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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가 산악 부족의 원로들을 만나고 있을 때, 에렌은 전권 대사의 자격으로 랑트리뷔아체로 향했다. 에렌은 호위 행렬을 최대한 위엄 있게 꾸몄다.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자신을 통해 왕의 권세를 엿볼 터였다. 그리하여, 오십 명의 중기병으로 구성된 행렬이 그를 호위했다. 위협감을 주지는 않되, 적당히 위세를 자랑할 수는 있는 규모. 딱 자신이 원하던 만큼이었다.
‘상황은 나쁘지 않다. 랑트리뷔아체의 노회한 정치꾼들이 데네토르의 확장을 내버려둘 리가 없지. 결국 우리와 손을 잡을 거야.’
아르투르 왕 역시 랑트리뷔아체에게는 굉장히 후한 조건을 내밀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그들의 힘과 위상을 고려한 결과였다. 나르지아노 강가에서 다른 도시 국가들의 군대가 도망갈 기회만 엿보던 것과 달리,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그리핀 깃발 아래서 기꺼이 피를 흘렸다.
‘스스로 힘을 증명한 자들에겐 그만한 대우를 해주어도 좋네. 과거의 은원 관계는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제안을 해도 좋네. 단, 다음부터는 짐의 부인에겐 적절한 예우를 갖출 것을 반드시 상기시키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현명하신 결단에 찬사를 보냅니다. 폐하.’
에렌은 아르투르의 현실 감각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덧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어진 그는 많은 사람을 보았다. 수많은 지도자와 영웅을 보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조그마한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세상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잘못된 믿음의 결과는 늘 처참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고는, 더 좋지 않은 세상만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 국왕 폐하는 다르시다. 그분은 일생동안 보았던 누구보다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계시지만 함부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폐하야말로 정말로 세상을 바꾸어 가실 진정한 영웅이시지.’
이제 자신에게 있어 그의 신하란 사실은 단순한 권세를 뜻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자, 삶의 보람이었다. 그만큼 이번 임무에 느끼는 책임감도 막중했다.
어느덧 랑트리뷔아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 최대의 산업 도시이자 거대 무역항의 모습은 회색의 도시다. 바위섬 위에 지어진 이 무역 도시는 철저한 행정 계획을 거쳐, 대칭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행정가로선 극찬할 만 했지만,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것처럼 답답한 기분도 들었다.
도시와 본토 사이에는 석조로 만든 기다란 다리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과 물자들이 부교를 통해 통행했고, 배로는 그보다 많은 물자가 운송되었다.
‘이 광경이 랑트리뷔아체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던 이유지.’
수많은 왕들이 이 바위섬 위의 도시 국가를 길들이겠다고 전쟁을 걸어왔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 갯벌에서 바위섬을 넘보다 목숨을 잃은 군대는 정말 많았고, 그때마다 랑트리뷔아체 인들의 콧대도 높아졌다. 그들은 왕에게 무릎 꿇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 자부심은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랑트리뷔아체 인들의 행렬에도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반갑습니다. 두라노의 에렌. 이제는 영주가 되셨으니 공(lord)라고 칭해야겠군요?”
마중 나온 랑트리뷔아체의 의원은 중년의 귀족이었다. 로렌조라는 인물로 그는 에렌과 오랫동안 거래 관계를 맺어온 자였으며, 두라노 전쟁 당시에 협상을 조율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등 뒤로, 할버드를 치켜든 수십 명의 청년들이 위압적인 시선을 보내왔다. 에렌은 당당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뭐라고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레무리아의 정당한 왕인 아르투르 국왕 폐하의 대리자로 왔다는 점만 기억해주십시오.”
“저희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그런 칭호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랑트리뷔아체를 제외한 레무리아의 왕이면 모를까요. 교황 성하에겐 저희 영토의 주권을 누군가에게 양도할 권리는 없거든요.”
일순간 긴장감이 맴돌았다. 협상 앞에 이런 기세 싸움부터 있는 흔히 있었으나, 보통 순조롭지 않은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잠깐 경직된 분위기를 뒤로하고 로렌조 의원은 빙긋 웃어보였다.
“하지만 칭호야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실제가 중요한 거지요. 마스터 대장장이께선 제 오랜 친구셨으니 제가 힘을 써보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 자 가십시다.”
두 사람은 석조 다리를 건너 도시로 들어갔다. 유난히 키가 큰 근위병들이 배치되어 앞서가며 그들이 지나가는 모든 거리를 통제했다. 그러나 기사왕의 사절이 온다는 소식은 이미 시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뒤였고, 몰려든 군중은 붉은 용 깃발을 향해 야유를 보냈다.
“살인자!”
“폭군의 사절이다!”
“네 도시를 왕에게 팔아넘기니 기분이 좋더냐!”
“내 동생이 너희 왕한테 죽었어!”
