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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대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행동을 하셔야지요.”
아르투르는 무척 기가 막힌 표정으로 루이스를 올려다보았다. 이교도와 상대할 때도 사신은 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전혀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힐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아. 죄 없는 백성들이 희생되느니 여기서 너를 잡아 전쟁을 끝내는 것이 우선이다. 개인의 명예 따위보다 의무를 앞세워야하는 것이 왕의 자세다. 이번 기회에 뭔가 배우길 바라마. 무얼 하느냐! 당장 저놈을 잡아들여!”
“그렇게 큰 소리를 치기 전에 직접 내려와 보시지요!”
아르투르는 다른 기사들보다 빠른 속도로 양손에 장검을 빼내들었다. 성검에 깃든 여신도 분노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몰려들 공격에 반응하기 위해 감각에 날을 세우며 받아칠 준비를 했지만, 예상과 달리 선뜻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들은 투구 틈새로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사자, 그것도 교황에게 인정받은 정당한 타국의 왕을 직접 공격했다는 불명예는 쉬이 감수할 게 아니었다. 루이스는 한층 짜증나는 표정으로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짐의 명령을 어길 셈이냐? 좋다. 네놈들의 불충은 나중에 책임을 물으마. 왕실기사단이여, 그대들이 서약한 주군의 명을 따르라. 반역자를 잡아와라! 저항한다면 목을 가져와도 좋다!”
루이스의 가마를 둘러싸고 있던 황금 망토의 기사들이 일제히 장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 한 사람, 기사단장 바야르 만을 빼고. 그들은 눈짓으로 자신의 대장에게 언제 공격 명령을 내릴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아르투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기묘한 불협화음으로 이 자리의 모두가 불편함을 느낄 때, 왕실 기사 중 한사람이 아르투르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강박증에 가까운 의무로 유명한 웃지 않는 기사, 아그라베인 이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발을 내디뎠다. 아르투르도 그에 맞설 동작을 취했다.
“모두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마라! 모두 칼날 내려!”
노기사의 호령이 산사자의 포효처럼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모인 기사들은 가장 대담하고 뛰어난 사내들이었지만, 그들조차 단숨에 행동을 멈추었다. 아그라베인은 여전히 칼날을 아르투르에게 겨눈 채 되묻는다.
“대왕 폐하의 명이십니다.”
“기사단장으로서 명령하니 왕실 기사단은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마라. 칼날 집어넣고 당장 뒤로 물러나. 이게 마지막 경고다.”
다른 왕실기사단원들은 바야르에 대한 존경심에서, 혹은 두려움에서 지시에 따랐다. 왕실 기사단이 물러나자, 다른 기사들도 힐끗 힐끗 계속 눈치만 보았다. 그러나 아그라베인은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자신은 대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기사단장과 대왕의 명령이 충돌한다면 마땅히 대왕을 따라야한다.
채에에엥 - !
아그라베인은 자신의 눈앞까지 날아온 바야르의 칼날을 힘겹게 막아내야 했다.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바야르의 칼날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이 독사의 자식 같은 쓰레기 놈아! 길바닥 용병 새끼들조차 꺼리는 짓에 나서서 우리 기사단의 명예를 더럽힐 셈이냐! 그것도 마스터 나이트의 제자가 말이냐?! 난 그딴 짓거리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당장 기사작위 반납해!”
아그라베인은 와중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차분히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저희는 왕실 기사입니다. 대왕께서 판단하시면, 따를 뿐이지요.”
찰나의 순간, 절명을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기교와 상대의 방어를 무력화할 교묘한 속임수의 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잠시 뒤, 몇 차례 검격이 오갔지만 승부가 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한층 더 깊은 싸움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당장 이 미친 짓을 멈추지 못할까! 뭘 하는 거요?! 바야르 공! 당신이 하고 있는 건 반역 행위요!”
재차 팔걸이를 내리치며 루이스가 들고 일어났다. 그는 끓어오르는 눈길로 바야르를 노려보았고, 주군의 시선을 의식한 그는 아그라베인에겐 멸시 어린 시선을 보낸 후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이제, 바야르는 오히려 주군을 향해 당당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상대는 다섯 왕국의 왕이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의 지휘관이었으나, 자신은 세상 최강, 최고의 기사가 아닌가.
“저는 반역 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폐하. 본인과 기사단의 명예를 지키려 했을 뿐이지요.”
“지금 그대의 왕과 말장난을 하자는 거요?! 짐이 반역자로 지명한 자를 감싸고, 오히려 그를 체포하려는 충실한 신하들을 저지하다니, 이게 반역도당과 한 패가 아니면 무엇인가?! 공신이 아니었다면 영지를 몰수하고 목을 베어도 모자랄 중죄란 말이오!”
루이스의 시뻘게진 얼굴과 날아드는 삿대질은 그의 강렬한 분노를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 대왕의 분노를 얻어맞은 바야르는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왕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심기에 불편을 끼쳐드린 점은 유감입니다. 그러나 잘못한 것이 없으니 용서를 청하지는 않겠습니다, 또한 기사단에 내린 명령을 무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도 당신이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요?!”
“저희의 맹세는 평생토록 왕가의 영광과 안전을 위해 싸우겠다는 것이었으며, 기사 작위를 받을 때 했던 맹세는 명예를 목숨보다 앞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그대로 맹세를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그대의 왕이 명령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바야르는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는 맹세에 따라 폐하의 깃발에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암살자나 다름없는 비겁한 행위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제 서약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저희 왕실 기사단의 명예는 수 세대를 이어서 내려왔으며 앞으로도 당연히 이어져야 합니다. 맹세, 맹세가 우선입니다.”
