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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이 진정된 뒤, 루이스 대왕과 그의 신하들이 도로 모여들었다. 아직 대왕과 기사단장 사이의 감정의 골은 남아있었지만 전투가 코앞이니 사감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위 지휘관들이 가득 모인 황금실의 막사 속에서 다시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진심이십니까?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폐하?”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되묻는 바야르.
“기사단장,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총지휘권은 지금부터 제가 인수합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신 이번 전투의 선봉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왕실 기사로서 왕의 깃발을 들고 돌격하는 일보다 큰 영광은 없는 것 아닙니까?”
멋들어진 갈색 수염을 기른 젊은 기사, 라이네 공작이 답했다. 무겁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그는 동부 출신의 변경 제후로, 최근 루이스의 큰 환심을 사고 있는 대귀족이었다. 그 역시 뛰어난 군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었으나 마스터 나이트의 명성에 비하면 호수와 대양의 차이였다.
바야르는 젊은 공작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상석에 앉은 루이스를 향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폐하. 왕이 직접 지휘하는 경우가 아니면 왕실 기사단장이 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게 당연합니다. 왕실 기사단이 창설된 이래 한 번도 빠짐없이 지켜진 관례입니다. 그렇기에 늘 최고의 기사를 왕실 기사단장으로 임명하는 것입니다. 재고해주십시오.”
노기사의 끓어오른 목소리엔 응어리가 가득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거친 말을 내뱉진 않을까 두려워했다. 누가 보아도 바야르는 가슴 속의 모욕감을 애써 감추고 있었으며 매 순간 한계에 부딪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라이네 공작은 그런 노기사를 보면서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마스터 나이트. 관례는 늘 깨지기 마련이오. 오히려 폐하께서 공의 업적을 존중해 선봉장의 자리를 제안하셨건만 그게 무슨 불손한 태도요? 서둘러 원수의 지휘봉을 내놓으시오.”
그러나 노기사는 공작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루이스만 바라보았다. 라이네 공작은 그럴수록 바야르에 대한 적의를 불태웠지만 당사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직위가 무엇이건 권력에 빌붙는 아첨꾼 따위와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게 그의 자부심이었다.
“……직접 말씀해주시지요. 저 아첨꾼이 말하는 게 정말 폐하의 의향이십니까?”
루이스는 매우 고까운 표정으로 노기사를 보다가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더 이상 말을 섞지 섞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사의 표현이었다. 바야르는 오히려 그 모습을 보며 차갑게 머리가 식었다. 이 젊은 왕은 더 이상 자신을 신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하인 자신도 필요 이상으로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정해진 의무에 따르면 될 뿐이다.
‘마음에 걸리는 건 내 명예로군.’
자신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런 경력으로 기사 생활을 끝마치고 싶었다. 무패의 기사, 무적의 기사, 수백 번의 전투를 치렀지만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불멸의 기사 말이다.
그런데 라이네 놈에게 이 전투를 맡기기엔 불길함이 들었다. 완벽한 기사가 말년에 주군과 물의를 일으켜 전투에 일개 기사로만 참가했고 끝에 패배한다면 명성에 어떤 오점이 될 터인가? 물론 기록자들은 자신이 명예로운 선택만 했다고 언급하는 걸 잊지 않겠지만 무패의 기사는 아니라고 하겠지.
“폐하께서 제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으시다니,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허나 이것만큼은 꼭 언급을 드려야겠군요.”
바야르는 굉장히 모순되어 보이는 말을 꺼냈다. 왕과 젊은 귀족들은 아주 불쾌하거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저런 애송이론 레무리아의 왕을 못 이깁니다. 이런 규모의 전투에서 총 지휘권을 잡기엔 경력이 모자랍니다. 제가 명예를 지켰기에 믿지 못하시겠다면 라이네 공작이 아닌 다른 경험 많은 대영주 중 한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계속된 무시에도 모욕을 참아내던 라이네 공작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바야르를 노려본다.
“뭐요? 애송이? 내 손에 죽은 바그람 족 추장이 열둘이 넘소!”
“꼬마야. 헐벗고 다니는 야만인들 좀 해치웠다고 우쭐거리지 말거라. 네가 두 배가 넘는 수의 북구인들과 싸워보았느냐? 아니면 열두 명의 기사들과 동시에 싸워서 이기길 했느냐. 아니면 옹알거리지 말고 좀 닥쳐라.”
