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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95화 (19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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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을 마친 레니에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잠시라도 정치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정신을 맑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건 붉은 용의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기사왕의 영향력은 모든 곳에 미쳤고 벗어날 곳은 없었다.

유일한 대안은 저 앞에 있는 강철 건틀렛의 왕뿐이었다. 레니에는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전장에서 수차례 목숨을 구해준 직감만큼은 믿었다. 강철 건틀렛의 왕은 우리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그의 통치는 훨씬 거칠고 전제적인 것이 되리라. 최악과 차악, 어디를 골라야 할지는 명확했다.

“대장님. 모두 모였습니다.”

이제는 선임 백인대장이 된 마르코가 깍듯이 경례를 하고 있었다. 군에서 수십 년 간 맺어온 오랜 인연들이 자신의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 관심이 없던 그들이 무기를 잡은 건 순전히 자신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설명해야한다. 왜 자신이 그들을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말이다.

마르코는 결심을 굳히고 준비된 연단 위로 올라선다. 수많은 피오렌치아 병사들도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부분은 전장에 처음 나온 사내들로 곧 다가올 전투를 두려워했다. 그게 맞았다. 전쟁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결코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피오렌치아의 시민 동지 여러분.”

왕의 백성이 된 사람들은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누군가는 다시 가슴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으나, 누군가는 그의 의도를 의심했다.

“잘 들으시오. 우리는 오늘 국왕 폐하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오. 붉은 용의 왕이건, 강철 건틀렛의 왕이건 왕일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영광을 위해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엔 아무 관심이 없지요.”

많은 피오렌치아 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최 왕들의 싸움에 우리가 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왕을 지지하는 자들도 삶이 편해지길 바란 것이지, 전쟁터에 나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건 우리들의 나라가 멸망한 순간 결정된 일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스스로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살아있으며, 가족들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우리의 도시에서 살아갈 겁니다.”

가족이란 말에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있던 고참병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제겐 딸 아이 두 명과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 제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처자식들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지킵시다. 어떤 대의도 그에 앞서지 못합니다.”

레니에는 진심을 다해, 가득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왕을 모시게 된 걸 두고 여러분들 사이에 논쟁이 심한 것을 압니다. 나는 공화국이 돌아오길 바랍니다. 하지만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통치에 만족하시는 분들도 있지요. 누가 옳았는지는 이제 후손들의 선택으로 남기도록 합시다. 우리의 사명은 그들이 논쟁할 수 있는 기반을 남겨주는 겁니다. 만약 강철 건틀렛의 왕이 승리한다면, 우리 자손들은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할 겁니다. 도시는 파괴되고 피오렌치아 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요.”

자신의 염원이, 감정이 모든 이들에게 닿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옛 공화국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이번 전투가 피오렌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시민 동지 여러분. 전투의 승패에 관계없이 우리의 나라는 멸망합니다. 그러니 떠나고 싶은 분은 떠나십시오. 허나 저는 제 가족을 위한 땅을 남겨주고 싶기에 남을 겁니다. 신께서 우리의 가족을 굽어 살피시길. 아름다운 조국 피오렌치아여,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 하라!”

모든 피오렌치아 인들은 미묘한 감정의 바다 속을 표류했다. 많은 이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러나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 하겠는가.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이 회한을 느낄 때, 안토니오 병장은 창의 끝자락으로 땅을 내리쳤다.

쿵, 쿵, 쿵!

‘나는 복잡한 이야기는 몰라. 왕을 모신 뒤에 삶이 더 좋아지긴 했지만, 목숨까지 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레니에 대장님을 믿어. 그분께서 필요하시다고 말씀하신다면 내게도 필요한 거야. 그분은 좋은 분이니까.’

쿵, 쿵, 쿵!

점점 더 많은 병사들이 창대로 땅을 내리찍었다. 물통에 뿌린 염료처럼, 화합하는 소리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제 와서 레니에 대장을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피오렌치아 인들은 영리한 사람들이었고 왕이 즉위하고 나서 살림살이가 좋아지고 사회 질서가 안정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잘 알고 있었다. 레니에 대장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보기 드문 훌륭한 친구인지 잘 알았다. 레니에는 국가의 지도자로선 부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좋은 동료였으며, 좋은 시민이었고, 무엇보다 좋은 가장이라는 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레니에! 레니에! 레니에! 레니에!”

레니에는 동료 시민들에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권력을 잡지 못했지만, 덕분에 이제 신뢰받고 있었다. 이제 피오렌치아 인들은 공화국을 추억하는 사람도, 신왕조를 지지하는 사람도 하나가 되었다. 마음속에 가족이 살 터전을 지켜내겠다는 열기가 끓어올랐다.

병사들의 굽어있던 어깨는 쭉 펴지고, 발걸음은 빨라진다. 피오렌치아 인들은 창과 방패를 쥐고 전진했다!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

***

두 왕의 군대는 전통적인 병법에 따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단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우선 중앙에는 양 측이 가장 신뢰하는 전력이 위치했다. 아르투르는 직접 두라노 군단을 이끌고 위치했으며, 후열은 타에라트 백작이 이끌고 온 연합군에게 맡겼다. 케이가 데려온 수천 명의 산악 부족들도 함께였다.

“마스터. 갓 충성 서약을 한 봉신군을 중앙에 배치해도 될까요? 차라리 만프레드 공을 불러드리시죠.”

케이의 못 미더운 눈빛으로 타에라트 백작의 군대를 보았지만 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싸움을 앞두고 있으면 아군을 믿어야지. 믿을 수 없다면 데려오지 않는 게 맞고. 그런 불안함을 이겨내는 것도 싸움의 일부다.”

“그건 그렇지만…….”

