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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불어올 때가 되자 대륙의 사람들은 긴 잠에서 깨어났다.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전쟁도 할 수 없는 겨울이야말로 진정으로 고요한 계절이었다. 물론 고요함 속의 잔인함은 늘 있었다. 겨울에는 매년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다시 새해를 얻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눈으로 통행이 막힌 외진 마을의 경우 심심치 않게 떼죽음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겨울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벽돌집과 화톳불을 넉넉히 땔 수 있는 장작, 그리고 비축된 식량이 없다면, 겨울은 정말 잔혹한 존재였다. 이번 해에는 유독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봄을 맞이하지 못했다. 왕들이 병력을 모으느라 많은 자원을 소모했던 까닭이었다. 특히 데네토르 왕국이 그랬다.
하지만 군주들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잘 알지도 못했다. 따뜻한 성 안에서 배를 두들기며 사는 이들이 겨울을 버틴다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그리고 눈이 녹기도 전, 그들은 서로의 군대를 진군시켰다.
***
데네토르의 대군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레무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 카밀이 이끄는 척후대는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그들의 동향을 전했다.
수많은 전쟁으로 단련된 데네토르 군세의 진격은 굉장히 빨랐다. 시간을 벌어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최전방 요새들이 고작 하루나 이틀 사이에 함락되었고, 보급로를 확보한 대군은 물밀 듯이 쭉쭉 밀고 들어왔다.
‘젠장, 아직 연합군이 모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데.’
아르투르는 결국 만프레드를 보내 병력이 모일 시간을 벌기로 했다. 루이스 역시 진군 속도가 늦춰지는 걸 막기 위해 선봉대를 보냈다. 북부군을 이끄는 여공작 크리스티나가 선봉대를 자원했다.
양 군세는 강가를 앞에 둔 채로 조우했다. 만프레드는 강을 확보해서 루이스의 도하를 저지해 시간을 벌 생각이었고, 북부군은 재빠르게 만프레드를 꺾고 도하 지점을 확보해야했다. 북부군과 용병 군단의 싸움이 벌어졌다.
“돈 푼이나 벌려고 끼어든 용병 새끼들이 감히 우리 앞길을 막아?!”
란트레서 가문은 수 세대 동안 북부인들과 함께 시련을 견뎌온 그들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북부인들은 대영주 일가의 죽음에 실로 분노하고 있었고, 최고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복수를! 복수를! 복수를! 사생아 왕에게 죽음을!”
북부군의 첫 돌격에 용병들은 기겁해서 주춤거렸다. 한 번에 전열이 와해될 판이었다. 그 때 만프레드가 앞으로 나서 소리쳤다.
“막아라! 여기서 이기면 너희 월급이 올라간다! 부자 왕비께서 이르시길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금화를 인당 열 닢씩 지불하겠다고 하셨다!”
만프레드의 약속은 언제나 믿을 만 했다! 한층 사기가 오른 용병들은 달아나는 대신 창을 쥐고 앞으로 나선다! 이기면 보너스가 들어온다!
“와아아아아! 보너스, 보너스를 위하여! 돈 많은 왕비님 만세!”
“병신들아! 눈치 좀 생겨라! 말이라도 국왕 폐하를 위해 싸운다고 해야지.”
“그럼 봉급 주시는 국왕 폐하 만세!”
극지의 이교도들과 맞대며 험하게 살아온 북부 군대의 기세도 맹렬했지만, 황금의 탐욕에 눈 먼 용병들도 만만치 않게 잔악했다. 만프레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군의 숫자가 두 배도 넘으니, 기세에서만 밀리지 않으면 이길 것이다.
‘대장, 3만 명의 군대에게 그런 보너스를 주실 돈은 없잖습니까. 거짓말 하신 거 아닙니까?’
‘뭐, 어때. 이 전투 끝나면 절반 정도나 살아남을 텐데. 그놈들만 챙겨주는 건 할만 해.’
‘……아. 예.’
선봉대 간의 전투는 오랫동안 백중세를 이루었다. 북부군이 훨씬 잔인하고 사나웠지만 용병들은 수가 많았고, 인생을 바꿀 수 있을 보너스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크리스티나 여공작이 직속 가신들을 이끌고 백병전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너희들이 날 부끄럽게 하는구나! 북부 사내란 놈들이 용병 따위에게 쩔쩔 매는 거냐?! 비켜라! 내가 직접 나서겠다!”
