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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대리석으로 만든 고급 책상 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부 대륙의 전도를 그려둔 가죽 지도가 널찍하게 펼쳐져있었다. 이 비공개 회의에는 왕의 측근들만 참석했다. 왕비와 왕의 종자, 이제는 첩보대장이 된 카밀과 재상으로 임명된 두라노의 에렌, 그리고 아델라이데 백작과 그녀의 무관인 알튼 남작이었다.
한편, 왕의 건너편에서 대항군 역할을 맡는 자는 변경백 만프레드였다.
“이런 방법은 어떤가?”
아르투르는 자신의 진영에 있던 장기 말을 보내 도하 지점을 봉쇄한다. 진격해오던 적의 선봉대는 강가에 가로 막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만프레드의 손길은 바로 상대편 말을 집어 다른 방향에 내려둔다.
“아무르 강가를 봉쇄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하셨군요. 그러면 두라노 방향의 진출로가 비지요.”
만프레드가 눈짓을 하자 케이가 흑과 백의 장기말을 서둘러 옮겼다. 보병과 기병, 궁병 등이 그려진 장기말은 각각의 기물이 여단을 상징했다. 책상 위를 기물이 가득 메운다. 배치가 끝나자, 아군의 상징하는 백의 말이 흑의 말에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아르투르는 쓴 웃음을 지었다.
‘낙관적인 전제 하에서 짜인 병력도 이 정도란 말인가.’
전 대륙의 제후들이 소집에 응했다면 큰형님의 군대는 적게 잡아도 십만, 자신의 군대는 모든 봉신들이 약속된 병력을 준다는 전제 하에서 오만에도 미달할 터였다. 거기에 질적인 차이를 고려하면 가히 절망적이었다.
‘큰형님은 모두 정규군에, 기사 숫자만 수천이야. 이쪽은 절반 이상을 민병대로 채워야 할 판이고. 영광에 눈이 먼 기사들이 마상창을 쥐고 돌격을 시작하면 피오렌치아 보병대가 얼마나 버틸까?’
레무리아 인들은 몇몇 세력을 제외하면 전면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건 자신이 직접 두라노 전쟁을 지휘하며 익힌 바였다. 반면, 저쪽은 선대부터 내려온 강력한 정예군이 있다. 이쪽이 적의 두 배라고 해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부 결속을 다지고 새롭게 군대를 길러낼 시간이 필요했어. 이건 정말 위험하군.’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큰형님은 내전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있어야했다. 모든 대응이 너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오자, 아르투르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짓눌렀다. 그 때,
만프레드가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제 식견으론 이번 전쟁의 희망은 폐하의 숙부, 페르디난트 대공께 있습니다. 대공의 군단은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군이지 않습니까? 대공께서 제때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해주신다면 그나마 좀 해볼 만…… 할 지는 장담할 수 없겠군요.”
“숙부님이 움직이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왕대비와 막내 형님의 군세가 그쪽을 견제하러 갔어. 적어도 당장의 지원은 기대하지 마라.”
왕국의 내전이 이토록 빨리 끝난 건 페르넬의 세 아들 중, 막내가 전황이 불리해지자 큰형에게 무릎을 꿇었던 덕이었다. 둘째는 끝까지 저항하다 포로로 잡혔고 그 부하들은 재빨리 주군을 갈아탔다. 아르투르는 왕대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덕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과 숙부를 경계하는 입장에 있었다.
“폐하, 외람되지만 제 모자란 식견으론 승산이 보이질 않는군요. 일단 고개를 숙이는 것도 고려하십시오.”
만프레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곱지 않은 눈초리였지만 만프레드는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건 형식적인 재판과 충성 맹세, 그리고 교황의 신변 정도 아닙니까? 정세를 고려하면 아주 좋은 항복 조건입니다. 한발 물러나셔서 향후에 기회를 노리시지요.”
아르투르는 그의 판단이 정말 실리적이라고 여겨 피식-하고 웃었다. 교황을 넘긴다니, 그럼 더 이상 큰형님께 대항할 수 있는 어떤 지배자도 대륙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니, 자넨 정말 생존에는 노련하군. 덕분에 험난한 시대를 거치면서도 잘 살아남아왔겠지. 하지만 짐은 시대에 적응하는데 만족하지 않네. 짐은 시대를 만들어 나갈 거야.”
만프레드는 유들유들하지만, 분명한 답을 요구하는 태도로 물어왔다.
