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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렌과 로렌조는 가시 돋친 설전을 나눴던 것은 완전히 잊은 듯,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협상을 진전시켰다. 하지만 오가는 요구만큼은 서로 치열했다.
“우리 도시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폐하께서는 랑트리뷔아체의 내정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은…… 여러분은 자치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의 독립을 유지하겠다는 뜻이군요.”
“대신, 명목상으론 저희 도시의 원수가 폐하의 신하를 자처하겠습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다른 봉신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명분이 생기시겠지요. 또한 저희 측에서도 폐하께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진 않을 겁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고요.”
체면은 살려줄 테니, 실리는 내놓으라는 뜻. 에렌은 차가운 머리로 제안을 검토했다.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만 현재로선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랑트리뷔아체가 제공할 2만의 정예병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좋습니다. 제가 폐하를 설득해보겠습니다.”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군선을 150척 이상 건조하는 일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딱 피오렌치아가 가진 해군력 만큼이지요.”
“그런 조건은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폐하께서 저희의 독립을 침해하실 생각이 없다면 해군을 기르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바다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저희가 돕도록 하지요.”
“그건 그렇게 접근할 게 아니라…….”
결국 치열한 설전이 오간 끝에 내려진 결론은 간단했다. 왕실은 150척 이상의 함대를 건조하지 않고, 랑트리뷔아체는 2만 명 이상의 육군을 양성하지 않고 본토의 요새를 증축하지 않는 협의였다. 서로가 가진 영역과 입지를 존중하자는 협약이었다.
양 측은 모두 이 협상 결과에 꽤 불만이 있었다. 다시 말해,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패배했고, 동시에 승리했다. 에렌은 깃털 펜을 들어 협정서의 마지막 란에 서명을 한 후, 도리에론 원수를 바라보았다.
“공개적으로 협정을 인정하는 건 언제가 되겠습니까?”
증인이 없는 비공개 협약은 언제 어겨도 이상하지 않을 구두 약속과 다른 게 없었다. 반면, 랑트리뷔아체는 루이스 왕과 공개적인 동맹 서약을 맺은 뒤였다. 즉, 일반적으로 구속력이 여겨지는 건 그쪽이었다. 동맹을 파기함으로서 랑트리뷔아체는 외교적 평판을 크게 잃게 되겠지만, 그건 자신이 걱정해줄 문제는 아니었다.
“우릴 아직 믿지 못하는거군.”
“…….”
도리에론 원수는 좀처럼 진의를 알 수 없을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처럼 보이기도 했고, 호의의 표시로 보이기도 하는 묘한 표정이다.
“자네라면 모를 테지. 이것만 기억하게. 우리 랑트리뷔아체 인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 말이야.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가담해야하는 지는 길거리의 행상인도 알아. 대왕의 약속엔 아무 의미가 없어. 자기 친족과 교회에도 칼을 들이대는 권력에 굶주린 미치광이의 말을 어떻게 믿나? 그 자는 세상 전체를 집어삼키기 전엔 만족할 자가 아니야.”
정작 그렇게 말하는 원수 자신도, 두라노를 깡그리 완전히 정벌 하려고 한 전쟁을 입안한 장본인이 아닌가. 그러나 에렌은 당장은 그의 말을 신뢰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말이다. 이곳 사람들은 아주 실리적, 다시 말해 속물적이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동안은 성실히 약속을 지킨다.
“아르투르 왕께서 좋은 거래상대라는 건 우리도 잘 아네. 그렇게 신뢰하고 조약을 맺을 수 있는 상대는 드물지. 말이 아주 잘 통하는 분이니 양국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 믿겠네.”
도리에론 원수는 앙상한 손을 뻗어 자신도 서명을 마친 후, 악수를 청했다. 에렌은 머뭇거리다 결국 원수의 손을 맞잡았다. 혼란의 시대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법이었다. 과거의 해묵은 갈등은 벗어날 줄 알아야했다.
‘이게 국왕 폐하께 도움이 되는 길이라면, 내 원한 쯤은 얼마든지 내려놓겠다.’
***
피오렌치아의 성벽 앞, 병력의 집결지로 지정된 이곳으로 각지의 군대가 한창 몰려들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보기 드문 규모의 군대를 보며, 가슴이 웅장해졌다. 이토록 많은 사내들을 자신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모습에 가슴이 들떠왔다.
“랑트리뷔아체는 비밀 동맹을 맺었고, 케이는 성공해서 산악 부족민들을 데리고 오고 있다라……… 외교적 결과는 최상이군.”
독립을 유지할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지금이 나서야 할 때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대륙 너머에 있는 군주들마저 아르투르에 대한 지원 의사를 드러냈다.
덕분에 아르투르의 군세는 날이 다르게 증강되고 있었다. 여기에 산민들과 랑트리뷔아체가 합류한다면 얼추 숫자는 맞추어졌다. 극복해야할 건 병력의 질과 사기였지만, 아르투르는 어떻게든 두 가지를 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말로 다투는 시간은 끝이 났으며, 이제 다가오는 것은 강철의 시간이었다. 대륙의 정세가 걸린 대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
‘전쟁은 병정놀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이런 쾌감에 취해서는 안 돼.’
