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에렌은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랑트리뷔아체가 루이스의 침공을 막아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레무리아 왕국이 멸망하면 그 다음 순서가 될 것은 랑트리뷔아체가 될 것은 뻔하며, 교회를 상대로도 칼을 뽑는 왕이 약속을 지키리라 믿겠냐는 질타였다. 그런데 의원들은 말꼬리만 잡고 늘어졌다.
“레무리아 왕국이요? 저희는 그런 명칭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옳소! 이건 우리 도시를 종속시키겠다는 야심의 발로가 아닙니까?”
“내 사촌이 당신 왕에게 죽었단 말이야! 동맹을 하고 싶으면 겸손한 자세로 청했어야지!”
하도 그들이 아우성을 쳐대는 통에 에렌은 그만 말을 멈추었다. 그 때를 노린 란트레서 여공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루이스가 랑트리뷔아체에 약속한 많은 특권과 보상을 상기시키며, 지금이야말로 대왕에 대한 충성을 증명할 때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투는 무척 거칠고 거만했으나 의원들은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듯 쉽게 넘어가주었다.
“역시 루이스 대왕께서는 통이 크십니다!”
“동방 무역 전담권을 주시겠다고요? 이제 피오렌치아의 자리를 빼앗아오는 것도 시간 문제겠군요!”
“이건 무조건 남는 장사야!”
반면,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공작 전하, 말씀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약조하신 것이 분명히 이뤄지겠지요?”
“불쾌하구나. 대왕의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게냐? 하기야, 도시에 사는 상인 놈들이 신의라는 걸 알 리가 없지. 걱정하지 마라. 너희들에게 약속한 건 하나도 빠짐없이 이뤄질 것이다. 란트레서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다.”
여전히 불안한 눈빛이었지만, 대부분의 의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앞 다투어 아부하기 바빴다. 루이스 대왕은 랑트리뷔아체에 레무리아의 총독과 같은 입지를 제안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단숨에 가장 성공적인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약속이 지켜질 때의 이야기지! 저 교활하던 이들이 어쩌다가 저렇게 눈이 멀어버렸단 말인가? 애초부터 나를 부른 건 여공작 앞에서 망신을 주어 편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군.’
에렌은 모욕감에 화가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더욱 화가 나는 건, 이런 상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도리에론 원수에게 원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원수의 하나 남은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은 날카로움으로 여공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에렌의 등에는 묘한 위화감과 스쳐지나갔다.
에렌의 시선을 느낀 도리에론 원수는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마주한다. 둘 사이의 미묘한 시선이 오갔다.
‘아직 그리폰의 발톱이 녹슬지 않았군. 그런데 왜……?’
자신이 확보한 신뢰할만한 정보들에 따르면 여전히 랑트리뷔아체의 정치의 실권은 도리에론 원수에게 있었다. 그런데 원수는 뒤로 물러난 채, 다른 의원들만 여공작에게 아첨을 하고 있다.
‘이건 완전히 대귀족들이 도시를 깔보며 생각하는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에렌은 차분히 도시에 들어선 후 있던 일을 하나씩 돌아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위화감이 드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랑트리뷔아체는 이렇게 무례하게 사신을 대하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왕과 같이 오만한 사람들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비위를 맞춰줄 줄도 아는 세련된 외교관들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 독립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야. 형식적인 충성도 거부하는 판에, 루이스를 왕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어.’
란트레서 여공작은 기가 산 모습으로 아첨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성질 나쁜 암늑대는 의원들을 지금 뼛속 깊이 멸시하며, 도시 국가 놈들은 탐욕스럽고 시야가 좁다고 확신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은 임무에 실패하지 않았다.
***
밤이 찾아왔다. 에렌은 모든 수행원들이 깊이 잠들길 기다린 후, 검은 두건을 쓰고 홀로 숙소를 나섰다. 달빛이 흐르는 밤중의 시가지를 가로질렀다. 횃불을 들고 길거리를 순찰하던 경비병들이 까칠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신원을 밝히시오. 밤 중에 도시를 쏘다니는 용건은?”
