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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대평원에는 일찍이 유래 없는 수준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평원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 이르는 크나큰 평야 지대가 모두 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은 사람들의 긴장감에 아랑곳 않듯 맑았으며 땅은 고르고 풀은 말랐다.
“땅이라도 좀 질척해야 기병의 활용이 제한되었을텐데……아쉽군.”
아르투르는 손의 흙을 털어냈다. 그의 뒤편에는 전신 갑옷을 입은 소년 기사, 케이가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마스터께서 이토록 긴장하시는 모습은 간만에 보네요.”
“긴장이 아니라 두려운 거다. 그리고 저런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신이 나간거지.”
대평원의 북쪽에는 오‘데르만 왕조의 상징인 강철 건틀릿 깃발이 휘날렸다. 자기 지역에서 위세를 떨치는 수십 가문들의 깃발들은 대왕의 깃발을 둘러싸며 비호하고 있었다. 그들을 시작으로, 각자의 깃발을 높이 든 수천 명의 기사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갓 기사 서임을 받은 애송이부터 나이 지긋한 이들까지, 대륙의 기사란 자들은 모두가 이 자리에 와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들은 전공을 세워 이름을 날릴 생각이 넘쳐서, 투지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 중 젊은 축에 드는 이들은 몸이 근질근질한지, 수백 미터는 떨어져있는 이곳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허공에 휘둘러대고는 했다.
무거운 목소리로 되묻는 케이.
“……승산이 있을까요?”
아르투르는 여전히 적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한다.
“모르겠다. 싸워봐야 알겠어.”
늘 승리를 확신해오던 아르투르의 미묘한 목소리는 케이에게 불안감을 자아냈다. 자기가 보아도 그만큼 상황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적진의 중앙에 위치한 대왕의 직할군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규율도 아주 엄정 했다. 다른 군대들이 이제 막 배치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이미 진형을 맞춰 사열한 뒤였다. 지금 바로 진격해오더라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준비였다.
“……이길 방법이 없지는 않은데, 성공하더라도 우리 군의 피해가 너무 크겠다. 내 생각대로 흘러갈지도 모르겠고.”
“그런가요?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죠. 마스터께서 절 이곳까지 데려오셨으니, 이번에도 책임을 지셔야합니다. 꼭 이겨주십시오. 뒤를 따르겠습니다.”
“넌 아직 전장에 나갈 솜씨가 못돼. 기사 한 명 몫도 못하지 않느냐. 얌전히 후방에서 구경이나 해라.”
케이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됩니다. 저를 믿고 따라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만 전장에 내보낼 순 없어요. 당연히 앞에서 그들을 지휘해야죠. 나이도 열여섯이나 되었고요.”
아르투르는 케이가 대견해서 피식 웃었다. 말리고 싶었지만, 케이의 말대로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북구인들을 네게 붙여주겠다. 살아 돌아와라.”
“알겠습니다. 대신 마스터는 저흴 승리로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며 서로 입가에 털털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손을 내뻗어 서로를 안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케이는 투구를 쓴 후, 북구인들과 함께 산악 부족들의 대열로 돌아갔다.
케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르투르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에쿠잘루스의 안장에 단숨에 뛰어올라선 홀로 적진을 향해 질풍 같이 달려 나갔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뒤쫓아 오고자 했으나 아르투르는 돌아갈 것을 명했다.
“형님을 만나러 가는데 호위씩이나 필요하지는 않다. 돌아가라.”
호위 기사들은 왕의 명에 말머리를 돌리긴 했으나 적진으로 홀로 달려나가는 왕을 불안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가마 위에 놓인 황금 옥좌에 한 제왕이 앉아있었다. 가마는 무척 커서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들고 있을 정도였다. 제왕의 차림새는 굉장히 호화롭고, 웅장했다. 누군가는 거기서 위엄을 느낄 지도 모르나, 아르투르는 오히려 지나쳐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왕 중의 제왕, 오‘데르만 왕가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 데네토르의 대왕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나를 찾아오다니, 짐의 군세를 보니 겁이 나서 항복이라도 하러 온 것이냐?”
