 죽음뿐이었다. 지배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험한 땅에서도 생존해왔다는 경험은 북부인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남부의 군대, 그것도 돈이나 벌러 온 용병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느새 그들의 마음속엔 자만심이 들어찼고 경계는 부주의해졌다. 만프레드가 정확히 노리던 지점이었다. 일부러 약한 부대를 앞에 배치해 줄줄이 쓸려나가게 했고, 결국 북부군은 본대와 떨어져 돌출되고 말았다.
“좋아. 충분히 깊이 들어왔군. 금괴기사단! 우리의 영지를 지킬 때다! 돌격하라! 이번 전투만큼은 죽는 자도 보상을 내린다!”
“우리의 영지를 위하여! 용병공 만프레드 만세!”
다른 모든 용병대가 북부군의 맹공에 와해되는 동안 금괴 기사단은 편히 기다리며 최적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북부군은 지치고 수가 줄어들었으나 금괴 기사단은 갓 전장에 들어온 것처럼 활력이 넘쳤다. 만프레드는 전방 지휘는 부장들에게 맡긴 채 후방에서 계속 명령을 내리는데 집중했다. 부장들이 만프레드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산개했다. 연전으로 지쳐있던 북부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쏴라!”
북부군을 포위한 만프레드 군은 석궁 세례를 퍼부었고, 용맹한 북부군 전사들이 무방비하게 쓰러져갔다. 여공작은 이를 질끈 물고 만프레드를 노려보았고, 만프레드는 비웃음으로 화답했다.
“어여. 란트레서 가문의 아가씨. 전쟁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렇게 무식하게 돌격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다들 아르투르를 보고 총지휘관이 앞장서서 싸우면 뭐라도 될 줄 아나본데, 그건 기사왕이니까 되는거라고.”
여공작은 이빨을 드러내며 분노를 내뿜었다.
“너, 천한 용병 새끼야. 내 손에 잡히면 곱게는 못 뒤질 줄 알아라.”
만프레드는 그녀를 비웃었다. 이 와중에도 포위당한 북부군은 석궁 세례로 쓰러져갔다. 그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금괴기사단의 포위망은 아주 견고했다.
“하하하하. 헛소리 그만하고 무릎 꿇고 항복이나 하쇼. 몸값 받아야하니 살려드릴게.”
“날 능멸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주마!”
여공작 베르타는 직속 가신들을 이끌고 만프레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포위망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공세가 너무 맹렬했던 까닭에 중간에 병사들이 물러나버렸다.
“야이 병신 새끼들아! 그 자리를 내주면 어떡해!”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만프레드가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옆으로 비켜서며 항변했다.
“우린 이미 몇 번이나 죽을뻔 했단 말요! 이젠 대장도 좀 싸우쇼! 우리만 목숨 걸라고 하지 말고!”
“개새끼들아! 내가 이러려고 월급 주는 줄 아냐!”
“그 돈 우리가 벌어다줬잖아! 당신이 우리 처지여도 이랬을 걸?!”
시발. 시발. 시발! 만프레드는 홀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렇지만 이미 손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좋아. 어디 해보자고. 늑대 아가씨. 지금 전장에 하도 인간이 아닌 놈들이 많다보니 잊었나본데, 이 몸은 맨 손으로 변경백이 된 사나이다! 실전 경험도 없는 네가 뭘 할 수 있을 줄 알아!”
여공작 베르타의 서늘한 한철검이 만프레드를 향해 내리쳐왔다. 만프레드는 검의 궤도를 정확히 읽은 후 역공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