라이네 공작은 차마 반론도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그러나 루이스 역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그의 의견이 타당하다 하더라도, 이미 마스터 나이트를 배제한 것 자체가 정치적인 이유였다. 방금 지휘권을 박탈해 바야르에 대한 신임을 철회한 뒤,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면 비웃음거리가 될 건 자신이었다.
‘차라리 따로 제안을 했으면 들어주었을 것을. 정치하는 요령이 없군.’
단호하고 차갑게 답하는 루이스의 목소리가 막사에 울렸다.
“짐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잠시 루이스를 응시하던 바야르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쥐고 있던 지휘봉을 탁자에 탁하고 내려놓은 후 뒤로 돌아선다.
“뜻대로 하소서, 폐하.”
라이네 공작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원수봉을 손에 쥔 후, 바야르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았다.
“유치하긴, 늙은이가 토라져서는 하는 짓이 여인네 같군요.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저는 동부에서 수많은 야만인들을 상대해봤습니다. 무적이었던 건 폐하의 군대지, 저 늙은이가 아닙니다. 이번에도 기필코 승리를 안겨드리겠습니다.”
라이네 공작의 말에 따라 다른 젊은 기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루이스 대왕 폐하 만세!”
반면, 관록이 있는 영주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간다고 여겼다. 마스터 나이트의 강직함 혹은 오만불손함으로 간주할 수도 있는 저 강한 성격 덕분에 그를 가까이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데네토르 군대에 있는 가장 경험 많고 증명된 지휘관이었다.
그런 자를 최고 지휘관 자리에서 배제하는 건 더 이상의 전공을 쌓지 못하게 하겠다는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싸움을 앞두고 정치를 신경 쓰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 그게 숱한 세월을 견뎌온 숙장들이 경험으로 체득한 지혜였다.
‘압도적인 전력이 아니었다면 종군 거부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군.’
이 모든 소란을 지켜만 보던 아그라베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지금 오‘데르만 왕조가 처한 현실이었다. 아직 내전의 불씨는 가시지 않았으며, 갈등 요소는 곳곳에 산재했다. 특히 선왕의 공신들과 루이스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세력의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오늘날의 공신들은 선왕과 함께 대륙을 가로 질렀다. 그들 가운데는 한때 왕국의 적이었으나 받아들여진 자도 있었고, 다른 자들이라면 결코 품을 수 없을 독특한 자들도 있었다.
-함께 하자! 동지들이여! 세상을 우리의 손에 넣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왕께서는 그런 모난 사람들마저 품으실 수 있는 특별한 분이셨다. 그분의 분노 어린 전쟁 망치를 견딜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으나, 싸움이 끝나면 패자에게 관대한 손길을 내미시는 분이었다. 소년 시절, 자신의 가문도 그렇게 복속되었다.
‘페르넬 대왕께서는 혼란이 가득하던 대륙에 질서를 가져오셨지. 원수들은 과거의 원한을 잊기로 했고, 많은 것이 달라졌다. 피도 많이 흐르긴 했지만 대부분 불가피한 경우였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페르넬 대왕의 모습을 모두 기억한다. 대륙의 끝을 향해 망치를 휘날리며 달려가던 정복자와 그의 뒤를 따르던 위대한 기사들의 모습을. 그 여정에 함께 했던 이들은 스스로의 인생을 대왕을 통해 정의했다.
잊혀 지지 않을 황금시대! 함께 하는 이들이라면 주종 관계를 뛰어넘어 막역한 친구가 되었던 시대였다. 왕과 신하 사이에도 어떤 격식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함께 피를 흘린 전우였다.
하지만 평화가 길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자 이야기가 변했다. 공신들에게 있어 오‘데르만 왕조는 모셔야 할 대상이긴 했지만 일방적인 복종을 바쳐야 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들이 만든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평화 속에 새롭게 자라난 세대는 달랐다. 태어나서부터 대륙의 끝과 끝이 통일된 모습을 본 그들에게 오‘데르만 가문은 일개 왕조가 아니었다. 알려진 지도의 절반 이상을 다스리는 나라의 제왕이라면 달라야 했다.