“폐하께서 큰 포부를 품으신다고 군대의 열세가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방안을 말씀해주십시오.”
“너는 지금 폐하에게 여쭙고 있다. 용병대장. 다그치듯 묻는 건 불충한 일이다.”
끼어든 것은 아델라이데 백작이었다. 그녀는 아주 못마땅한 눈빛으로 만프레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싸움의 유리함과 불리함부터 따지는 게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신중한 태도로 지켜보던 왕비는 뭐가 우스운 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띄운다.
“불충이고 나발이고, 나는 부하들한테 싸우라고 등 떠밀어야하는 사람이오. 승산이 있는 싸움이어야 그럴 거 아니오? 루이스 대왕이랑 싸우다가 지면, 폐하는 더 이상 왕이 아니오. 게다가, 나도 이젠 그대와 같은 변경백이지. 예우를 좀 더 갖추어 주셔야지.”
“마치 승산이 없다면 이탈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군. 그런 하찮은 태도니까 내가 그댈 존중할 수가 없는 거다.”
“당연한 거 아니오? 세상에 누가 질 게 뻔한 진영에 충성을 한 단 말이오? 그나마 내가 의리가 있으니까 폐하께 말씀이나 드리지, 나머지 놈들은 지금 말도 없이 내통할 준비나 하고 있을 걸?”
아르투르는 두 사람 간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끼어들 필요를 느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백성들에게 죽으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지. 그런 일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마라. 만프레드 백작.”
만프레드는 계속해서 능글맞은, 그러나 뚜렷한 태도로 계속 물어왔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폐하의 군재는 저따위 것보다 훨씬 뛰어나시니 길이 보이실 텐데, 부디 제게 혜안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아르투르는 먼저 묘한 눈빛으로 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자네와 자네 부하들이 날 위해 치열하게 싸워줘야 할 이유부터 알려주겠네. 자넨 내가 폐위당하면 모든 걸 잃어. 자네가 어딜 가서 변경백의 대우를 받겠나? 형님은 정말로 고고하신 분이야. 사생아에 용병 출신? 있던 작위나 안 뺏기면 다행이지. 잘 알잖나?”
“….”
“그러니 남의 일처럼 방관하지 말고 머리를 좀 쥐어짜내서 승리할 방도를 찾아보게. 그러면 우리에게 승산이 없지 않단 것 정도는 금방 파악할 테지. 형님은 유래가 없는 대군을 모으셨어. 그 말은 즉, 유래가 없는 보급 문제를 겪게 될 거란 거야.”
제 아무리 각지의 영주들이 전쟁 물자를 보낸다 한들, 대군에게 지상 보급로는 효율이 지독히 나빴다. 결국은 해상 보급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고, 형님도 그런 전제 하에서 침공 계획을 짰을 게 분명했다.
“큰형님이 나보다 위협적인 입지를 가진 숙부님 대신 내 쪽으로 먼저 온 까닭은, 그나마 해안을 끼고 있는 이쪽이 대군을 보급하기 편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해안 지방의 교두보 확보가 늦어지면? 결국 보급 문제 때문에 병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어. 그 때, 본대를 쳐서 형님을 포로로 잡고 전쟁을 끝낸다. 이 정도면 납득할 수 있나?”
만프레드가 보기엔 여전히 거의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본대만 따로 분리해낸다고 해도, 평화와 번영에 찌들어 있던 놈들로 대륙 최강의 군대를 상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사자 앞에 덤비는 동네 똥개 수준이었다. 평소라면 엿이나 먹으라면서 이탈해 마땅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불가능한 싸움을 몇 번이고 이겨왔지.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무엇보다 그의 지적은 타당했다. 사생아 출신의 용병대장, 이런 믿을 수 없는 출신 성분의 사람에게 변경백 같은 강력한 제후의 자리에 봉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불리하다고 이탈한다? 평생 용병이나 하다가 죽어야 할 것이다.
‘우리 금괴 기사단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다가 침대에서 죽을 거라고. 젠장, 싸우기 싫은데, 별 수 없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폐하의 승리를 확고해 보입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아르투르는 그의 속내가 모두 읽혔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어찌됐든 그는 지금으로선 자신이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봉신이었다.
“이 병력만 가지고 싸울 생각도 없다. 당연히 병력을 더 긁어내야지. 동맹도 새로 맺을 거고. 샤를로트, 봉신들 동향은 어떻지?”