자신은 다가오는 싸움이 두렵지 않았다. 어떤 적이든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고, 위기에 처한들 헤쳐 나올 수단은 아주 많았다. 설령 싸움 중에 죽더라도 그건 큰 영광이지, 두려워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싸우러온 저 병사들은 어떤가?
부와 영광을 찾아온 이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고 싶은 이들이었다. 문득 회의감이 찾아왔다. 자신이나 기사들은 싸움터에서 죽게 되면 음유시인들의 노래와 가문의 연대기 속에서 영웅으로 기억되겠지만,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촌부의 죽음은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그런 죽음에 슬픔 외의 다른 것이 있을까?
상념에 빠진 사이, 녹색의 망토를 입은 장궁병이 다가왔다.
“폐하. 위르마넨 변경백으로부터 루이스 대왕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바로 척후대를 인솔해서 떠나겠습니다.”
카밀은 고개를 숙인 뒤 돌아섰다. 그는 언제나처럼 아르투르가 신속하게 출발하라는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색달랐다.
“카밀, 자네가 언젠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에겐 누가 왕이 되는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일세. 올해의 날씨, 가족의 안녕이 그들의 관심사라고 말이야. 오히려 내가 와서 왕입네 하는 게 어이가 없을거라고.”
카밀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자신은 아르투르에게 충성할 이유가 있었지만, 남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었지요.”
아르투르는 기가 꺾인 목소리였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그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 땐 정말 기분이 나빴어. 자네에게 배신감도 들었지. 지금 보니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형님과 나는 다퉈야 할 이유가 아주 많네. 하지만 고작 형제 싸움에 이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할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없네. 이건 어디까지나 형님과 나의 싸움이야.”
카밀은 머리를 긁적였다.
“전쟁 명분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그런 문제라면 비난을 받을 건 루이스 대왕이겠지요. 대륙을 통일한 황제가 나타나면 손해를 볼 사람들이 아주 많지요. 여론은 그런 자들이 알아서 형성해줄 겁니다. 교황을 끼고 계신 한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싸움만 이기시면 술술 풀릴 겁니다.”
아르투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 걸 알잖나. 대상인들, 대영주들, 고위 성직자들이야 내 승리를 바라겠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큰형님께 엎드려 절해야 될 판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평범한 농부와 도시민들에겐 누가 다스리건 삶에 변화가 있겠나? 곧 벌어질 피바다에서 그들이 갈려나가야 할 이유가 뭐냐는 거야.”
카밀은 아르투르가 자신의 진심을 바란다는 것을 듣고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찌 되었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상, 최소한의 선은 지켜야했다. 주군에게 진심을 전하면서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단어를 고르지 말게. 자네의 속마음을 듣게 싶은 거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폐하께서 방랑 기사이실 때는 그럴 수 있었지만, 왕 앞에서 제 생각을 고스란히 내뱉게 되면 그건 불경죄가 됩니다.”
아르투르는 평온한 태도로 답했다.
“내가 지금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고 있던가?”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정 원하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대로 이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폐하께서 물러나실 수도 없지요. 폐하께선 무릎을 꿇으니 서서 죽으실 분이시니 말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에게 카밀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이번 전쟁의 정당성을 결과로 입증시키실 책임을 지니게 되시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고개를 갸웃하던 아르투르는 이내 의문섞인 목소리로 카밀에게 되물었다.
“그건 이미 내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무슨 결과가 내 정당성을 더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세간 사람들은 신이 왕권의 근간을 내려준다고 믿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 절망이 가득한 땅에 희망을 가져오는 자야말로 진정한 왕입니다. 폐하께서는 루이스 대왕보다 나은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셔야 할 책무가 있다고 봅니다.”
아르투르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카밀의 말은 언제나 뾰족하게만 느껴졌으며, 아주 불쾌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연유를 안다. 이 나이 많은 친구는 굴욕과 부조리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백성들은 자신과 카밀 중 누구에게 더 큰 공감을 느낄까? 그건 뻔한 대답이었다.
“만약 루이스가 승리한다면 그 자는 황제가 되어 지상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구축할 겁니다. 영리한 사람이니 성공하겠지요. 결국 무적의 군대를 만들어낸 그는 결코 서부 대륙에 만족하지 않을 겁니다.”
루이스 대왕의 야심은 익히 알려진 터였다.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들이 그렇듯, 큰형님도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을 얻고 싶어 했다. 아버지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더 많은 전쟁에 승리함으로서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 것들이 세간 사람들이 칭송하는 위대한 왕이 아닌가. 대륙 너머의 군주들마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을 지원하는 이유였다.
“폐하도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폐하의 무용과 군재는 제가 본 최고니까요. 머지않아 대륙의 모든 기사들이 폐하께 열광할 겁니다. 그들을 데리고 세상 끝까지 말을 달리실 수도 있겠죠. 뒤로는 주린 배를 움켜잡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앞으로는 시체의 산을 쌓아가면서 말입니다.”
정적이 흐른다.
“만약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하십시오. 일개 신하인 제가 그런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왕들이 그렇게 하니까요. 하지만 폐하는 친구로서 제게 여쭤보셨고, 저는 폐하께서 다른 길을 가실 때 그때는 진정으로, 다가올 전쟁에서 죽을 사람들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 의견입니다.”
카밀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고, 아르투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바램이 어쨌건, 이미 병력은 집결했다. 이제는 싸우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