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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94화 (19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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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레니에, 혹은 그냥 레니에 대장은 자신의 앞에 도열한 무장한 젊은이들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발에는 힘이 없었고 어깨는 축 늘어져있었다. 처음부터 격렬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던 청년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대오를 기계처럼 맞춘 적진을 보며 주눅이 든 건 당연한 일이리라.

‘이건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야.’

숫자는 비슷했다. 딱 숫자만. 그 외의 모든 건 아군이 절대적 열세였다. 군사적 식견이 조금만 있다면 쉬이 알 수 있을 일이었다. 데네토르 대왕의 직할 부대가 치켜든 높이든 창날과 기사들의 질주를 어떻게 막아낼 터인가. 이토록 많은 기사들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이 없었다.

‘두 번? 한 번의 돌격이나마 버티면 다행이겠군.’

지금 아르투르를 따르는 여러 부대가 있었지만, 피오렌치아 사단은 개중에도 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고 할 만 했다. 부유한 도시답게 무장은 훌륭했다. 매 년, 소집 훈련을 했으니 훈련도도 징집병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경험과 투지야. 청년들은 국왕 부부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 마지막 남은 민중파의 후계자와 떠오르는 영웅의 결합은 새 시대를 뜻한다고 믿었어.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나라에 살게 되길 바랐지.’

그런데 첫 번째 명령이 대대적인 징집이었다. 하늘을 뚫을 것 같던 국왕 부부의 인기는 삽시간에 추락했다. 징병을 거부하는 폭동이 발생하고 국왕 부부를 칭송하느라 바쁘던 연설가들은 이제 그들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 왕비가 그 중심이 되었다.

“바로 그 개 같은 년이 나라를 팔아먹고 정복자의 품에 안긴 겁니다!”

“개 같은 년 같으니라고!”

“일어나시오! 피오렌치아의 시민들이여! 왕에게 우리의 의사를 보여줍시다! 당신네 전쟁에 우리를 끼우지 말라고! 피오렌치아는 평화를 원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열창하는 사람들.

“보여주자! 보여주자! 보여주자!”

레니에는 광경을 보면서 눈앞이 정말 아찔해졌다. 하기야, 이상할 것도 없었다. 피오렌치아 시민들은 새로이 탄생한 왕조가 더 강한 피오레 가문쯤 된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탓이었다. 피오렌치아가 사실상의 과두정으로 전락한 이후, 대중 시위는 민중과 상인 귀족들이 공존하던 방식이었다. 평소에는 툴툴대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다가, 지배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를 저지르면 그들의 거처 앞으로 몰려가 과격 시위, 혹은 폭동을 저지르는 것이다.

“폭력 사태의 발생에 책임을 지고 본 집정관은 사퇴하겠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진정해주십시오.”

그러면 피오레 가문이 임명한 꼭두각시 집정관이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를 하고, 처음에 시행된 정책은 보류되었다가 슬그머니 규모를 낮추어 추진하는 것으로 바꾼다. 그러면 시민들은 모른 척하며 받아들인다. 피오레 가문과 민중이 찾아낸 공생 방법이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그런 사례가 똑같이 적용될 거라고 막연히 믿었다. 레니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동포들을 보며 실로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어리석은 내 동료 시민들 같으니. 이럴 거면 진즉에 나섰어야했다. 내가 공화국을 위해 싸우자고 했을 때는 모두 국왕 만세를 외치더니, 이제 와서 시위를 벌여? 이제는 너무 늦었다. 그는 이제 레무리아의 왕이야. 당연히 피오렌치아도 레무리아의 일부고.’

국왕은 기사들의 왕이라고 불렸다. 기사들이 어떤 자들인가? 기분이 상하면 칼부터 뽑는데, 칼솜씨 하난 기가 막혀서 모두가 존중을 보이도록 만드는 놈들이다. 그런 자들의 왕이라,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무엇이든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기사왕이란 인간도살자들의 위에 군림하는 자, 최강의 살인마라는 의미다!

