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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86화 (18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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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가 한창 군대를 집결시키며 군사적 반격을 계획하는 동안, 그의 참모진도 긴급하게 움직였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적 실력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선 불패의 명성을 자랑했으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 군왕들의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대관식에서 충성을 맹세했던 이들은 결국 폐하를 전력으로 지원할 겁니다. 조금 버팅기기야 하겠지만 자기 몫이나 좀 더 달라며 찡얼대는 정도입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그 동안 폐하가 쌓아 오신 명성 덕분이지요.”

아르투르는 속으로 그녀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었다. 자신의 명성이 도움이 된 측면은 있겠지만, 자신의 왕국은 갓 탄생한 신생 국가에 불과했다. 방금 전에 충성을 맹세했다 한들, 패색이 짙어 보이는 왕과 운명을 같이 할 만 한 유대감은 없는 것이다. 결국은 봉신들을 움직인 건 왕비의 힘과 수완이 결정적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왕국이 위기에 처한 게 명백해지자 왕비는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왕비의 사람들은 곳곳에서 회유와 협박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에는 돈이 들었다. 왕비의 수중에 있던 엄청난 부가 급속도로 소진되고 있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샤를로트가 왕비가 아니었다면 저렇게 날 열심히 도왔을까?’

아마 아닐 테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녀의 동기가 아니라 행동이었다. 아르투르는 사고의 흐름을 당면한 과제, 동맹 확보에 집중시켰다.

“서론은 알겠소. 그런데 영민한 당신이 이 긴급한 와중에 회의씩이나 소집한 건 논의할 게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럼 본론부터 말씀드리지요. 랑트리뷔아체와 산악 부족에게 보낼 사절이 필요합니다. 제가 먼저 동맹을 제안해봤지만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피오렌치아인과 이야기 할 생각이 없고, 델룸 칸은 여자와 이야기 할 생각이 없다는 군요.”

아르투르는 불편한 심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두 세력은 자신이 왕을 칭할 때부터 자신과 꾸준히 마찰이 있던 세력이었다.

‘랑트리뷔아체 인들은 왕 따위는 섬기지 않는다면서 끝까지 충성 맹세를 거부했었고, 산악 부족은 교황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겠다면서, 산악 지대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야만인들이지.’

평소대로였다면 동맹 제안은커녕, 토벌의 대상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의 틈도 보일 수 없었다. 루이스 형님은 군사는 몰라도 정치에는 귀신같은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저들은 자신감을 내보일만한 그만한 군사적 능력이 갖추고 있었다. 동맹으로서 아주 가치가 있다는 뜻. 놓칠 수 없는 상대였다.

“짐의 이름으로 전권 대사를 파견하겠다. 랑트리뷔아체로는 에렌, 자네가 가주게. 도시의 생리에도 밝고 랑트리뷔아체에도 오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아네. 맞지?”

왕국 재상, 에렌은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랑트리뷔아체와의 동맹을 성사시켜서 돌아오겠습니다.”

“문제는 산악 부족인데, 이 자들은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외교적 관습도 지키지 않고 뭘 원하는 지도 알 수가 없으니 누굴 보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케이가 불쑥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다.

“거긴 제가 갈게요. 마스터, 아니, 폐하.”

“통상적인 대사의 일이 아니다. 외교 관습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야.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있고.”

“그러니 더욱 제가 가야죠. 관례를 지키지 않으니 기존의 경력 있는 외교관들도 대응 방법을 모를 것이고, 폐하와 가까운 사람이 가야 그쪽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다른 측근들은 모두 굉장히 바쁜데, 저만 일이 없잖아요.”

결국 아르투르는 긴 한숨을 쉬며 허락해주었다. 아끼는 종자를 야만인들 사이로 보내려니 마음이 편친 않았다. 단지 녀석의 재치를 믿어볼 따름이었다. 카밀이 호위를 자처했지만 그는 정찰대를 이끌어야 했기에 반려되었다.

“케이에게 붙일 믿음직한 호위는 내가 따로 붙이겠네.”

***

그런 연유로, 케이와 북구인 일동은 지금 지금 산악 부족의 대부족장 앞에서 서 있었다. 오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다. 외부인이라면 일단 공격부터 가하고 보는 산민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북구인 전사들은 덤벼오는 모든 자들을 박살내버렸다. 정면에서 덤벼오면 쓸어버렸고, 기습을 가하면 역으로 함정을 쳤으며, 척후전을 걸어오면 모조리 활로 고꾸라뜨렸다.