비웃음 섞은 루이스의 말에도 아르투르는 꿋꿋이 고개를 치켜든 채 그를 마주 보았다. 루이스의 곁으론 바야르 경을 비롯해, 황금 망토를 입은 열 두 명의 기사들이 있었으며 각기 다른 무기를 든 수백 명의 기사들이 도열해있었다.
아르투르는 절로 웃음이 나와 피식, 하고 웃었다. 루이스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루이스 형님,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권세는 더 대단해지셨지만 엉덩이는 훨씬 무거워지셨군요. 그런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검이나 휘두르실 수 있겠습니까?”
팔을 괸 루이스는 재차 비웃음을 흘렸다.
“짐을 따르는 기사만 수 천 명이다. 무엇하러 직접 칼을 휘두르겠느냐? 네 무용이 뛰어나단 이야긴 들었다. 하지만 어디 전쟁이 개인의 용맹으로 승패가 정해지느냐? 펠릭스와 율리안에게 듣자하니 네가 내전을 말렸다고 하더구나. 너는 어차피 싸움을 벌여도 내 승리로 돌아갈 걸 알았던 게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펠릭스 형님은 싸움이라곤 뭘 모르시는 분이고, 율리안 형님이야 군재야 뛰어나지만 사람 마음을 얻을 줄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그러니 같은 상황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너라고 나를 이길 수 있겠느냐?”
“눈앞을 보시지요. 10만의 군대를 몰고 오신다고 하셔서 저도 접객 준비로 고생을 좀 했습니다. 명분을 따지자면 제가 압승이지요. 교황 성하께서 이쪽을 지지하고 계십니다. 이대로라면 형님은 파문되실 겁니다. 그러니 그 전에 제 제안을 들어주십시오.”
루이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랑 동등한 위치에 있는 듯이 행동하는 구나. 지나치게 건방진 태도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느냐?”
“형님도, 저도 동등한 일국의 왕입니다. 그러니 제가 왜 형님의 눈치를 봐야하겠습니까?”
루이스는 옥좌의 팔걸이를 거세게 내리쳤다.
“발칙한 놈! 오늘의 네가 있던 건 우리 왕가 덕분이다! 네 무용도, 지위도, 배움도 모두 왕궁에서 제공한 것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사생아인 네가 왕이 되었겠느냐? 거기에 대해 조금의 감사함이라도 안다면 네 위치를 알아야지!”
“그래서 아버지와 삼촌에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서 없었겠죠.”
“그렇다면 아버지의 후계자인 내게도 충성하는 게 맞지! 서부 대륙 통일은 우리 왕조와 아버지의 오랜 꿈이다! 이제 그게 눈앞에 있어! 그런데 감히 우리 왕조에 대항하는 떨거지들을 긁어모아서 나를 막겠다고? 그렇게 내가 널 아껴주었는데?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잔뜩 흥분한 루이스의 목소리와 달리, 아르투르의 태도는 갈수록 싸늘해져갔다. 대화를 할수록 몇 년 사이, 루이스가 자신이 알던 큰형님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게 실감이 났다.
어려서 자신은 큰형님과 따라서 대업을 이루는 꿈이 꾼 적이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분은 항상 자길 아껴주었으니까. 왕이 되시면 너에게도 자리를 주겠노라 약속하곤 하셨으니까. 그런 분의 밑에서 작위를 받아 영주가 되고, 군대를 이끌어 왕의 영토를 넓히고 싶었다. 끝에 결국 자신을 시기하던 왕족들마저 자신을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공을 인정받아 자신도 왕으로 봉해지는 꿈. 자신이 되고 싶었던 것, 자신이 함께 하고 싶었던 미래가 있었다.
그런 꿈을 꾸게 해주었던 분도, 꿈에서 깨어나게 하신 분도 큰형님이 아니신가. 자신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루이스도 호흡을 가다듬고 냉정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네가 자력으로 일군의 세력을 이룬 건 대단한 일이다. 존중 받을 자격이 있다.”
