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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82화 (18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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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데 백작이 전령을 믿지 못해 스스로 전달하러 올 정도의 소식이면 굉장히 민감한 이야기일 것이 확실했다. 백작은 왜 지금 자신을 찾아왔는가? 백작의 입장에서 지금 자신을 만나는 건 여러모로 미묘한 일이었다.

의문이 들지만 일단은 뒤로 넘긴다. 대관식의 절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와주셔서 고맙소. 백작. 피로연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합시다.”

서운한 표정이 아델라이데의 얼굴을 스쳐지나갔으나, 그녀는 곧 예의어린 가면을 쓰고 정중히 인사해보였다. 못다 한 말이 있어보였지만, 아르투르는 그걸 듣는 건 나중에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도열한 근위병들을 지나쳐 대성당으로 들어가자 폭 넓은 복도가 보였다.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소년들로 이뤄진 성가대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신의 축복을 노래하고 있었다. 천상의 군주께서 새로운 왕을 기름 부으실 거란 뻔한 이야기였지만 오늘만큼은 좋게 들렸다.

복도를 지나쳐 활짝 열린 예배당의 문으로 들어가자 웅장한 홀이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비추어 들어오는 햇빛은 아름다움에 비길 곳이 없었다. 홀에는 고귀한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들 사이를 걸어가던 중, 한 젊은 영주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가죽 코트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 현지 봉건 귀족들의 우두머리 격인 인물이었다. 아르투르가 다가서자 그 훤칠한 젊은 영주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나 그 자의 눈빛에선 강렬한 의지와 야심이 엿보였다. 그는 자신을 면밀히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아르투르 공, 그대를 제 주군으로 모시게 되는 날이로군요. 실로 경사스런 날입니다.”

아르투르 역시 미소의 가면 뒤에 진의를 숨긴 후, 손을 내민다.

“타에라트 백작. 왕비에게 전해 듣기론 대관식 참석이 불투명하다고 들었는데, 와줘서 반갑네. 벌써 영지에 군대를 소집해두었다지? 그대들의 짐을 향한 충정에 감동했네. 꼭 보답하도록 하지.”

타에라트 백작은 고개를 들어올리며 우아한 자세로 아르투르의 손을 맞잡는다.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동료 귀족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저도 그런 것에 따랐을 뿐이지요. 폐하께서 영명하고 어지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레무리아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오실 분이라면 마땅히 섬겨야지요.”

아르투르는 털털하게 웃어보였다.

“자네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겠군. 짐은 외지에서 와서 아직 이곳 물정을 잘 몰라. 그러니 자네의 자문을 자주 구하도록 하겠네. 대관식에 참석해주어서 고맙네. 우리 두 위대한 가문 간의 동맹이 시작으론 아주 좋아.”

“저 역시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각자의 합의를 재확인한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르투르는 천천히 나아가며 여러 세력가들과 계속 의전의 외견을 갖춘 채, 서로 합의한 바를 재확인했다. 덜 받은 자도, 더 받은 자도, 기회라고 여기는 이도 몰락했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한 가지엔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제 눈앞의 젊은 기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고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내 통치를 반기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들에게 내 역할을 증명하는 것 역시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다.’

결연한 표정으로 맨 앞줄로 나아가자, 이번엔 오랫동안 자신과 관계를 맺어온 측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밀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가죽 갑옷과 평범한 모직 옷을 입었다. 아르투르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이런 좋은 날에는 보다 차려입지 그랬나. 돈은 넉넉할텐데.”

난처한 듯 웃어보이는 카밀.

“죄송합니다. 주군. 제게는 이 옷이 가장 편해서 말입니다. 그래도 좋은 날이라고, 제 딴에는 깨끗하게 닦아 입었습니다.”

“왕비에게 자네에게 옷 한 벌 준비해두라고 이르겠네. 이제 귀족이 될 거고, 왕의 측근이 될 텐데 품위는 갖추어야겠지.”

카밀은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재차 사죄를 했다. 귀족 작위는 거절하겠다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아르투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세한 건 나중에 논의해보기로 했다. 그는 계속 고개 숙이고 있는 카밀을 뒤로 한 채, 곁에 서 있던 에렌에게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마스터 대장장이 에렌! 어서 오게! 자네가 만들어준 이 검집이 아주 마음에 들더군.”

아르투르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을 보내자, 에렌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제 보잘 것 없는 선물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폐하.”

“왕 앞에서 겸손한 건 좋지만 자신을 낮추지는 말게. 자네는 내가 아는 최고의 대장장이야. 그대가 만든 갑옷이 짐의 목숨을 몇 번이고 구해주었지. 앞으로는 재상으로서 짐의 왕국을 위해 일해주길 바라네. 이제는 더욱 많은 활약을 기대하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를 이어 충성토록 하겠습니다.”

“짐의 왕조 또한 그대의 가문을 잊지 않을 것이야.”

다음으론 아르투르는 쭈뼛대는 귀족에게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다가오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르투르는 친근한 미소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 친구 만프레드!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엔 오를 수 없었을 거야! 진심으로 고맙네!”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의 손을 꽉 붙잡고 흔들었다. 이제는 변경백이 된 용병대장의 두터운 팔뚝이 흐물거리듯 움직였다.

“아,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모두가 폐하의 영광과 무용 덕분입니다. 충성, 충성, 또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르투르 왕 만세!”