결국 긴 싸움 끝에, 케이는 산민 부족들의 대표인 대부족장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내가 너희의 용맹을 높이 여겨, 알현을 허락해주긴 있지만 네 요구는 터무니없다. 소년. 우리 산 위의 사람들 보고 왜 산 아래 왕들의 싸움에 끼라고 요구하는 것인가?”

일행은 오는 길에 산악 부족들의 풍습을 볼 일이 있었다. 이들은 옛 신을 섬겼으며, 문명 지대에선 야만적이라 불릴 전통도 유지하고 있었다. 케이는 눈살을 찌푸릴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동행한 북구인들은 그에게 친절히 사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들에겐 익숙한 전통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으면 산민 여러분도 루이스 대왕에게 무릎을 꿇어야 할 테니까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건 저희 산 아래 사람들의 흔한 싸움이 아닙니다. 대륙 전체가 한 명의 지배자를 섬겨야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대부족장은 머리가 벗겨진 노년임에도 아주 정정했다. 그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우리 산민들은 그저 조용히 살기를 원할 뿐이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데 그 자가 왜 우릴 공격한다는 말이냐? 대왕이라는 자가 수하가 아주 많다는 이야긴 들은 적이 있다. 백 명의 전사사로 이뤄진 백 개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지. 그렇더라도 소용없다. 산세는 험하고 우리는 용맹한데, 누가 우리를 치겠느냐?”

“송구스런 말이지만 대왕은 말씀하신 것보다 열 배의 군세를 거느리고 있으며, 제가 데려온 이들만큼, 어쩌면 이들보다 강한 전사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지금 막아내지 못한다면 홀로 맞서셔야 할 겁니다.”

대부족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케이는 그가 자신을 허풍을 떤다고 본다고 생각했다. 부족장의 인식을 바꿔준 것은 의외로, 북구인들의 대장 토르스탄이었다.

“이 꼬맹이 말이 맞소. 루이스 대왕은 아주 강한 자요. 수도 아주 많고, 우리를 능가하는 전사들도 있지.”

“좋다. 루이스 대왕이란 자가 강한 건 알겠다. 그런데 너희 왕을 위해서 싸운다고 우리에게 득이 될 게 무어냐? 그도 결국 우리를 굴복시킬 것이 아니냐?”

“대족장님. 만약 여러분이 이번에 주군을 돕는다면 여러분이 산 위에서 여러분의 종교를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제 주군께선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자신 있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족장을 비롯한 산민들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케이를 본다.

“그런 헛소리를 해온 산 아래 왕들은 언제나 있었지. 우리의 전사들이 네 왕의 깃발 아래 쓰러지면, 그때 산 위를 취할 생각이 아니더냐?”

“저희의 왕께선 다르십니다. 그분은 명예를 가장 높이 여기시는 분이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셨으나 언제나 평화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기가 찬 듯이 웃는 대족장.

“이상한 말이군. 평화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기에 원하는 것이다. 승리를 확신하는 자라면 누구나 전쟁을 원할 테지. 네 말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모든 것을 걸고 약속한다면 외부에 나갔던 자들을 불러 확인해보겠다. 하지만 네가 거짓을 말하는 거라면, 넌 살아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잔인하게 미소를 짓는 대족장을 보며 케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북구인들의 호위를 받고 있지만,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었다. 게다가, 그는 사실 북구인들은 그리 신뢰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저희의 신 앞에 떳떳하게 맹세할 수 있습니다.”

“좋다. 네 말이 거짓이라면 넌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야.”

대족장은 그들만의 거친 산악 언어로 옆 사람에게 지시했다. 얼마 뒤, 일반적인 산민들과 달리 질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청년 몇 명이 들어와 대 족장과 원로들에게 엎드려 절했다. 말의 지역색이 워낙 심해 대략적인 내용만 파악할 수 있었다.

산악 부족 원로들은 청년들에게 아르투르가 어떤 왕인지 물었으며, 청년들은 그가 아주 명예롭고 이름 높은 전사라고 알려주었다. 약자에게도 약속한 바를 지키기로 유명한 자라고 말이다.

“흠. 이야길 듣자하니 이번에 너희 왕은 다른 것 같긴 하군.”

대족장은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좋다. 만약 네 주군, 기사왕이 우리가 대대로 살아온 땅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준다면 이번 일에 한해 지원군을 보내주겠다. 단, 우리는 종이에 써진 약속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런 건 우리에게 아무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피는 무엇보다 진하다!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면 혈연을 맺어야겠지. 동맹은 네 왕이 내 딸을 통혼을 맺어야만 가능하다. 우리도 그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할 것 아닌가?”