“주, 주군! 물러나십시오! 공작 전하께 란트레서 가문의 후계가 달려있습니다!”
“내가 직접 끼어들기 전에 잘했어야지!”
크리스티나는 란트레서 가문의 딸답게 훌륭한 전사였다. 극지의 이교도들과 항상 칼날을 맞대야하는 북부인들은 무척 사나웠으며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만 했으니까.
“주군이 우리보다 앞에 서시게 만들지 마라! 다 쓸어버려!”
갓 스물이 넘은 여성 영주가 선봉에서 싸우는 모습은 자존심 드센 북부 남자들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얼굴이 달아오른 그들은 불명예를 씻고자 사나운 황소처럼 싸웠고, 병사들도 열광하며 진군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광신적인 돌격에 만프레드의 군대는 동요했다.
“이, 이 새끼야, 칼 박혔으면 죽어!”
“네놈은 죽이고 갈 것이다! 하!”
크리스티나 역시 전장 한복판에서 언덕에 선 만프레드를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사생아 왕을 따르는 사생아 용병대장이라니! 정말 천한 놈들이구나! 이리 와라! 네 해골을 술잔으로 만들어주마!”
만프레드의 부관은 근위 기사들에게 돌격을 준비시켰다.
“대장, 지금 돌격하셔야 합니다. 대장이 앞장서지 않으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든 전선이 붕괴할 겁니다.”
그러나 만프레드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뒤였다.
“저 새끼들은 일개 병사 주제에 왜 지 가족이 뒈진 것 마냥 싸우고 지랄이야?! 복수도 귀족이 하는 거고 지들은 돈이나 받아 챙기면 그만이지! 미친 새끼들 같으니라고! 후퇴 명령 내려!”
“예? 정말입니까? 이번 돌격만 막아내면 오히려 승세를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후퇴해! 저런 미친년을 어떻게 막냐! 목숨부터 챙겨!”
부관은 한심한 듯 만프레드를 보다가, 별 수 없이 후퇴나팔을 불었다. 만프레드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고참병들은 모두 잘 챙겨서 큰 피해 없이 물러났지만, 먼저 투입되었던 신입들은 뒤에 남겨졌다.
“하, 항복, 살려주십쇼!”
여공작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용병 놈들이 뭐래? 다 죽여!”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북부군의 칼날은 자비가 없었다.
“죽어라! 쓰레기들아!”
“으아아아아악 - !”
전투에서 승리한 북부군은 나르지아노 강가를 확보했고, 곧 도달한 루이스의 본대가 강을 넘었다. 그들은 레무리아 중심부로 들어오는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이제 두 왕 사이에는 어떤 방해물도 남지 않게 되었다.
“패전이라니! 적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줬는데!”
아르투르는 패전 소식이 담긴 서신을 꽉 쥐어 구겨버린 뒤,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눈길에선 용암과 같은 거센 분노가 들끓었다. 성난 목소리는 천둥 같았다.
“만프레드 놈 불러와! 그리고 우리도 북부 놈들은 포로로 잡지 마!”
아르투르의 격정적인 분노를 처음으로 본 이들은 공포에 몸을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늘 여유가 있던 만프레드 조차 겁먹은 표정으로 쭈뼛, 쭈뼛 왕의 막사에 들어선다.
“변, 변경백 만프레드, 국왕 폐하의 소환에 응했습니다.”
아르투르는 옥좌에 앉은 채 싸늘하게 웃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 치냐? 큰형님 쪽에 줄 대놨어?”
“아, 아뇨. 그럴 리가요. 제 주군은 절 알아봐주신 폐하뿐입니다.”
아르투르는 옥좌에서 일어선다.
“그러면 왜 거기서 도망을 쳐? 납득이 가게 설명을 해봐.”
“그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기회에는 반드시 만회를….”
만프레드의 앞으로 다가온 아르투르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팔꿈치로 짓눌렀다. 용병공은 곰이 짓누르는 고통을 느꼈다.
“버텨. 쓰러지면 진짜로 뒈진다.”
“네, 네넵!”
“너, 이거 적전 도주로 참수해도 할 말 없는 거 알지?”
만프레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정도 죄는 아니였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왕이 자길 죽일지도 몰랐다.
“요놈 봐라? 지금도 딴 생각하네?”
만프레드를 짓누르는 아르투르의 힘이 한층 거세졌다. 어깨 갑옷이 우그러지고 뼈가 짓눌리는 고통이 엄습했다.