몰려든 군중의 고함에 에렌이 당황한 표정으로 근위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흥분한 군중이 길을 막아도 사자를 보호하고 있을 뿐, 길을 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뭡니까? 저는 국왕 폐하의 사절로 왔습니다! 이런 결례를 저질러도 되는 겁니까?”
로렌조 의원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투르 왕과 저희는 얼마 전에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까? 대사의 임무 가운데는 본국을 대신 해 욕을 먹는 일도 있지 않습니까? 저들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니 여론의 비난쯤은 감수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에렌은 처음에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짓다가, 화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고성을 높였다.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는 거요! 지난 전쟁은 당신들이 먼저 시작했잖소! 폐하께선 멸망할 뻔한 우리 도시를 구해주신 분이고! 그분께선 과거의 원한을 새롭게 시작하자고 왕비께 저지른 무례도 눈감고 사절을 보내셨건만, 어째서 대우가 이 모양이란 말이오? 이런 수모를 더 겪을 수는 없소. 당장 군중들을 물러주시오!”
두 사람은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결국 로렌조 의원은 이마를 꾹 눌러 화를 한 차례 가라앉힌 뒤,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했다. 명령이 내려지고도 군중은 한참을 버티다가, 근위병들이 몽둥이를 들어 몇 명을 두들겨 패고 나서야 완전히 물러섰다. 에렌은 그제야 납득한 뒤,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에렌은 이제 처음에 올 때 협상 결과를 낙관했던 일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랑트리뷔아체인들이 부디 현실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를 바랐다. 아르투르의 사절단이 지나간 후, 군중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되물었다.
‘왕의 사절이 지나갔나?’
‘응. 이제 집에 가도 돼.’
쓰러진 사람에게 경비병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웠다.
“살살 때리지 그랬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자, 분위기는 잘 조성한 것 같으니 돌아들 갑시다.”
***
에렌이 의사당 안으로 들어서자, 각자의 의석에 앉은 수십 명의 의원들이 눈길을 보내왔다. 에렌은 그들의 시선이 경계심과 의혹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가장 높은 상석에 앉아있던 수염이 지긋한 노인이 일어나자, 다른 의원들도 모두 기립했다.
“어서 오시오. 두라노의 에렌 공. 랑트리뷔아체의 귀족과 평민을 대표하여 그대를 환영하는 바이오. 오는 길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고 들었소만, 부디 협상을 통해 양국이 모두 원하는 걸 얻어갈 수 있길 바라오.”
저 노인, 도리에론 원수는 강력한 왕들에 맞서 랑트리뷔아체를 몇 번이고 지켜냈던 전설적인 지도자였으며, 살아있는 레무리아 역사의 증인이었다. 그의 오른쪽 눈은 멀어 안대를 찼으며 노쇠한 몸 때문에 항상 부축해주는 젊은이가 곁에 있었지만, 남은 한쪽 눈에서는 결의마저 느껴졌다.
에렌은 도시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참아냈다. 자신은 도시의 대표자로 온 게 아닌, 국왕의 사절이었다. 도시 국가의 원수에 비해 격이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에론 원수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은 왕비님께 피오렌치아 인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무례한 답신을 보내기 전에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랑트리뷔아체가 쌓아온 외교적 명성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도리에론 원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에렌은 능구렁이가 몇 마리가 들어앉아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마스터 에렌. 두라노 인들도 피오렌치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소만.”
“샤를로트 왕비님께서는 레무리아 왕실의 안주인이십니다. 제가 그분께 어떤 사감을 가지고 있느냐는 제 의무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분에게 합당한 예우를 표해야합니다.”
콧방귀를 끼는 도리에론 원수.
“흥. 도시 국가의 지도자가 왕당파가 다 되었군. 아르투르 폐하야 그렇다고 칠 수 있지. 비록 적이었지만 훌륭하신 분이오. 하지만 그 피오렌치아 여자는 아니지. 피오레 가문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다가 갑자기 기묘한 수를 써서 왕비 자리를 꿰찬 모양인데, 두라노 인이 정말로 그 자를 어머니 모시듯 대할 수 있겠소?”
에렌은 도리에론 원수가 이런 외교적 도발을 계속해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전설적인 정치가도 세월의 흐름 앞에는 총기를 잃고 마는 것인가? 본래라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원수를 말리고 있어야 할 다른 의원들도 오히려 기세등등한 태도였다.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수님. 견해의 불일치보다는 공유할 수 있는 이해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에렌은 벌컥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눌렀다. 자신이 수모를 좀 겪어서 왕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감수하리라. 이 모욕은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갚아주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용건으로 오신 귀빈이 계시니, 두 분이랑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군. 로렌조 군, 이제 자네가 맡아서 진행하게.”
