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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의 군대는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런 모습은 좌익의 지휘관인 노기사에겐 매우 못마땅했다. 자신이 총지휘관이었다면 이미 총공세를 가해 적들을 무너뜨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군단 배치가 끝날락, 말락하고 있었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다들 평화에 찌들어서 제대로 싸우는 법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어. 아르투르의 군대는 얼기설기 긁어모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그런 적들을 상대로 이렇게 주춤거릴 이유가 무언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친 신중함은 독 일 뿐이다. 열정 넘치는 젊은 기사의 목소리가 투구를 뚫고 울렸다.
“마스터 나이트! 평민 놈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저희는 언제 시작할 겁니까?!”
“애송아. 잠자코 기다려라. 무작정 돌격하면 그건 용맹이 아니라 바보짓이다. 최적의 시점을 포착해야만 한다.”
불만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이러다가 공을 다 뺏기는 것 아닙니까?!”
젊은 기사에겐 다행히도 바야르의 표정은 투구에 가려져 있었다. 노기사의 분노한 표정을 보았으면 그는 바지에 오줌을 지렸을 터였다.
“집중에 방해되니 닥치고 있어라.”
“넵.”
저런 애송이 놈이 일일이 자신에게 따질 수 있는 것도 왕이 자신에게 망신을 준 까닭이었다. 이번 기회에 왕실기사단장이 그냥 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쉬지 않고 적진을 살핀다.
‘피오렌치아 놈들은 생각보다 단단해. 저 정도로 견고한 방어진이면 시간이 꽤 들겠군. 교황청 군대는 열의는 높지만 훈련도가 형편없군. 저곳이다.’
판단을 마친 바야르는 오른손으로 보검을 뽑아들었다.
“들어라! 기사들아! 우리는 싸우는 자들이다! 푸른 피의 전사들로서 누구도 우리에게 맞설 수 없다. 그런데 적장은 우리를 상대로 고작 광신도나 평민 놈들을 보냈다. 그의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증명해줄 시간이다! 모두 창을 높이 들어 올려라! 돌격을 준비하라!”
“우와아아아아아 - !”
모든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돌격 대형을 갖추었다. 전투의 환희에 휩싸인 이들과 달리 젊은 부관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마스터 나이트. 기다려주십시오! 라이넬 공작께서 개별 지휘관의 판단을 엄금한다고 하셨습니다. 돌격에 앞서 허락을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노기사는 하도 어이가 없어 기가 막힌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놈! 언제부터 우리가 일일이 명령을 받아서 움직였느냐? 왜 선왕께서 항상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우선하셨는지도 모르나 보구나? 당연히 눈앞에서 보는 사람보다 잘 아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기회가 왔으면 바로 잡아야하는 법! 돌격하라!”
바야르는 부관이 답할 틈도 없이 곧장 말을 달려 뛰쳐나갔다. 무수한 기사들의 무리가 그 뒤를 따랐다.
“오오오! 마스터 나이트께서 출정하신다!”
“알레라마치 가문의 보니파시오가 간다!”
“아르네드 가문의 마티아스가 간다!”
귀족들은 앞서 나가 서로의 용맹을 뽐내기 위해 말고삐를 바짝 쥐었다. 그들의 전투함성이 전장의 뒤덮었다.
“대왕 폐하의 영광을 위하여!”
수천에 달하는 중기병의 돌격으로 지축이 울리고 흙먼지가 일어났다. 질주하는 그들의 앞을 가로 막는 군단은 오베릭 주교가 이끄는 교황청 군이었다. 숫자는 많지만 진짜 군인은 소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하지만 장비는 경무장에 불과했다.
“형제들이여! 무도한 왕의 군대가 교회를 핍박하러 온다! 싸워라! 그대들의 신앙을 위해 싸우라! 신께서 우리를 보우하신다!”
“오오오오!”
