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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83화 (18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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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이후, 큰 규모의 피로연이 열렸다. 본래 왕비가 기획한 것은 이보다 더욱 크고, 오랫동안 이어질 사흘 동안의 축제였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돈은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출정이 바로 내일이었다.

대관식에 이어서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혼인 성사가 있었으므로, 오늘의 행사는 왕의 결혼식 역시 겸했다. 두 사람은 정해진 의례에 따라 선서하고, 입맞춤을 나누었다. 다시 한 번 여러 현지 세력들의 환호가 있었다.

참석자들은 성호를 그으며 국왕 부부의 순탄한 앞날과 후계자의 빠른 탄생을 기도했다. 대부분은 진심이기도 했다. 왕에겐 왕비가 필요하고, 왕세자가 필요한 법이다. 후계자가 없는 왕좌만큼, 왕국만큼 불안한 자리도 없다. 기왕에 성립된 왕국이라면 오래도록 평안하기를 바라는 게 모두의 마음이었다.

아르투르를 따라온 북구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축가를 부르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축냈다. 왕의 결혼식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태였지만 다들 그들을 보고 슬그머니 옆으로 피할 뿐, 감히 지적할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 북구인 전사들은 그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악명이 높았다.

“와, 왕비 봐라. 죽인다. 원래도 이쁜 여자긴 했는데, 언제 저렇게 이뻐진 거야? 옷빨을 진짜 잘 받네. 호오. 화장을 하면 달라 보일 수가 있구나?”

힐데군드는 순수한 감탄을 담아 말했다.

“그것뿐이야? 들어갈 데 들어가고, 빠질 데 빠진 저 완벽한 몸매를 보라고. 우리 북구 여자들은 흉내도 못 낼 몸인걸. 친구의 여자만 아니었다면 잡아갔을 텐데.”

그 때, 그들의 테이블에 케이가 나타나 의자를 빼면서 앉았다.

“토르스탄 아저씨. 말조심해요. 이제부턴 높으신 분이라 말 잘못하면 혀 잘린다고요. 목이 잘릴 수도 있고.”

케이는 빙긋 웃으며 경고하는 눈빛을 담아 토르스탄을 바라봤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끙 - 하더니 유리잔에 맥주를 따라 건넸다.

“결혼식에서 그런 신부 좀 칭찬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네 주군이랑 나는 친구라고.”

“북구에선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여기선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장담컨대 마스터가 들으셨으면 결투 신청부터 하셨을 겁니다.”

케이가 자신을 노려보자 토르스탄은 픽 웃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그냥 웃어넘기려는 자신의 의도와 달리 케이는 전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사과를 하라는 이야기였다. 토르스탄은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어린놈이 까부는 것을 보며 순간 기분이 끓어올랐지만, 우발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엔 그는 아주 노련한 사내였다.

“……그래. 내가 실언을 했군. 정정하도록 하지. 다신 그런 농담은 하지 않겠다. 이곳은 문명인들의 땅이니 그들의 법도에 따라줘야지.”

적어도 아직은 말이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번엔 일단 마스터께 따로 보고는 올리진 않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해주십시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아저씨는 가죽을 팔러 왔죠? 벌이는 충분하셨나요?”

턱을 긁적이는 토르스탄.

“그저 그랬어. 고향의 가난뱅이들이면 몰라도 이 먼 곳까지 내려온 것치곤 별로 못 벌었지.”

“왕실의 이름으로 제안할 게 있습니다. 동족들을 이끌고 다가올 전쟁에서 폐하를 위해 싸워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용병료는 물론, 북구에서 들여오시는 물건들을 왕실에서 시세가 더 쳐서 구입해드리겠습니다. 이번 조약은 당사자인 두 분과 폐하께서 살아계신 한 계속 될 겁니다.”

토르스탄은 큰 소리로 껄껄 웃어댔다. 일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우리야 좋지. 큰돈을 벌 기회도 주고, 최고의 기사들과 싸울 기회도 준다니 우린 좋지. 그런데 너희 문명인들 간의 싸움에 우리를 끼워도 괜찮은 거냐? 우리에 대한 반감이 심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건 저희 쪽에서 걱정할 문제입니다. 아무튼 승낙하시는 겁니까?”