케이는 뒤편을 돌아봤다. 산악 부족들이 방언으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장이야 문명인들에게 노획해서 그럭저럭 봐줄만 했지만 아무리 봐도 야만스러웠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머리에는 이가 가득 했다.

“그쪽에서 네게 지휘를 맡겼다지? 넌 잘해 낼 거다. 그래야만 한다.”

“……네.”

산악 부족의 부족장은 케이에게 공을 세워 전사다운 용맹을 먼저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그 전에는 신부도 보여줄 수 없다고 버텼다. 보긴 뭘 봐. 저렇게 코딱지나 파먹는 야만인이겠지. 신부로는 고운 레이디를 원했는데 웬 야만족이람.

‘차라리 여기서 싸우다가 죽어? 아니야. 정략혼으로 맺어진 부부 가운데는 따로 애인을 두는 경우도 흔하다고 들었어. 당장 마스터도 그러잖아? 암! 문제될 게 뭐가 있어!’

아르투르의 상대는 라이네 공작이 이끄는 루이스의 직할부대였다. 장창을 드높이고 있는 대왕의 병사들은 판금 흉갑을 입고 있었으며 군기가 엄정하고 규율이 절도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말 그대로, 대륙에서 제일가는 최정예 군단이었다. 두라노 군이 사기는 더 높지만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한편, 좌익의 전력 차이는 더 절망적으로 보였다. 왕실기사단장이 선두에 서서 수천 명의 기사들을 이끌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상창을 치켜 올리며 각자 가문의 문장을 뽐내기 위해 경쟁했다. 어찌나 깃발이 많은 지 눈이 혼란스러웠다.

“마스터 나이트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몸과 말을 모두 완전히 갑옷으로 감싼 저 돌격 전차들을 정면에서 받아내는 건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까웠으나, 저들을 막더라도 제후들이 데려온 보병대가 뒤편에 가득했다. 반면, 이런 위협적인 전력을 상대하는 건 피오렌치아 군단과 수도 기사들과 종교적 부름에 응한 자원병들로 구성된 교황의 군대였다.

“자네들의 역할은 버티는 걸세. 기사들의 돌격을 최대한 붙잡아주게.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텨주게.”

레니에는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너무 기대하진 말아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희 피오렌치아 인들은 전쟁에 그리 익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반면, 교황의 군대를 이끌고 온 오베릭 주교는 뭘 걱정하고 있냐는 듯이 웃어보였다.

“겁먹지 마시오! 국왕! 교황 성하께서 그대의 군대를 축복하셨으니 승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 교회를 존중하지 않는 저 불경한 왕의 폭정은 승리하지 못할 것이오! 주님이 우리의 방패요 창이니! 누구도 우리에게 대적하지 못하리라! 믿음을 가지시오!”

주교는 자신 있게 메이스를 들어 올려보였다. 아르투르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의 열의는 높은 걸 지나 광신적이어서 통제가 힘들어보였다. 그냥 두는 수밖에.

‘……이교도와 싸우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열성적일 필요는 없겠지만…… 저런 광신도 공포를 이겨내는 한 가지 방법이겠지.’

마지막으로 우익에는 북부의 군대를 이끌고 온 여공작 베르타와 용병공 만프레드가 있었다. 이곳이 그나마 양과 질이 엇비슷한 유일한 전장이었다. 이교도들과의 싸움으로 단련된 겨울 사나이들과 사람을 밥 먹듯이 죽여 대던 용병들은 모두 서로를 노려보았다.

‘분명히 우리가 크게 열세야. 정면 싸움을 벌일 전력은 도저히 아닌데……여기서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다. 그러면 열세를 인정한 게 돼서 다른 세력들이 이탈할 거야. 그러니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믿을 건 원군뿐이야.’

아침에 보고 받기로는 페르디난트 대공이 레무리아로 진입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대공의 군대의 진격로는 분견대에 의해 봉쇄되어 있으리라. 결국 제 때에 도착할만한 원군은 하나, 랑트리뷔아체 뿐이었다.

“반 나절 내로 합류한다고 하더니, 그놈들은 대체 어디 가 있는 거냐?”

“정찰병을 보내볼까요?”

아르투르는 물끄러미 적진을 보았다. 형님의 군대가 진격해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십만에 달하는 군대인지라 대형을 짜는 일에만 적지 않은 시간이 들겠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됐다.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더 이상 끌 시간도 없다. 전원, 방어 대형으로!”

케이는 뿔나팔을 불어 전령들을 소집한 후, 왕의 지시를 전했다. 전령들은 모든 중간 지휘관들에게 말을 내달려 명령을 전달했다. 젊은 왕은 손에 들린 투구를 바라본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뿔 투구는 눈틈만을 남기고 있었고, 머리에는 왕의 상징인 황금관이 걸려있다.

‘이건 너무 눈에 띄는데. 더 소소한 장식으로 바꾸지 그래.’

투구를 처음 본 왕비의 제안이었다.

‘눈에 띄라고 이렇게 만든 거지. 전장에선 누구나 자신의 왕이 어디 있는 지 알아볼 수 있어야해.’

‘적들도 알아보고 집중 공격을 하겠지. 네가 죽으면 왕국은 끝이야. 너의 모든 꿈과 희망이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고.’

아르투르는 뿔투구를 들어 올려 썼다. 눈틈을 제외한 모든 시야가 가려졌다. 지평선에 도열한 위용 넘치는 루이스의 군대가 전진을 시작했다. 물샐 틈 없이 완벽한 장창의 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은 이끄는 자야. 부하들과 모든 고난을 함께 해야지. 자신의 왕이 누구보다 큰 위험을 감수하고 싸우는 걸 볼 때, 진정한 충성이 생겨나는 법이야.’

자, 이제 일생일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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