오베릭 주교는 찬미가를 부르며 다가오는 기사들의 돌격에 맞선다. 두 대열이 충돌하자 창사들은 교황군을 중심을 완전히 부수고 짓밟아 둘로 나누어버렸다. 그들의 군마는 백병전을 위해 훈련 받은 난폭한 품종이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인간들을 짓밟고, 물어뜯으며 날뛰는 군마들에게 치여죽는 사람들이 줄줄이 속출했다.
“쓸어버려!”
거기에 기사들이 무기까지 휘두르자 순례자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그들이 든 채찍이나 몽둥이, 단창 따위로는 아무런 상처를 내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현장이 펼쳐진다.
“형제들이여! 교황 성하의 깃발 아래 쓰러지는 자에겐 천국행이 보장되어있다! 순교하라! 네 목숨을 바쳐 싸우라!”
“우오오오오오오! 순교하라! 순교하라! 천국 문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미 현실에 희망을 잃은 이들, 보고 싶은 것만 본 나머지 초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와해되기는커녕 더 악착 같이 달려드는 모습에 기사들은 기겁을 했다.
“미친놈들아! 그만 꺼져!”
“죽어라! 불신자여! 나와 함께 지옥으로 가자!”
교황군은 와해되지 않고, 더욱 사력을 다해 기사들을 가로 막았다. 기사들은 몸을 떨면서도 훈련 받은대로 베었다. 의미 없는 개죽음이었다. 가축 떼가 도축되듯 사람의 살과 피가 흩날렸다. 그런데 이 광신도들은 멈추질 않았다. 오히려 죽이는 사람들이 겁을 먹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졌지만, 바야르는 전혀 동요치 않고 적들을 휙휙 죽여버렸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도 실력이 될 때나 위협적인 거지.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다. 싹 다 치워.”
피오렌치아 군은 교황군이 말 그대로 양민 학살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그들의 곁에는 동료가 있었다. 믿을 것은 그들 뿐이었다. 돌격 나팔이 울리고, 그들은 기사들을 저지하기 위해 뛰쳐나갔다.
“지금이다! 쳐라! 기사들이 돌격력을 잃었으니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전진!”
광신도들을 상대하느라 속력을 잃은 기사들을 향해 피오렌치아 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기사들은 같잖다는 표정을 새롭게 지어보일 뿐이었다.
“네까짓 놈들이 몰려와봐야 뭐가 달라지겠느냐?! 다 죽여버려!”
***
기사단의 돌진을 목격한 라이네 공작은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게 뭐하는 짓인가! 아군 대열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단 말이다! 당장 물러나라고 전령을 보내시오!”
국왕의 호위를 대행하고 있는 아그라베인은 힐끗 젊은 공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스승이 궁정 신하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별 공적도 없는 놈이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원거리 병과로 천천히 깎아먹을 생각이었건만 작전 전체가 어그러졌어! 마구잡이로 돌격을 하다니, 그렇게 폐하가 금지하신 짓만 하고 다니는군. 자기 혼자 공만 세우면 다란 말인가?! 전투를 말아먹을 셈이야!”
아그라베인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전쟁의 시대에서 활약한 선대의 시대들이 모두 죽거나 은퇴한 지금, 바야르는 마지막 남은 전설이었다. 전장에 관한 한, 그가 맞다면 맞는 것이다.
“총사령관. 선봉대가 적진을 휩쓸고 있습니다. 이미 돌격한 이들을 불러들이시기보다는 기회로 삼으시죠. 총 공격의 시간입니다.”
라이네 공작은 입술을 꽉 깨문다.
“……좋소. 돌격 나팔을 부시오. 전군, 총 공격!”
뿔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가득 울렸다. 수십만의 인파가 아우러진 대행진이 시작되었다. 모든 이들이 이를 꽉 물고 밀려드는 적군을 주시했다. 모든 방면에서 기병대가 먼저 맞부딪쳤다. 인마가 아우러진 지옥의 향연이 펼쳐진 뒤, 잇달아 수많은 보병대가 교전을 시작했다.