“아직까진 잠잠해. 그렇지만 루이스가 거느린 군세의 규모가 알려지면 다들 얼마나 충성을 고수할지는 확신할 수 없어. 그들의 충성심을 붙잡아둘 방법이 필요해. 유화책이 조금 더 필요할 지도 모르지.”
아르투르는 고개를 강하게 젓는다.
“아니! 샤를로트, 그들에게 똑똑히 전해라. 내가 쫓겨나면, 루이스 대왕의 통치는 나보다 훨씬 엄격할거다. 자치권을 약속받은 이들은 모두 박탈당할 것이고, 현지 관습도 존중하지 않을 거란 점을 잘 알려. 내가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그들도 내게 보답할 때다. 병력과 전쟁 자금을 더 요구해. 그들에게 지금 어떤 위협이 닥쳐오고 있는 지 똑똑히 봐야할 거다.”
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왕은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신중하게 결정했지만, 한번 결정을 내리자 실행은 신속했다. 왕의 파발마들이 왕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은 각자 현재 상황을 고스란히 설명한 후, 봉신들에게 추가적인 협조를 구했다.
“…… 따라서, 국왕 폐하께서는 타에라트 백작께 큰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알겠네. 돌아가 보게.”
사자가 떠나고 난 후, 타에라트 백작은 지역 귀족들의 회의장으로 돌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대책 회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예상대로 국왕 폐하께서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우리들에게 더욱 많은 병력을 일으킬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의향은 어떠십니까?”
지역 귀족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내서 주목 받는 이가 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결국 의장인 타에라트 백작에게 시선을 보낸다.
“제 의견이라면 명확합니다. 이미 저희는 교황 성하 앞에서 국왕 폐하께 충성 맹세를 했습니다. 충성 맹세가 한 달 전에 이루어졌건, 이십 년 전에 이루어졌건 맹세는 맹세입니다. 마땅히 지켜야겠지요. 더군다나, 성하께서도 이번 안건에 대해선 전적으로 국왕 폐하께 협력할 것을 요청하신 상황입니다.”
한 살찐 귀족이 목소리를 떨면서 답했다. 갑옷조차 제대로 맞질 않는 그는 게을러보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 하지만 루이스 대왕이 훨씬 강한 것으로 압니다. 차라리 조용히 있다가 이기는 편에나 붙는 것이…….”
타에라트 백작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이 회의의 참석자 중 절반은 왕비의 사람들인데 저런 소리나 하다니. 정세에는 관심이 없고 사치나 즐기던 자이니 세상 물정을 잊은 것이다. 어쨌든 시범타가 필요하던 와중에, 원하던 놈이 잘 걸린 셈이었다.
“감히 그런 불충한 소리를 입에 담는가! 공에게는 한 점의 명예도 없는 거요? 폐하께서 우리에게 예우를 약속하셨건만, 그대는 어찌하여 처음부터 반역을 일삼자고 말하는가?! 더군다나 교황 성하의 당부는 어찌 하고?!”
상대는 억울한 듯이 외쳤다.
“아, 아니, 그, 그렇지만 신중히 상황을 살펴야한다고 한 건 타에라트 공이 아니십니까! 대관식이 끝나고 오는 길에 말씀하셨잖습니까!”
타에라트 백작은 책상을 쾅 - 치면서 들고 일어났다.
“이제는 내가 반역 모의에 가담했다는 유언비어까지 퍼뜨리는구나! 경비병, 저 자를 끌어내서 지하 감옥에 처박아라! 귀족 회의의 의장인 본인의 재량으로 영지를 일시 압류하고 폐하를 위한 전쟁에 동원하겠다!”
살찐 귀족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머지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루이스 대왕과 싸우고 싶지 않다는 건 대부분의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걸 감히 입 밖으로 낼 자는 없었다.
‘흥. 너희 같은 하급 귀족들이야 누가 왕이 되건 상관없겠지만, 나 같은 유력 가문은 입장이 다르단 말이다. 건방진 오’데르만 놈들이 교황청까지 손에 넣고 세상 모든 일을 지들 멋대로 하게 내버려둘까 보냐.‘
지금 권력욕이 넘치는 루이스의 폭주를 막지 못하면, 결국 모두가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게 될 터였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자신을 잘 대해주는 신생 왕조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게 합당했다. 그런 판단을 내린 건 타에라트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아르투르가 중심을 지키자, 오‘데르만 왕조에 위협을 느끼는 모든 세력이 결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