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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84화 (18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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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저희 왕조와 혈연으로 이어져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뒷받침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만약 폐하께서 제 숙부가 맞다면 부왕께 복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공자는 똑 부러지는 태도로 왕을 바라보았다. 양 왕가 간의 서열을 정리하고, 고개를 굽히라는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르투르는 조카가 귀여워서 씩 웃었다. 당당하되, 무례하지 않은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대화를 이어 가보기로 했다.

“짐은 교황 성하께 레무리아의 왕으로서 대관을 받았다. 네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할 어떤 이유도 보이지 않는다만.”

“부왕께서는 서부 대륙 전역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건 저희 왕가에 내려오는 신성한 사명이지요.”

이제 아르투르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년을 몰아붙였다. 녀석도 현실 외교 무대에 접하는 건 처음이겠지.

“동의를 얻을 수 없는 명분은, 명분이 아니라 구실 조작일 뿐이지. 누구도 오‘데르만 왕가에게 대륙을 굳이 통일해야 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겠지. 우리는 모두 신앙과 혈연으로 묶인 한 집안이 아니더냐.”

그러나 어린 왕세자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돌히 답했다.

“폐하께서는 일전에 하이에버에서 귀족들을 학살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상호 합의 하에,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결투를 치렀을 뿐이다. 그런 판결에 불복하고 비열한 습격을 해온 자들이 있던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에 폐하께서 변호해주신 귀족을 해한 농노는 재판을 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해당 사항은 이미 왕국 법에 규정되어 있던 문제입니다. 하이에버는 부왕의 영토이시고, 폐하께서 살해한 귀족들은 부왕의 봉신들입니다. 그러니 그분은 폐하를 재판에 소환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놈 보게? 난 저 나이에 칼만 잡고 살았는데, 벌써 법전까지 들여다봤어?’

아르투르는 아직도 제도니, 행정이니 하는 건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그건 끝없는 서류와의 싸움이었다. 똑똑한 여자를 왕비로 들인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를 지킬 정도의 논리는 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으며,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면 결투를 신청할 권리가 있다. 짐은 그런 절차에 따라 재판을 치렀을 뿐이다. 아무 것도 문제가 될 건 없어.”

“그건 자유민에게만 해당됩니다. 결투 재판을 받을 권리는 고귀한 신분을 죽인 농노에겐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재판은 처음부터 왕국의 법도에 의해 무효였던 겁니다.”

수사학자들에게 수업을 열심히 들은 티가 난단 말이지. 나랑은 다르게.

“벌써 법학도 배웠나 보구나. 그렇다면 너도 잘 알겠지. 법률 간에 충돌할 경우엔 무엇을 우선시 한다고 되어 있느냐.”

발루아누스는 자신이 배운 것을 뽐내듯 말했다.

“모든 법률은 상위의 법률 체계에 종속되며, 상반되는 부분이 있다면 상위의 법률을 우선해서 적용합니다.”

“바로 그 점이다. 만약 왕국법의 조항에 자연법에 어긋나는 조항이 있다면, 그 법률은 무효다. 농노와 자유민의 구분이 들어간 왕국 법은 인간이 만든 법이지만, 모든 사람의 변론 권리를 보호하는 건 신께서 정한 자연법의 일부다.”

“무엇이 자연법인지는 왕의 관할 하에 있습니다. 다른 누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아르투르는 조근, 조근 타이르듯이 말했다.

“형님은 그렇게 가르치셨겠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발루아누스. 그건 고대에 있던 전제 군주들의 통치방식이다. 우리 기사들의 법도는 달라야한다. 우리는 왕권보다 오래된 덕목들을 수호하는 자들이지, 세상을 마음대로 휘젓는 폭군이 아니다.”

막힘없이 술술 답하던 발루아누스는 당장은 반론이 떠오르지 않는 지 머뭇거렸다.

“…….”

“어떤 법도로 보아도 형님께서 내게 복종을 요구하는 건 아무런 근거가 없는 무도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싸움을 멈추자고 잘 전해다오. 짐은 언제든지 양국 간의 평화 협상에 나설 생각이 있다.”

두 사람은 계속 대륙의 정세를 두고 여러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를 호위하는 왕실 기사들은 계속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마스터 나이트가 끼어들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판에 그를 어길 수도 없었다.

아르투르는 기사의 길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발루아누스 역시 관심을 가지고 점차 귀를 기울였다. 눈앞의 사내는 분명히 부왕의 정적이었지만, 자신의 대선배이자 이 시대에 둘도 없을 숭고한 기사였다.

“폐하께서는 훨씬 쉬운 길을 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어려운 길을 택하셨고, 덕분에 오늘날에 이르셨지요. 그때부터 이런 미래를 예상하셨던 겁니까?”

고개를 젓는 아르투르.

“꿈꾸기는 했지만 예상하진 못했다. 내가 걸어온 삶을 반드시 따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굉장히 운이 잘 따라준 경우다. 하지만 너 역시, 나 못지않게 많은 기회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인 걸 잊지 말거라. 평범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옳음을 저버려도 이해받을 수 있지만, 우리 같이 많은 걸 가지고 태어난 이들은 달라야한다.”