“아, 아, 아악!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아르투르의 압박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한 미소로 가장되어있던 그의 역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내가 잘 대해주니까 좆같이 보이냐? 변경백이란 새끼가 국경이 쳐 뚫리는 데 지 목숨을 걸어야 되는 상황이 되니까 그냥 튀어? 병력도 뒤에 남겨두고? 작위 박탈이다. 개새끼야.”
아르투르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점점 만프레드에게 다가왔고, 만프레드는 바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잠시 더 만프레드를 노려보던 아르투르는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그를 놓아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번 전쟁 지면, 형님한테 끌려가기 전에 넌 죽이고 간다. 딴 생각 하지 마. 새끼야.”
“예. 에엡.”
“이렇게 된 이상 평원에서 회전으로 받아친다. 어차피 얼추 숫자는 맞췄어.”
가라앉은 듯한 왕의 목소리에 기죽은 듯 쪼그마한 목소리로 걱정스럽게 말하는 만프레드였다.
“회전으로는 도저히 이기기 힘든데요. 저희 쪽 병력 절반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던 삶을 살던 자들입니다.”
아르투르는 다시 싸늘하게 만프레드를 노려보았다.
“그걸 아는 새끼가 쳐 발려서 도하지점을 내줘?”
“그, 그건 그렇지만 저는 처음부터 청야 전술을 하며 수성전이나 고수하자고 주장한 점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상대는 대륙 최강의 정예군입니다.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단, 보급이 차단되어 취약해졌을 때 들이치셔야 합니다.”
아르투르는 만프레드를 힐난했다.
“그 때도 말했지만, 한해 농사 망치면 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그런 명령에 따라주겠느냐? 하다못해 갓 즉위한 왕의 명령인데 말이다.”
“그러니 군대를 보내서 강제하셔야죠. 지금이라도 명령하시면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일단…… 뭐가 되었든 이겨서 살아남고 봐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기가 찬 표정으로 만프레드를 바라봤다. 책임감 있는 영주라면 절대 못할 소리였지만, 이놈은 원래 그런 놈인 걸 떠올리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잊을 만하면 한 대 씩 패줘야 정신이 드는 손이 많이 가는 놈이다.
“짐은 기사들의 왕, 아르투르다! 그 따위 비열한 짓거리로 싸워서 살아남으니 명예롭게 싸우다 죽겠다. 전쟁을 오래 끌어서 좋을 거 없지, 단판 회전으로 간다! 전군, 진격!”
결국 기사왕의 군세는 두려움을 품은 채 평원을 향해 진격했다. 시골 촌부들조차 루이스의 군세가 얼마나 강성한 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휘관들도 헛된 승리를 장담하지 않았으며 사기는 낮았다.
그들이 믿는 것은 오직 왕, 명예롭기로 이름 난 불패의 기사왕 뿐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났던 자는 결코 그가 패배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으며, 항상 고된 일에 앞장 서는 왕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두라노에서부터 아르투르를 따라왔던 방랑 기사, 시라노가 노래를 불렀다.
“우리 시대에는 한 용맹한 기사가 있다네! 홀로 들고 일어나 백 명의 도적들을 베어버리신 분! 백 번을 싸워 백 번을 모두 이기신 분! 진정으로 남자다운 분! 그런 분이 우리의 왕이시라네!”
후렴구를 잇달아 외치는 병사들.
“우리의 왕이시라네!”
“우리 시대에는 한 명예로운 기사가 있다네! 왕의 아들로 태어나 농노를 위하여 싸워주신 분!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하여 가장 높은 자들과도 싸워주실 분! 진정으로 정의로운 분! 그런 분이 우리의 왕이시라네!”
병사들의 외침은 갈수록 커져갔다.
“우리의 왕이시라네!”
병사들을 이끄는 건 단순한 지휘관의 호령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현실에 좌절하고 가슴 속 한 구석에 고이 묻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꺼내들었다. 정의에 대한 갈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간절함이 그들을 떠밀고 있었다.
“아르투르 왕 만세!”
“만세!”
여전히 적의 강대한 군세가 두려웠지만, 가슴 속에는 결의가 피어올랐다. 무거웠던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구부정했던 등은 당당하게 펴졌다. 자신들은 기사왕의 군대였다. 새로운 세상을 열러가는 파수꾼이란 자부심이 두려움에 떨리기만 하던 몸을 앞으로, 앞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