토르스탄이 동료들을 쓱 살펴보았다. 그들은 모두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장일치다. 다가오는 전쟁에서 너희 왕을 위해 싸우마. 국왕 폐하 만세!”

토르스탄의 외침에 따라 북구인들이 모두 잔을 들어올렸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까지 퍼져나갔고, 다른 이들도 덩달아 국왕 폐하 만세를 외쳤다. 그들은 술통을 가져와 통째로 들이키고, 우악스럽게 고기를 뜯었다.

그렇게 다른 동료들이 고주망태에 빠져든 사이, 케이는 조용히 힐데군드를 바라봤다.

“누나 의외로 괜찮아하네요? 두 분, 서로 사랑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태연히 답하는 힐데군드.

“응. 지금도. 한 일주일 전에도 같이 떡 쳤는데//잤는데. 그 뒤론 걔가 스승이랑 수련한다고 바빠서 따로 만날 시간은 없었고?”

케이는 너무 당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북구인들이 정조 관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배운 바였지만, 아직 익숙하진 않았다.

“……아, 그래요? 하지만 이젠 마스터도 결혼을 하셨으니까… 좀… 그렇지 않을까요? 왕비님 체면도 있고요.”

“?”

“?”

둘은 서로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최강의 전사가 여자 여럿 두는 게 뭐가 이상해서? 지금도 저 녀석의 실력과 입지에 비해서는 너무 따르는 여자가 적어. 나 포함해서 둘? 셋? 그 정도 밖에 안 되지 않냐? 한 삼십 명쯤은 되어야 진짜 왕다운 거 아냐?”

케이는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동네 하급 귀족만 되어도 정부를 두는 일은 너무 흔했지만, 그걸 당당하게 하는 게 권장할 바는 못 되었다.

“아니, 그게….”

힐데군드는 생각하다가, 이제 알겠다는 듯 짝하고 박수를 쳤다.

“아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다. 내가 부인이 되지 못했다고 왕비의 목이라도 따 버릴까봐 그러는구나? 짜식. 싸움도 못하는 놈이 줄부터 서려고 하네. 영악한 걸까, 비겁한 걸까? 좋은 자세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니까.”

깔깔 웃는 힐데군드를 보며 케이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할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대로 왕이 정부를 여럿 둔다고 해서 해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정부가 없는 왕은 지나치게 신실하거나,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풍조까지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힐데군드였다. 그녀는 이교도였고, 여자의 몸으로 전사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왕과 너무 가까웠다. 힐데군드가 왕비보다 훨씬 아르투르와 오랫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건 정보에 관심을 지니는 자라면 누구나 공공연히 아는 비밀이었다.

‘모든 것이 모범을 보여야 할 왕의 통치 규범과는 맞지 않아. 두 분은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고, 만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좋아. 그래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 아니면, 그녀가 개종을 하던가.’

생각에 잠긴 케이의 눈빛을 힐데군드는 흥미를 가지고 바라봤다.

“너희 문명인들은 항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혈통이니, 권력 구조니, 도덕이니, 그런 것부터 따진단 말이야. 진정한 삶은 그런 게 아니야.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열정을 따라가는 거지.”

“……그렇지만, 열정만을 따를 수 없는 것이 통치자의 삶인걸요.”

케이의 목소리는 약간은 우울해보였다.

“걱정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교도 마녀가 왕을 유혹해서 그의 귓가에 해로운 정책을 속삭인다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을 거야. 이번 전쟁이 끝나면 떠날 거거든. 이미 아르투르랑 이야기 끝났어.”

“……다행이네요. 저는 마스터가 시작부터 사랑 문제로 발목이 잡히진 않으셨으면 해서요. 쉽지 않은 결정 내려주신 점, 감사 드려요.”

감동이 담긴 표정을 짓는 케이와 달리, 힐데군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뭔 헛소리야? 그놈을 위해 떠나주는 게 아니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생긴 거지.”

“?!”