루이스 대왕은 솟구치는 화를 열렬한 분노로 내비췄다.
“명예! 명예! 그놈의 얼어 죽을 명예 타령 좀 그만 하란 말이오! 저 사생아 동생 놈만 체포하면 이대로 전쟁이 끝난단 말이다! 그대한테는 이십만 명이 결전을 벌여 시체로 나뒹구는 게 사자 한명을 잡아 전쟁이 끝나는 것보다 명예로운 일인가?! 말해보시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싸우는 게 명예롭소?!”
그러나 왕의 가열찬 비난에도 꿋꿋이 고개를 치켜들고 루이스를 직시하는 바야르였다.
“실로 그러합니다. 폐하와 레무리아의 왕은 각각의 대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모두 정당한 명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투를 통해 누가 옳은 지 검증해야겠지요. 대왕 폐하, 곧 벌어질 전투에서 저 자의 목을 따오라 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홀로 적의 수 만 병력에 맞서라고 명령하시더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런 불명예스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용병들이나 불러오시지요.”
“이런 미친! 이러니까 내가 기사의 명예라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을 중용하지 못하는 거요! 싸움에서 죽어나갈 병사들은 생각도 안하오?! 정말 이기적이고 불충하군!”
“남자에게 전쟁터에서의 죽음이란 가장 영광스런 최후입니다. 그들도 의무를 다할 것이고, 기껍게 받아들일 겁니다. 폐하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셔야 합니다.”
아르투르는 루이스의 모습에서 추함을 넘은 역겨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측은함마저 들 정도였다. 정말로 병사들의 삶을 걱정한다면 평화를 이루면 될 일이고, 충성을 요구하려면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법이었다.
두 사람은 계속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다. 오랫동안 쌓여있던 감정이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대왕에 대한 불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마스터 나이트의 명성과 왕조에 대한 공헌을 생각한다면 자신에겐 당연해보였다.
‘나는 어떻게 빠져나간 담?’
진짜로 적진의 한복판에서 싸워서 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이 혼란을 틈타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이야긴데……
“그만! 곧 송장이 될 노인네의 변명은 그쯤 듣겠다! 바야르! 그대가 왕을 위해 불명예를 각오할 자신이 없다면 진정한 충성스런 자들이 그걸 해낼 거다. 명령이다! 비켜서라! 그대는 항상 짐에게는 불충만을 일삼는군! 그러고도 그대를 기사 중의 기사를 자칭하는가?”
“승전의 영광은 대왕께 돌리겠지만 명예는 싸우는 저희들의 것입니다. 선왕 시절에는 이 정도로 무도한 명령이 내려진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젠 짐이 대왕이며, 그대의 주군이다. 마지막 권고다. 시키는 대로 하던가, 비켜서라.”
바야르는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이런 꼴이나 보자고 평생 왕가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했던가. 자신은 기사였다. 기사 중의 기사. 어떤 맹세도 허투루 할 수는 없다.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옆으로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기어코 폐하께서 역사에 두고두고 비웃음을 당할 비겁자로 남기를 선택하신다면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서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군주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일은 왕실 기사의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저희는 돕지 않을 겁니다. 폐하가 시킨다면 두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할 소인배들에게 시키십시오.”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 바야르를 보며 루이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항명을 한다는 의미를 모르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지. 저 고지식한 노인네는 그걸 알면서도 저런 것이다. 왕국의 번성, 진정한 충성이 무엇일지 모를 뿐이었다.
“모두 당장 저놈을 체포해라! 금은보화와 작위를 내리겠다!”
그러나 기사들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바야르는 아르투르에게 떠나라는 듯 손짓을 했고, 아르투르도 고개를 끄덕이며 에쿠잘루스에 올라타 대열을 향해 다가갔다. 기사들은 하나 둘, 옆으로 비켜서서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사자를 공격하고도 자기가 기사라고 주장하는 놈은 내 결투 신청을 받아야 할 것이다!”
마스터 나이트의 일갈에 주저하던 이들마저 훌쩍 물러서서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마스터 나이트와 싸우고 싶은 사람도, 겁먹어서 기사 작위를 포기했다는 오명을 써서 자기 가문의 명성에 똥칠을 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대들의 주군이 명한다! 놈을 붙잡으라고!”
루이스가 분노로 다문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사들은 수치심으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침묵으로 답했다. 무언의 항의였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에게 박차를 가해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기사들의 자리를 벗어나자, 보초병들이 지켜서고 있는 길목이 보였다. 부대장의 휘장을 입은 사내가 할버드를 들고 아르투르의 앞을 막아선다.
“모두 저놈을 막아라! 대왕께서 저 자를 붙잡는 자에게 귀족 작위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다!”
여명의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놈의 목을 스쳤다. 숨을 한번 내쉴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단면적이 깔끔하게 잘린 목이 뒤로 떨어졌다. 대장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옆으로 비켜 있던 병사들은 그 광경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사왕이 아군 진영을 완전히 떠나자, 병사들은 부대장의 목 잘린 시체로 돌아와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쯧쯧. 출세도 살고 봐야할 거 아닙니까. 대장. 기사 나리들도 못 막는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막겠습니까? 딱한 분 같으니라고.”
아르투르가 떠난 뒤, 루이스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바야르를 노려보았지만 노기사는 당당히 대왕을 바라볼 뿐이었고 기사들은 자기네들끼리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그들은 이 희대의 사건을 두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대왕의 편을 드는 자들도, 마스터 나이트의 의견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불길함을 느꼈다. 이건 선왕이 죽은 이래, 계속 되어오던 오랜 갈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