“나는 아르투르 왕의 사절이오. 용건은…….”
에렌은 임시로 발급된 통행증을 보여주며, 한 손가락으로 골목 끝자락을 가리켰다. 야밤인데도 붉은 등이 번득이는 골목이었다. 경비병들은 피식 웃어 보였고 에렌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들의 손에 동전 몇 닢을 쥐어주었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마시오. 내 체면을 지켜주셨으면 좋겠군.”
경비병들은 서로 킥킥 웃어댔다.
“암, 암. 이해합니다. 외지로 나갈 때면 여자가 그립지요. 좋은 시간 되십시오. 대사님.”
그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주었고 에렌은 홍등가로 들어섰다. 환락가의 달콤한 향기와 신음소리가 그를 유혹해온다.
‘에렌, 너는 발타리아 앞에서 신성한 혼인 서약을 했어. 나쁜 생각은 하지 마. 너에겐 왕의 대사로서 품격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곁눈질조차 하지 않은 채 가장 큰 건물로 터벅터벅 다가갔다. 이따금 그의 손을 잡아끄는 호객꾼들이 있었지만 거칠게 떨쳐냈다. 그때마다 곱지 않은 시선과 욕설이 쏟아지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장 큰 가게로 들어서자 머리가 벗겨진 주인장이 그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떤 아이를 지명해드릴까요?”
에렌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이런 환락가는 너무 낯선 곳이었다.
“물총새 같은 아이를 만나러 왔소.”
“마침 비어있습니다. 지하실로 가시면 됩니다. 유명한 아이니 비용은 제법 나올 겁니다. 아시고 오신 거겠지요?”
휙 열쇠를 던져주는 주인장.
“고맙소. 비용 문제는 알아서 하리라.”
에렌은 열쇠를 받아들고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여러 신음이 들리는 방을 지나, 끝자락의 방에 도달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이리 오시지요. 즐겁게 해드리겠습니다.”
화려히 단장한 아리따운 여자가 남사스러운 옷을 입은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녀는 뾰족한 머리핀을 손에 쥐고 있었고, 뒤로는 짙은 커튼이 쳐져있었다. 에렌은 방 안을 슬쩍 살펴보았지만 자신이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음. 아니, 괜찮소. 내가 방을 잘못 찾아왔군. 이만 나가보겠소.”
에렌이 뒤를 돌았을 때, 그는 자신의 목에 겨눠진 싸늘한 철의 감촉을 느꼈다. 슬쩍 곁눈질을 해보니 방금 전까지는 머리핀처럼 보이던 단검이었다.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아니랍니다. 말해보시죠. 암호는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그러나 커튼 뒤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가 곧 단검을 물러나게 했다.
“그만둬라. 아이야. 그분은 내 손님이 맞으시다.”
에렌은 목소리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도리에론 원수였다.
“실례했습니다. 대인. 모쪼록 용서해주십시오. 어르신의 경호를 담당하는 중이라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방금 전까지 살벌한 태도를 보이던 여인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에렌은 상황을 파악하고 커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걷혀진 커튼 뒤로, 의자에 앉은 원수와 로렌조 의원의 모습이 보였다.
“휴우. 십 년 감수했군요. 짓궂으십니다. 원수님.”
“끌끌. 자네가 숫기가 없는 게야. 저리 아름다운 아이를 보고도 그리 의연할 줄은 몰랐네.”
에렌은 다짐하듯이 말했다.
“제게는 부인이 있으니까요. 자, 이제 진짜 협상을 시작하는 겁니까?”
“서두르지 말게. 우리 레무리아 인들은 협상에 앞서 사담을 좀 나누지 않나. 두라노 인들은 항상 솔직하고 강건하지. 그런 사람이 모여서 장인들의 도시가 된 걸까, 아니면 장인들의 도시여서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친 걸까? 옛날부터 참 궁금했다네.”
그러나 에렌은 원수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고 보다 직설적으로 말을 맞받아쳤다.
“이런 자리에서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게 편하진 않습니다. 갖춰야 할 격식이 있는데 원수궁 같은 좋은 곳을 두고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보안도 그다지 훌륭해 보이지 않는데요.”