만프레드의 태도를 본 아르투르는 다시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면서 낯짝 한번 변하지 않는 걸 보니 정치도 잘하겠어. 그런 건 뻔뻔하고 낯짝이 두껍기로 자네만한 인물이 없지.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특히 동료 귀족들의 의견을 -잘- 모아서, -잘- 전달해주게. 알겠나?”

아르투르는 -잘-이라는 말에 묘한 강조를 넣었다. 예이, 예이 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만프레드였지만 속내는 마냥 반갑진 않았다.

‘에라이, 씨발. 나보고 고자질쟁이 노릇하라는 거 아냐. 내 세력 만들긴 텄네. 그렇지 않아도 난 사생아에, 용병 출신이라 유서 깊은 귀족들이 고깝게 여길 텐데 말이지.’

그렇지만 비겁하다며 손가락질 당하는 일에도, 욕을 먹는 일에는 익숙했다. 중요한건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가의 여부일 뿐이다. 왕의 측근이란 자리는 오히려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줄 터이다.

아르투르는 마지막으로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생 자기가 보았던 어떤 귀족 여인보다도 화려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자긴 모르지만 굉장한 노력과 돈이 들어갔으리라.

그녀에겐 한번 시선을 보내자 그녀도 목례해보일 뿐, 서로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모든 조율과 합의는 끝났다. 대관식이 끝나면, 두 사람은 무를 수 없는 동맹 관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눈 건 어젯밤이었다. 두 사람은 간만에 상호간의 예의를 내려두었다.

‘샤를로트, 나와 결혼하는 걸 후회하지 않겠어?’

아르투르도 모든 아가씨들이 한번쯤은 꿈꾸어보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그렇게도 말할 수 있구나.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게 현실성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런데, 내가 가장 갈망하는 건 하는 건 내가 사랑 받느냐가 아니야. 부조리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희망을 현실로 옮겨낼 힘뿐이지. 너는 내게 두 가지를 모두 가져다주었어. 그것으로도 난 충분해. 오히려 난 네가 걱정되네. 보통의 왕들이 바라는 순종적인 아내 역할을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그런 꿔다놓은 병풍은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가 바깥으로 도는 동안 너는 왕국의 관리를 전담하게 될 거야. 그러려면 당연히 네 의견이 있어야지. 때로는 싸워야 할 때도 있을 거고. 난 네게 그런 역할을 바래.’

양자가 합의했고, 왕국에 필요하다. 그 점이면 되는 거였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과 마주한 아르투르는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백색 의복을 입은 노인, 교황이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아르투르를 향해 준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아르투르는 노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후 담담히 말했다.

“엘라카르시스 가문의 아르투르입니다.”

“그대는 교회에 무엇을 청하러 왔는가?”

“레무리아의 왕관입니다.”

“그대는 어떤 자격으로 왕위를 주장하는가?”

“저는 레무리아의 일곱 도시 중 두 곳을 구했으며,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수호했습니다. 항상 정의와 명예를 위해 싸워왔으며, 그리하여 신께서 이 땅에 평화를 세우라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 빛나는 검이 그분의 뜻입니다.”

아르투르는 조심스럽게 왼편의 성검을 칼집채로 풀어서 교황에게 바치는 모양새를 취했고, 교황은 그것을 짐직 살펴보는 척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주장을 인정한다! 나, 사도들의 후계자인 우르술라 2세는 천국의 문지기이자 영광스런 분의 대리인으로서 선언한다. 아르투르 폰 엘라카르시스에게는 주께서 내리신 레무리아의 적법한 통치권이 있으며, 그와 그의 후계자 외의 누구도 이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선언이 끝나자 교황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성유를 아르투르의 머리카락에 바른 후, 시종에게서 빛나는 관을 받아들었다. 교황의 노쇠한 눈동자에서 다시 총기가 번득였고, 흐릿하던 목소리는 뚜렷해졌다.

“백인을 벤 기사여! 기사들의 왕이여! 그대에게 내려진 신성한 책무를 받아들이라! 레무리아의 국왕, 아르투르 폰 엘라카르시스 1세여, 성검의 선택을 받은 자여! 일어나서 그대의 신민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라!”

교황이 젊은 기사의 머리에 빛나는 황금관을 씌워주었다. 젊은 왕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섰다. 오른손에는 빛을 내는 성검이, 왼손에는 둥그런 보주가, 이마에선 번쩍이는 왕관이 신으로부터 수여받은 왕권을 증명하고 있었다.

왕의 종자가 대성당의 뒤편에 거대한 깃발을 펼치며 외쳤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붉은 용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Long may He reign!”

가장 먼저 답하는 자들은 왕에게 검을 바치기로 한 자들이다. 영주들은 만프레드를 필두로 장검을 높이 치켜든다. 수십 개의 장검이 번득이며 한 점으로 모여드는 장관이 펼쳐졌다. 검을 거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이며, 부딪친 칼들은 서로가 맹세의 증인이 되었음을 각자의 마음속에 새긴다.

“Long May He reign!!”

제후들의 합창이 대성당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대성당 안의 방문객들이 모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성당 바깥에서 기다리던 수만의 인파들도 똑같이 무릎을 꿇는다.

“Long - !”

하늘을 가득 채우는 함성.

“ - may He 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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