“모두 짐의 왕관을 주목해라! 전장에서 아군을 찾을 수 없다면 짐의 왕관을 따라오라! 전장에서 아군이 필요하다면 짐의 왕관을 향해 도망쳐와라! 짐이 너희를 보호하고, 짐이 너희와 함께 한다! 가자! 형제들이여!”
“와아아아아!”
“가라! 가서 짐의 위용을 드높이라! 너희들의 대왕이 명한다! 가서 짐의 위용을 드높인다! 우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만들고 있다! 쳐라! 영광과 부귀영화가 너희들의 것이니라!”
“대왕 폐하를 위하여!”
두 왕 또한 목이 터져라 승리를 부르짖었다. 바야흐로 전면전의 시작이었다.
아르투르는 북구인 친위대를 이끌고 적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칼날을 휘두르자, 누군가의 목이 짚단처럼 잘려나갔다. 목보호대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투구의 안면에 피가 뿌려지며 일부가 틈새를 타고 파고 들어왔다.
‘이 느낌을 오랫동안 기다렸어.’
손에 느껴지는 살인의 감촉과 적병의 피 냄새가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무언가를 깨웠다. 폭력적인 야수가 기사도의 사슬을 끊고 나오려고 했다. 아직은 무언가 부족했다. 정의로운 기사왕에서 전장의 사신으로 거듭나려면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반역자여!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전쟁 망치를 든 기사가 자신의 앞을 가로 막았다. 얼굴은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사내였다.
휭 - !
삽시간에 아르투르는 여명을 거꾸로 쥐고 손잡이로 적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일격에 투구는 움푹 파여 버렸고 두개골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는 힘없이 뒤로 쓰러지며,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으나, 전장에 선 기사라면 죽음은 각오했어야 하는 법이다.
부상자를 내버려두고 다음 적을 상대하려는 순간, 놈이 남은 힘으로 칼자루를 쥐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투구 눈틈 사이로 칼끝을 찔러 넣었다. 칼을 파고드는 감각이 칼날을 통해 전해졌다.
“끄- 끄허억. 나, 나는 아버지의, 복수를….”
아르투르는 놈의 갑옷에 새겨진 문장을 힐끗 보았다. 폴크마르 백작의 것이었다. 그 가문과 척진 일이 있었나? 하도 많이 죽여서 모른다. 저놈이 있다면 있는 거겠지. 거칠게 놈의 머리에서 장검을 뽑아든다. 찰나의 순간, 아르투르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꺼지는 잠깐의 사이, 그 작은 눈동자 속에서 한 인간의 수많은 감정과 기억이 명멸했다. 가문 좋고, 잘생긴데다가 기사로서도 훌륭한 자이니 레이디들 사이에서 인기는 제법 많았을 것이다. 아미 결혼을 했거나, 약혼자가 있겠지. 아이가 있을지도. 실력이 훌륭한 걸 보니 단련에 매진했던 모양이다. 성실하게 살아온 젊은 기사라면 당연히 가슴에 품은 풍운의 꿈이 하나는 있었을 터이다.
마침내 폴크마르 백작의 눈빛이 꺼졌다. 자신은 그와 비슷한 배경에서 태어나 비슷한 삶을 살았다. 한 명은 왕이 되었고, 한 명은 시체가 되었다. 둘 다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연민할 필요는 없다.
눈을 감는다.
잡념을 태운다. 따뜻한 감정을 끊는다.
눈을 떴다.
저들이 날 죽이러 왔다. 저들이 내 백성을 죽이러 왔다. 저들이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부수러왔다. 분노가 피어오른다. 여명의 손잡이를 쥔 양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오너라. 버러지들아! 짐의 왕국에 침범한 벌레들이 많구나!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살육의 잔치가 진행되고 있는 전장 한복판으로 기사들의 왕이 뛰어들었다. 아르투르가 맹렬한 증오를 담아 검을 크게 휘두를 때마다 피분수가 이어졌다. 너무나 빠르고 흉포한 공격이 이어지며 적들이 무너져갔다. 아르투르의 눈에는 전쟁의 희생양도, 사연을 가진 상대방도 보이지 않았다. 죽여야 할 적들만이 가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