“같은 용건으로 오신 분이 계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렌이 얼굴에 불쾌함과 당혹스러움을 역력히 드러내며 따져 물을 때, 오른편에서 고음의 목소리가 몰려왔다. 북풍처럼 서늘한 목소리였다.
“사생아 왕 따위보다 훨씬 위대한 분의 사절이 먼저 와 계시다는 거지. 평민.”
목소리의 주인공은 전사의 차림을 한 장신의 여인이었다. 머리카락은 잿빛이었으며 인상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처럼 차가웠으며, 짙은 흉터가 새겨진 인상은 아주 사나웠다. 내딛는 걸음걸이는 세련된 귀족 영애보다는 전사처럼 거칠다. 갑옷에 새겨진 늑대 문양은 그녀의 가문을 드러냈다.
‘란트레서 가문의 여공작이군! 데네토르 북부의 대영주 가문! 폐하와 악연이 질기다고 들었는데, 그 자를 사절로 보낼 군주는 ……루이스 대왕이 먼저 손을 쓴 거군.’
“랑트리뷔아체 인들이여, 이것만 봐도 누가 그대들을 중히 여기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은가. 대왕께서는 여러분을 포섭하기 위해 위대한 가문의 가주인 이 몸을 보내셨다. 그런데 사생아 왕이 보낸 사절을 보라. 기껏 해봐야 대장장이 일이나 하던 평민일 뿐이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는 명백하지 않은가?”
에렌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뼛속 깊이 왕을 경멸하는 자들 앞에서 가문을 들먹이는 꼴이라니. 이 노회한 의원들은 그녀에게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있었지만, 절대 본심일 리가 없었다.
“요즘에는 결투 재판의 결과도 거부하는 자들을 위대한 가문이라고 부르오? 그렇다면 귀국의 품격은 땅에 떨어진 것이구려.”
여전사는 맹렬한 증오가 담긴 시선을 에렌에게 보냈다.
“천한 놈이 감히 우리 가문을 조롱해? 네가 사절이 아니었다면 혀를 뽑은 뒤에 사지를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럴 날이 곧 오겠지. 사생아 왕이 왕좌에서 끌려 내려오는 날, 그놈 수하들도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대왕께서 우리 가문에 정의를 약속하셨거든. 그게 곧 실현되겠지.”
로렌조가 넉살 좋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자자, 두 분 다 그쯤하시고 자리에 앉아주십시오. 양국 간에 어떤 사정이 있으셨건 그건 저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 볼 문제는 단 하나, 어느 왕께서 저희 도시에 더욱 이익을 제공해주실 수 있는가 뿐입니다. 두 분 모두 저희의 자금과 병력이 필요하시니까요.”
에렌의 눈에는 여공작이 화를 꾹 참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가문의 영지에선 왕 같이 살아왔을 대귀족이 아쉬운 소리를 하려니 피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달랐다. 필요하면 고개를 굽힐 줄도 알았고, 무엇보다 자신은 이들과 같은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저런 건방진 귀족 아가씨 정도는 이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솟구쳤다.
“아르투르 왕께서는 랑트리뷔아체가 이번 전쟁에 협력해야만 자유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힘의 균형을 생각해보십시오. 레무리아 전체가 넘어가는데, 랑트리뷔아체만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아르투르 왕을 도와 얻는 건 무엇입니까?”
“완전한 평화와 자유이지요. 여러분은 레무리아 땅의 사람으로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마땅하나, 만약 군대를 지원하신다면 영구적인 평화와 자유를 약속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상업적인 관계 역시 이어나갈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지금은 저희가 힘을 합쳐야…….”
로렌조가 도중에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랑트리뷔아체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데 누군가의 허락이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보장해주는 것은 문서 쪼가리가 아니라 석궁과 창이지요. 아르투르 폐하께서는 더 매력적인 걸 해주셔야 합니다. 이번엔 여공작님의 말씀을 들어보지요. 루이스 대왕께선 뭘 약속하셨습니까?
여공작은 날카로운 어조로 기세등등하게 답한다.
“그대들이 대왕의 편에 선다면 정복 이후 봉신으로서 우대 받게 될 것이다. 상업 특권도 부여될 것이며 레무리아 사분의 일에 달하는 봉토도 수여되겠지. 이런 좋은 조건을 얻을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라. 이 전쟁은 이미 승패가 결정 나있다. 만약 너희가 사생아 왕의 편에 선다면 대왕의 군대가 너희의 도시를 파괴하러 올 것이다.”
협박에 가까운 발언이었지만 의원들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긍지 높은 랑트리뷔아체 인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두 왕 간의 전력 차이가 너무 뚜렷하게 나는 상황이었다.
“아르투르 왕의 사절께서는 더 제안하실 게 없으십니까?”
에렌은 어깨에서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는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호소가 닿기를 바라며 혼신의 힘을 다한 연설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