원수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우리 여섯 도시 가운데, 자네들이 가장 근면하고 정직해. 하지만 요령이 부족하니 항상 최고는 우리나 피오렌치아의 차지였지. 그런데 이제는 자네가 왕국의 재상이 되었다니 놀랄 뿐이야.”
“아르투르 국왕 폐하께서는 강직함과 진솔함을 높게 평가해주시는 분입니다. 아첨과 거짓을 좋아하는 군주들과는 다르시지요. 그런 분 덕분에 제가 아직 살아있는 것이고, 이런 분에 넘치는 자리도 얻은 것이겠지요.”
도리에론 원수는 씩 웃어보였다.
“그건 자네 말이 맞구먼. 하지만 재상으로 성공하려면 그것만으론 부족할 걸세. 사고를 좀 더 유연하게 해보게. 결국 국가의 대사라고 해봐야 사람 사는 이야기의 하나일 뿐이야. 나, 자네, 로렌조 군, 그리고 국왕 폐하. 네 사람만 동의하면 되는 거라고. 게다가 번화한 사창가만큼 비밀리에 협상하기 좋은 곳도 없네. 자네가 이곳에 왔다는 게 들킨다 한들 의도를 의심할 사람은 적고, 소음이 워낙 심하니 누가 듣기도 힘들지.”
늙은 정치가는 단숨에 표정을 뒤바꾼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이 자신을 부라렸다.
“비밀 회담을 원수궁에서 한다고? 거긴 매수된 첩자 놈들 천지야. 보조 요리사와 근위대 장교, 행정 업무를 돕는 보조 직원까지 중요한 대화를 엿들을 놈들 천지라고. 게다가 워낙 고요하니 작은 소리만 내도 모두가 듣지. 벽창호 왕에, 벽창호 재상이면 나라가 무슨 꼴이 되겠나? 좀 유연해지게.”
“…….”
원수는 침묵이 흐르자 그제야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에구, 미안하네. 나이가 워낙 많다보니 자네 나이 대의 사람만 보면 잔소리를 하게 되는군.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양해해주게.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네가 일을 망치더라도 그건 폐하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니까.”
에렌은 그의 말에 더욱 크게 빈정이 상해 원수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오후에 이미 기분은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 이번 일을 보고 드리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 협상이 잘 이뤄진다면 말입니다.”
“난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군. 로렌조 군, 자네가 맡아서 진행해보게.”
말을 마친 원수는 잇달아 기침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젠 같은 실무자 선의 협상이 이어질 시간이었다.
“우선 저희 쪽 연기에 장단을 잘 맞춰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임을 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저 철없는 여공작을 속이려면 불가피했습니다.”
“우린 레무리아 인들이니 서로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왕비님께 대해 모욕을 가하셨던 사건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다음부터는 크게 주의해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이는 로렌조 의원.
“명심하겠습니다. 아무튼…… 저 건방진 여공작은 우리 도시가 정말로 루이스의 편을 들 거라고 확신하며 돌아갔습니다. 덕분에 공조 작전에 필요한 여러 정보들도 들을 수 있었지요. 앞으로도 계속 공유해드리겠습니다.”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병력입니다. 랑트리뷔아체는 루이스 대왕이 대륙 전체를 정복하도록 내버려둘 셈입니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저토록 강력한 대왕에 앞장서서 맞서야 할지에 대한 의문은 있지요.”
화내듯 책상을 내리치는 에렌.
“바로 그걸 폐하께서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로렌조 의원.”
지켜보던 도리에론 원수가 끼어들었다.
“우리도 폐하가 원하시는 도움을 제공해드리겠소. 보병대 1만 6천과 기병대 4천, 모두 잘 훈련받은 정예병들이오. 그들은 모두 우리 도시의 가장 훌륭한 청년들입니다. 왕께서는 그들의 공헌에 대해 마땅한 보상을 해주실 거라 기대해도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원수 각하.”
도리에론 원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아. 우린 말이 통할 것 같군. 이제 우리가 얻을 보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