결국 남작 레니에는 경비대를 보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말을 듣지 않자 두들겨 패서 집으로 보냈다. 자신의 의도는 격노한 국왕이 동료 시민들을 학살하는 걸 막으려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자신을 보고 도시를 팔아먹은 자라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해산되었다. 왕가에서 개입하는 최악의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레니에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소. 여보. 왕의 앞잡이 노릇도 힘들군.”

펑퍼짐한 체형의 중년 여자가 웃으며 그를 맞이해준다.

“어서 와요. 여보. 참, 아가씨가 지금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가씨라니, 누구 말이오?”

“아이고, 당신도 참. 내가 아가씨라고 부를 사람이 한 사람 밖에 더 있겠어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문틈으로 살펴보니, 샤를로트가 자신의 딸들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그들이 갈라서기 전까지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아서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그녀의 복장이 훨씬 비싼 것으로 바뀌었을 뿐.

“아버지 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들이 웃으며 맞이해줬다. 그들은 샤를로트 ‘언니’와 어떤 대화를 했는 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해주었고, 레니에는 모두 귀 기울여 들어줬다.

“저희가 나가 있어야 되는 거죠?”

“우리 공주님, 이젠 눈치도 키웠구나!”

장녀가 동생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간 후 문도 닫아주었다. 소음을 줄이는 섬세함까지 더해서.

“줄리아가 참 잘 자란 것 같아요. 좋은 데 시집 갈 수 있을 것 같네.”

왕비는 레니에를 바라봤다. 레니에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깐 채 침묵을 지켰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있어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따르던 어르신의 마지막 남은 혈육이었다. 그러나 어르신이 꿈꾸던 나라는 이런 것이 아니지 않았는가.

“………….”

“참 웃기죠. 민중들의 마지막 희망이라 믿어지던 사람이, 외국 왕족이랑 결혼해서 명목상이나마 민중에 의해 다스려지던 도시를 통째로 넘겨주게 되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 않아요? 아저씨.”

왕비는 일견 슬퍼 보이면서도 맑은 표정으로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레니에 스스로는 몰랐지만, 그는 왕비가 진솔한 감정을 내보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표현하는 감정의 9할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화를 내는 게 유리하면 화를 내고, 거짓말 하는 게 유리하면 거짓말을 했다. 꼭 필요하면 울기도 했다.

“제가 대답하기엔 부적절한 질문 같습니다. 왕비님.”

샤를로트의 토라진 목소리가 들린다.

“……제가 아저씨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레니에의 대답은 단호했다.

“일개 남작이 왕비님께 말을 놓는다면 불경한 일이 되겠지요. 오신 연유를 설명해주시면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레니에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여덟 가지 색채의 무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표정을 숨기고 간접적인 의사를 표현하는데 쓸모가 많은 물건이었다.

“이번에 일처리를 잘해주셨어요. 아저씨.”

“제 직무를 했을 뿐입니다.”

태연히 말하는 샤를로트.

“직무대로라면 저한테 진작 보고하셨어야 할 게 있죠?”

“!”

그건 알려질 리가 없는 정보였다. 자신의 최측근이 배신했거나 상대측에서 실수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안토니오와 마르코는 자신을 위해 목숨도 걸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니 그쪽에서 정보가 샌 것이었다.

“보고를 준비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늦죠. 루이스 대왕의 편지가 도착한 지는 어림잡아도 일주일은 되는데, 그 중요성을 생각하면 당일 날 바로 전해졌어야 되요. 내용도 맞춰보죠. 반란을 일으켜 후방을 위협하거나 전장에서 편을 바꾼다면 피오렌치아를 독립시켜주겠다, 혹은 영구적인 자치권을 약속했겠죠.”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런 편지를 받고도 왕실에 즉각 알리지 않은 건 반역 행위로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상대가 목을 칠 생각이었다면 자신은 지금 지하 감옥에서 왕비를 대면하고 있을 터였다.