힐데군드는 케이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난 누군가의 부인으로 눌러앉는 일엔 아무 관심 없어. 그런 지루한 삶이 무슨 재미야? 이번에 잡은 노예한테 들으니 동쪽으로 가면 끝없는 사막이 나오고, 그 너머에는 대초원이 펼쳐지며, 초원을 건너면 또 엄청나게 큰 바다와 정글들, 수많은 제왕들이 산다고 들었어. 산맥과 산맥을 잇는 성벽도 있다고 하더라고. 나는 그런 곳에 가볼 거야. 슬슬 이 대륙은 볼 만큼 봤다고.”

“….”

힐데군드는 손을 들어 아르투르를 가리켰다. 그는 자신의 봉신들과 흥겹게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흥겹고 즐거워보였다.

“봐. 아르투르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보이지? 왕관을 쓰더니 입이 귀에 걸렸어. 항상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고뇌에나 빠져 있던 놈이 말이야. 빛나는 돌덩이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모르겠네. 나랑 모험이나 떠날 것이지. 아무튼, 저놈이 싫다면 나도 됐어. 각자 갈 길 가는 거지. 그동안 잘 즐겼으면 됐지.”

“……음,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누나를 반겨준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풍랑과 전염병 같은 숱한 위험도 있을 거고요. 차라리 개종하신 뒤에 여기 남는 게 어때요? 좋은 대우를 받으실 텐데요.”

“내가 그런 거 신경이나 쓸 것 같아?”

“하긴, 그러면 누나가 아니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올려 부딪쳤다.

“떠나기 전에 생각 바뀌면 말해요.”

“그럴 일 없어. 전쟁 치를 준비나 하자고. 왕국 기사들과 싸워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고.”

***

한편, 새로 즉위한 왕을 축하하는 자들 가운데는 왕의 마스터도 있었다. 마스터 나이트, 테라일 바야르는 데네토르 대왕 루이스의 사신으로서 경고를 전달하러 왔지만, 오히려 피로연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정말 대단해. 사생아는 왕이 될 수 없다고 말했건만, 네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어버렸구나. 아르투르 왕의 장수를 위하여, 건배!”

“건배!”

꿀꺽꿀꺽 맥주잔을 들이켰지만 아르투르의 간에는 기별도 오지 않았다. 그는 새롭게 잔을 따르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당 부분은 스승님 덕분입니다. 배울 때는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하루하루가 힘들었는데, 가르침을 끝마치고 나니 모든 게 쉬워지더군요. 지금도 종자들을 받으십니까?”

노기사 역시 술이 강한 지, 물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래. 한명 남았다. 워낙 주군이 강하게 권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지금 가르치는 녀석을 마지막 종자로 삼을 생각이야. 요즘 것들이 워낙 말을 안 들어서 말이다.”

태연한 바야르와 달리, 다른 왕국 기사들은 별로 탐탁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분명히 위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경고를 전하는 게 우리의 임무였건만, 왜 마스터 나이트는 이런 정다운 대화나 나누고 있어야하는가? 그들 가운데 최고참인 아그라베인이 무언으로 항의를 했지만, 바야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한번 보고 싶군요.”

바야르가 손뼉을 세 번 치자, 다른 종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던 귀공자 소년이 정중한 태도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네 선배가 널 보고 싶다기에 불렀다. 둘이 인사나 나누어라. 이쪽은 레무리아의 왕, 아르투르다. 그리고 이쪽은 소개는 네가 직접 해라.”

아그라베인을 비롯해 다른 왕실 기사들은 매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아예 화가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저 종자의 신분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다. 너무 중요한 인물이기에 마땅히 그래야했고.

귀공자는 기사로서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의무와, 신분을 숨기라는 주변의 조언 속에서 헷갈려했다.

“저, 저는.”

“흠. 너, 루이스 형님의 아들이구나. 그분의 어린 시절 모습을 쏙 빼닮았어.”

“!”

아르투르의 말에 데네토르의 왕실 기사들이 잔뜩 긴장했다. 몇몇은 칼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지만, 아르투르는 개의치 않았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구나. 나는 네 아버지의 이복동생이다. 삼촌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르투르는 얼굴에 미소를 띄며 손을 내밀었다. 귀공자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태도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답한다.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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