루이스는 누구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데르만 왕조에게는 세상을 통일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그것이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말이다. 그는 언변이 뛰어났고 남들의 이해관계를 곧잘 읽었다. 금세 루이스의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로 신흥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군주 아래 완벽한 평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었다. 세상 전부에 오‘데르만 왕조의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감격하기도 했다. 물론 공신과 그들의 후예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대륙이 통일되기 전부터 있던 유서 깊은 가문들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그들은 생각했지. 아무리 대왕의 아들이라고 한들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마음대로 휘저어놓을 순 없다고.’
그런 자들이 둘째 왕자, 셋째 왕자를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남은 이들은 왕의 숙부, 페르디난트에게 합류해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 그러니 주군께서 예민하신 것도 당연하리라.
아그라베인은 중년으로 양 세대를 모두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전성시대만 기억하는 늙은이들과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 사이에 타협은 없었다. 그런 갈등이 지난 수년 간 쭉 이어져오고 있었다.
‘상당히 무리한 원정을 계획한 것도 승전을 통해 권위를 공고히 하시려는 계획일거야.’
그런 마당에 선왕의 공신 중 가장 상징적인 인물, 마스터 나이트와의 갈등이 터져버린 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전투를 고작 몇 시간 앞둔 상황이라면 말이다.
……지나치게 잡념에 빠진 시간이었다. 자신은 왕가에 평생을 바치기로 서약한 왕실 기사일분이었다. 말도, 감정도 필요 없다. 그저 서약한 바를 따르면 된다. 오‘데르만 왕조의 가주를 섬기며 그의 가족들을 보호한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루이스 대왕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
같은 시각, 만프레드는 금괴 기사단의 모든 장교와 부사관을 소집했다. 그는 눈짓으로 모여든 인원을 점검했다.
“쉰 넷, 쉰 다섯, 쉰 여섯. 좋아. 다 모였군. 전투에 앞서 너희들에게 반드시 전해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이걸 봐라.”
만프레드가 손을 펼치자 두루마리가 쭈르륵 내려갔다. 지렁이가 기어가듯 검은 글씨가 빼곡빼곡 써져 있었다. 밑바닥에는 붉은 잉크로 만든 용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글을 아는 이들은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만프레드를 알레리온 변경백으로 임명한다. 알레리온 영지는 엘프란 강에서 나르지아노 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정의한다. 두 강 사이의 모든 토지 및 토지에 딸린 모든 권한이 수여된다. 변경백은 국경 방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어떤 군사적 행동에도 재량이 허가 된다. 또한 왕국의 최상위법을 제외한 모든 법령에서 면제를 받고, 영지 내에서 별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상의 권리는 국왕의 허가 없이 양도될 수는 없으나, 교회법에 의거한 상속자에게 이어질 수는 있다. 레무리아의 왕, 아르투르 드 엘라카르시스가 서명함.”
긴 내용을 외운 만프레드는 의기양양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모인 부관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기대감에 고조된 얼굴이었다.
“마일즈, 넌 엘란탄 반도의 자작으로 임명한다. 에드워드, 너는 셀피아의 남작이다. 충성 맹세는 번거로우니 생략한다. 그 외에…….”
만프레드는 자신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간부들에게 모두 작위와 그에 딸린 영지를 나누어주었다. 그는 용병단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던 병사들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약속했다. 붙여먹을 수 있는 땅을 수여받는다는 건 굉장한 성취였다.
평생을 용병으로 살길 바라는 자는 없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혹은 살 길이 없어 택하는 것이 용병을 택하는 사람들의 삶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귀족이나 지역 유지, 못해도 자기 땅을 가진 농민으로 살아갈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해낸 거야. 이 세상에서 발붙일 곳을 찾은 거라고!”
모두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순간을 얼마나 갈망해왔는가.
“그런데 여기서 지면 다시 떠돌이 생활로 돌아가야 돼.”
늘 밝고 유쾌하던 콘도티에레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용병 생활 십년 더 버틸 자신 있는 사람 있나?”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
“모든 병사들에게 전해라! 너희의 콘도티에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요구한다. 다가올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다치는 자는 여생을 보장하고 죽는 자는 가족을 책임지겠다! 승리를 가져와라! 우리가 발붙일 땅을 스스로 얻어낼 시간이다! 우린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잡아야한다!”
용병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만프레드! 만프레드! 만프레드! 비겁한 만프레드! 사기꾼 만프레드!”
“짜식들아! 감격스런 순간인데 좀 멋진 걸로 바꿔!”
용병들은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재차 소리쳤다.
“용병공! 용병공! 용병공! 용병공 만프레드!”
“이젠 좀 낫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