“맞춰 보죠. 제안은 달콤하게 보이지만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크고, 성공하더라도 루이스가 약속을 지킬지 알 수 없어서 망설였을 거예요. 아저씨 성격은 내가 잘 알지. 큰일을 앞에 두곤 신중한 게 가끔 지나치잖아요. 그때가 가장 속도가 중요할 때인데.”

왕비는 부채를 좌르륵 거두며 레니에를 가리켰다.

“그러니 반역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아직은.”

“……저한테 바라시는 게 있군요.”

“대화가 빨라서 좋네요. 피오렌치아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좀 나가줘요. 아저씨가 앞장선다고 하면 반감도 줄어들고, 자원자도 생길거야. 무엇보다 전쟁에 잔뼈 굵은 베테랑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겠죠. 제대한 사람들한테 내가 따로 포상해주겠다고 해요.”

레니에는 침묵을 지켰다. 왕들의 싸움에 제대한 동료들을 밀어 넣으라는 부탁을 어떻게 받겠는가. 청년들을 홀려 전쟁터로 내보내라는 이야기도 어떻게 따르겠는가.

“우리 부부를 좀 도와줘요. 진심으로 말하건 데 아르투르 왕보다 이 도시에 나은 지배자는 없어요. 생각해보죠. 내 남편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폐위……아니지. 성격을 감안하면 전사밖에 없겠군요. 그러면 저도 바다 너머로 도망가는 갈 수 밖에 없어요. 도중에 잡혀갈 확률도 제법 되는군요. 그 뒤에 피오렌치아는 희망이 없어요. 이 도시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마지막 지배자들이 죽으니까.”

……

불편한 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잘 생각해봐요. 아저씨. 루이스는 부왕의 시체가 식기도 전에 형제들과 내전을 벌인 패륜아에요. 그 뒤에는 공신과 숙부를 내쳤고요. 그런데 아저씨와 맺은 약속을 지키겠어요?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군대를 손에 쥐고 있는데? 저라도 안 지켜요.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

……

“그렇다면 국왕께서 승리하시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피오렌치아의 자치권이 연장되는 일이라도 있다면 모를까요.”

샤를로트는 손가락을 저어 강한 부정의 의사를 드러냈다.

“그건 모두에게 좋지 않아요. 왕이 피오렌치아를 바로 직할령으로 편입하지 않은 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예요. 우리가 태어났던 나라, 피오렌치아 공화국은 이미 망했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삼켜야만 하는 진실입니다. 저흰 그 나라가 구하고 싶었죠. 하지만 이미 가망이 없던 거예요. 끝났다고요.”

레니에는 공화국을 끝장낸 네가 이리 쉬이 말할 수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달리 반박할 말은 없었다.

“아저씨. 난 진심으로 고향 사람들의 안녕을 바랍니다. 나라 이름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아요. 누가 다스리는 지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그들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지의 여부겠죠. 사람들에게 그걸 가져다줄 건 나밖에 없어요.”

샤를로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도시의 수도 자리는 확고한 게 아니에요. 특히 두라노 측에서 불만이 많습니다.

피오렌치아가 왕국의 수도가 된 점에 불만을 품는 사람이 많아요. 특히 두라노 측에서 불만이 많습니다. 안 믿으실까봐 말씀을 안 드리려고 했는데, 망설이시는 것 같으니 보여드려야겠네요.”

샤를로트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보였다. 레무리아의 지도에 쭉쭉 선이 그어져 있었고 주요 도시에는 모두 X표가 쳐져 있었다. 하단에는 데네토르 왕실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이미 제후들과 영토 배분에 대한 합의를 끝난 모양이군요.”

“그것뿐만이 아니죠. 루이스는 독립을 유지하던 모든 자유 도시를 모두 파괴할 생각입니다. 살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버리고요. 반항하면 모조리 죽이겠죠. 이제 좀 동기부여가 좀 됐으리라고 봐요. 더 긴말 안하고 가볼게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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