발루아누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왕의 사생아란 궁정 밖에서 볼 때는 축복받은 출생일지언정, 지배 계급치고 절대 좋은 시작 지점이라곤 볼 순 없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기사는 자신이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경우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식이나 허례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어린 왕세자의 마음에도 그의 진정성이 닿았다. 발루아누스는 경계심 어린 표정을 풀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숙부께서 말씀하신 뜻은 부왕께 잘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선 확답해드릴 수 없음을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르투르는 별 걸 걱정한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네가 몇 살이나 되었다고 성과를 기대하고 이야기했겠느냐. 형님은 권력을 독점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다가오는 전쟁은 불가피하겠지. 이것만 명심해라. 이번 전쟁은 불의한 것이니, 네가 왕이 된 뒤에는 그런 일을 벌이지 말거라.”

두 사람은 이전보다 한층 누그러진 분위기로 가족의 안부, 덕담을 주고받았다.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아르투르가 직접 성문까지 나서서 배웅해준다.

“잘 지내거라. 조카야.”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발루아누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숙부님.”

아르투르는 조카가 말의 안장에 능숙하게 타오르는 모습을 본 뒤, 자신의 스승에게 시선을 보냈다.

“전장에서 뵙지요.”

“전장에서 널 마주친다면 조금도 봐주지 않겠다. 마지막 교습을 잊지 말거라. 정확한 검로를 그리는 게 우선인 걸 반드시 기억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넌 지고 말게다.”

“스승님의 명성에 먹칠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옛 스승과 제자는 담백한 눈길과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기사였다. 스스로의 뜻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증명해야하는 법.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떠나가는 데네토르의 사절단을 보며 샤를로트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만프레드가 그러는데, 적군의 최고의 기사와 왕세자를 그냥 보내주는 건 너무 아쉬운 일이 아니냐고 묻더라고.”

아르투르는 떠나가는 스승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낮은 목소리로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냈다.

“날 대륙 전역의 조롱거리로 만들 셈이냐? 그게 네가 원하는 거야?”

그러나 왕비는 잘 모르겠다는 양, 어깨만 으쓱였다.

“내가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는 건 아니야. 만프레드는 네가 임명한 사령관이잖아? 전문가의 의견을 전달했을 뿐이야.”

비수처럼 날카로워진 왕의 목소리가 답한다.

“샤를로트. 경고하건데 다시는 남의 이름을 빌려서 날 떠보지 마. 그 때는 화낼 수밖에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부디 심기에 거슬렸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소서. 아내 된 자가 어찌 남편의 결정에 반대하겠습니까.”

아르투르는 그녀가 묘하게 비아냥거린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못 본척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제안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랬을 테니까. 남의 의견 뒤에 숨는 행태가 마음에 거슬렸을 뿐이었다.

***

루이스 대왕의 사절단이 떠나간 지 얼마 후, 아르투르는 별관에서 한 귀족 여인과 마주 보고 있었다. 아델라이데 백작이었다. 그녀의 사전 요청에 따라 주변은 이미 모두 물러둔 상황이었다.

“진심으로 말씀하신 거요?”

아르투르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네. 제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어요. 제가 진정으로 섬기는 분은 단 한분, 폐하뿐이랍니다.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아르투르는 재차 백작이 가져온 두루마리들을 꼼꼼히 살폈다. 모두 오‘데르만 왕가의 상징인 강철 건틀렛 인장이 찍힌 대왕의 명령이 적혀있었다.

루이스 대왕의 칙령은 왕국 전역의 봉신을 소집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진격로에 위치한 영주들에게 대군을 보급하기 위한 필요한 물자를 모아둘 것 역시 요구했다. 이 몇 건의 칙령만으로도 군대가 집결하는 시간, 규모, 목적지를 모두 가늠해볼 수 있었다. 수많은 정찰대와 첩자들을 운용해서야 알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 그냥 굴러들어온 것이다.

‘이걸 나한테 가져온 까닭이라면 -’

바이스부르크의 변경백인 그녀 역시 대왕의 부름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는 봉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밀 정보를 적인 자신에게 가져왔다.

“제 입장을 확고히 보여드리려고 왔어요. 제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제 영지가 위험에 빠졌을 때, 대왕의 군대는 어디 있었죠? 오직 폐하만이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니 제 충성이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명백한 일이랍니다.”

아델라이데는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녀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주종 관계는 한 측의 일방적인 헌신이 아닌, 양자 간의 계약이었다. 약간 꺼림칙한 기분은 들었지만 그녀의 전향 의사는 아주 타당했다. 무엇보다, 어떤 종류의 도움이건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전을 평정한 루이스 대왕이 불러들인 군대의 규모는 지난 수백 년 간 모여든 어느 군세보다 컸다. 왕실에 직접 충성하는 기사들만 수천이 넘었으며, 추가로 마흔 다섯 개의 귀족 가문이 부름에 응했다. 대륙 전역의 모든 명문가들이 루이스의 깃발 아래 군대를 일으키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공할만한 군대의 칼끝은 먼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큰형님. 숙부님은 상대하기 까다로우니, 이 만만한 아우부터 치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얕보인 모양이군요.’

수십 개의 점에서 보내온 병력들이 한 곳으로 모여 루이스 왕의 명령을 받들 것이다. 그들은 모두 창을 쥔 농부가 아닌, 훈련 받은 병사들일 것이다. 영광과 출세를 얻기 위한 기사들의 행렬도 끊이지 않으리라.

십만의 군세가 자신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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