방금 전의 역정을 내던 거만한 왕은 사라지고, 관대한 손길을 뻗는 형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어린 시절, 네게 약속했던 것을 주겠다.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내 손가락에 입을 맞추어라. 그리하면 레무리아 영토를 전부 네 영지로 주마. 왕이란 칭호도 유지해도 좋다. 짐은 황제가 될 것이니까. 더 이상 교황이 우리들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루이스는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그 뒤에는 거대한 함대를 건조해서 동방으로 건너가 이교도들을 정복하자. 열사의 사막을 정복하고 머나먼 이국의 왕들도 무릎 꿇리는 거다. 내게는 황제의 위엄이 있고, 네게는 불패의 무력이 있으니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이 세상에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 우리끼리 싸움을 벌여야 할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만약 형님이 처음부터 속내를 내비추지 않았다면, 같이 세상을 정복하자는 제안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모두가 긴장감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투르가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타이르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루이스.
“오, 그러지 말 거라. 나는 널 죽이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제는 이끌어야 될 사람도 있지 않느냐. 너는 이제 일국의 왕이자 한 가문의 가장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한다.”
아르투르는 한층 목소리를 높이며 답했다.
“제가 책임 질 것이 생겼기 때문에 형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선대부터 모셔온 공신들조차 쳐내시고, 형제들도 내쫓는 분이 어떻게 세상을 품겠습니까? 형님께는 세상을 정복할 능력이 없고, 만약 그런 날이 오더라도 형님의 통치는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겁니다.”
이제 루이스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깝게 변했으나, 아르투르는 오히려 그런 목소리가 가식적으로 느껴져 실망했다.
“오, 제발. 제발, 그러지 말거라. 너도 이제 왕이 되었으니 알지 않느냐.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지만 너무 사람을 믿으셨어. 권력을 쥔 신하들은 항상 왕에게 도전하려고 들지 않느냐? 내 지위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응? 이해해다오. 나는 정말로 모두에게 좋게 가고 싶단 말이다. 네가 만약 제안을 거절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제발, 제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위협과 애원을 오가는 루이스의 말에 아르투르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믿고 따르려던 사람이 고작 이 정도의 사내였는가. 그렇게 뒷모습이 듬직하던 큰형님이 이렇게 볼품없는 자였단 말인가. 뒷맛이 씁쓸했다.
“권력을 나눠 주는 게 그렇게 무서우십니까? 형님.”
아르투르의 말에 일동이 모두 침묵했다. 루이스의 가까운 이들은 아르투르가 대왕의 역린을 건드렸으니 분명히 사단이 날 거라고 여겼다.
“형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상을 통치할 수 있을 정도로 전능하신 분입니까? 죽을 운명의 인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형님은 모든 분야에서 다른 모든 이들보다 뛰어나십니까? 항상 옳은 판단만 내리실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고 무결한 인간이십니까?”
터져버릴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오직 아르투르만이 당당히 말을 이었다.
“형님. 오직 마음으로 남을 따르게 할 자신이 없는 자만이 권력을 혼자 꽁꽁 틀어쥡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건 약함의 상징이지, 강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대왕이란 분이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너도 내게 아버지를 들먹일 참이냐?”
터져나온 루이스의 대답은 의외로 덤덤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하신 건 형님이십니다. 아무튼, 제가 온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대로 저흰 모두 책임 져야 할 목숨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고작 저희 집안싸움에 수십만의 병사들이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아버지입니다. 형님과 저, 두 사람 간의 결투로 해결합시다. 형님께서 승리하신다면 연합군을 해산하겠습니다. 제가 승리한다면 순순히 물러가주십시오.”
그러나 싸늘하게 굳어버린 루이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방식대로 싸우면 네가 이기지. 나의 군세가 훨씬 강하다.”
“그렇다면 형님이 지정하시는 네 명의 기사와 동시에 싸우겠습니다. 양 측의 군세 차이를 반영한 적절한 비율이 아니겠습니까?”
루이스는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뇌까지 근육으로 굳어버린 게냐? 그런 소꿉장난으로 전쟁의 승자를 정하자고?”
“형님께서는 분명 좋게 해결하고 싶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게 최선입니다. 가장 적은 사람이 죽는 길이라고요.”
루이스는 주변에 있는 자신의 봉신들을 바라본 후, 지평선 너머에 도열한 아르투르의 군대를 바라봤다. 형편없는 군대지만 사기만큼은 드높아보였다. 승리는 확실했지만, 아군도 큰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으리라. 왕실 기사들은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지만 루이스는 냉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대답은.”
루이스는 옥좌에서 벌컥 일어나 아르투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짐의 기사들이여! 당장 저 반역자를 체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