케이는 차마 생각을 못했는지,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족장님, 송구하지만 그분은 이미 결혼을 하셨습니다. 저희 관습 상 아내는 한명 뿐이어서요. 부디 다른 요구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대부족장은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양 길길이 날뛰었다.

“뭐라고?! 그렇게 강하고 권세 있는 자가 자손을 낳아줄 여자를 한 명만 둔다는 말이냐?!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 어떤 권력자도 그런 금욕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이미 부족 청년들에게 다 들었다. 너희 왕들도 여자를 여럿 거느린다고 말이다! 그런데 내게 거짓말을 하다니! 우리 산민들의 피는 더러워서 못 받아주겠다는 것이냐?!”

케이는 엉뚱한 부분에서 터져나온 대족장의 분노에 허둥지둥 손을 내저어 부인한다.

“대족장님!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닙니다! 저희 문화에선 단 한 명의 아내만 둘 수 있습니다. 교회법과 관습이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우리 부족 청년들이 거짓말이라도 했단 말이냐!”

“진정하고 제 말씀을 들어보시…”

“둘 중 하나는 거짓말쟁이일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면 혀만 잘라서 돌려보내주겠다!”

결국 케이는 오랫동안 진땀을 빼며 산 아래 사람들의 풍습과 종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다행히도 대부족장은 그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론 현명했다.

“그러니까 아내는 여럿일 수 있지만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는 건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나온 자식뿐이라는 건가?”

의문에 가득 찬 대족장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부인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첫 번째 부인뿐인 거지요. 나머지는 엄밀히 말해선 부인이 아니라 정부일뿐이고요. 그들 사이에서 나온 자식은 사생아일 뿐이죠.”

대족장의 눈에선 어떤 멸시가 얽힌 감정이 읽혔다. 특히 옆 자리에서 대화를 듣는 대족장의 부인들은 혐오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그럼 사생아와 딸 가운데선 누가 계승권이 높은가?”

“당연히 공주가 사생아보다 훨씬 고귀한 신분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로 계승권이 돌아가죠.”

“그럼 아예 자식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 경우엔 형제가 상속받게 됩니다. 형제도 없다면 가까운 친척에게로, 가까운 친척도 없다면 그때는 제후들과 교황 성하의 협의에 따르게 됩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대부족장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른 산민들도 뭐 저런 곳이 다 있나하면서 혀를 차는 표정을 지었다. 이 광경을 본 북구인들은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미개하군. 똑같은 아버지의 자식인데, 혼례 순서 때문에 누구는 모든 걸 물려받지만, 누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고작 제사장이 정한 교회법 때문에 혈연을 부정한다니, 그런 미개한 곳엔 도저히 내 딸을 시집을 보낼 수 없겠어. 내 손주 손녀들이 박해받는 꼴을 볼 수는 없다!”

케이는 드디어 한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그가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가 동맹을 맺어줄까?

“아하하. 역시 그렇지요? 대신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를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땅을 조금 드릴수도 있고요.”

“둘 다 필요 없네. 하지만 동맹이 필요하단 건 납득을 했네. 루이스란 놈이 대륙을 석권하면 저 못된 풍습을 우리에게 강요하겠지. 그러니 혼례는 맺어질걸세.”

“예? 하지만…”

“왕이 결혼할 수 없다면, 왕의 형제와 결혼을 하면 되지.”

“폐하께는… 형제가 없으십니다. 아니, 있기는 한데 형을 형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처지라…”

“없기는, 자네가 왕의 형제 아닌가?”

케이는 다시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 아버진 동네 양치기신데요? 전 그분의 가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자네는 하루 종일 왕을 곁에서 모시며 삶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면서? 게다가 하는 일마다 자네가 앞장선다면서? 그게 형제가 아니면 무언가?”

“어…… 시종이요?”

“우린 그런 사람을 의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른다네. 그러니 자네와 혈연을 맺어야겠어. 어린 나이에도 배짱도 두둑하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니 크면 쓸 만 한 놈이 될 테니 내 사위가 될 자격도 충분해.”

케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고, 고귀한 태생의,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자기 영지를 지닌 미녀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꿈만 같은 일이었지만 아르투르와 함께 하다보면 언젠가 기회를 얻으리라 생각했다. 케이는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켜가겠다고 아르투르 앞에서 비장하게 다짐했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결국 소년의 꿈은,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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