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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노기사의 미소가 내포한 많은 의미를 느꼈다. 좀처럼 좋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스승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을 무척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이렇게 성공할 줄은 몰랐다. 사생아가 왕이 되고 싶다고 할 때 항상 허황된 꿈을 꾼다고 혹독하게 꾸짖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 성취를 눈앞에 두고 있구나.”
아르투르는 차분하게 답할 뿐이었다.
“아직 왕이 아닙니다. 큰형님을 한번 꺾고 그분의 인정도 받아내야만 진짜 왕이 되는 거지요.”
“네 결정을 칭찬하긴 했다만, 상황은 네게 아주 불리하다. 차라리 지금 무릎을 꿇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내전이 종식된 이상, 루이스는 데네토르 전체의 군세를 동원할 수 있다. 너는 서부 대륙의 한 귀퉁이를 장악하고 있을 뿐이지만 말이야.”
아르투르는 속으로 웃었다. 그의 마스터는 항상 이렇게 진의를 숨기고 제자들을 시험하곤 했다. 옛 영웅들을 동경하다 스스로 전설이 되어버린 이 사내는 절대 옳다고 믿는 일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남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빈 말이신 거 압니다. 정작 그렇게 하시면 실망하실 것도 압니다. 스승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할 순 없지요.”
“그건 그렇다. 하지만 네겐 간신히 잡은 왕좌도 소중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굽히라고 권하고 싶다. 승산이 아주 낮거든. 오면서 보니 네 군대는 상인과 용병들을 긁어모았을 뿐인 오합지졸이더구나. 루이스에겐 네 아버지가 길러둔 최강의 군대와 기사단이 손에 있고 말이다.”
아르투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다른 조건은 논의할 수 있어도, 하이에버에서의 일을 문제시 삼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건 정당한 결투 재판이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절 습격한 이들이 비열했을 뿐입니다. 그런 일에 대해서 사죄는 있을 수 없지요.”
“흥. 너도 왕보다는 기사로서 기억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나야 좋다. 네가 좀 고달플 게 걱정될 뿐이지.”
“저는 기사들의 왕으로 남을 겁니다. 명예롭게 통치 할 겁니다.”
“아주 맘에 드는구나. 하지만 절대 쉽진 않을 거다. 어려운 일이야.”
“어려운 일이라고 멀리 하고 쉬운 일이라고 가까이 할 순 없는 법이죠.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두 사람은 생각이 일치하는 것을 느끼며 크게 웃었다. 뜻을 함께 하는 이와 어울리는 시간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인정했으며, 각자가 느끼는 외로움을 마음 깊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공명정대함으로 널리 존경 받았다. 그들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들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적어졌다.
챙 - !
강철의 대화만이 서로를 위로 할 수 있었다. 양측에서 모두 극한에 이른 기교를 사용했다. 일반적인 기사는 흉내도 내기 어려운 복잡한 동작이 나오면, 상대방은 아주 기초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파훼했다. 매번의 일격이 공수를 수행했다. 한 치도 물러설 곳 없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 벌어졌다.
스승과 제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검을 주제로, 무술의 담소를 나누었다. 해가 지고, 떠오르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고귀한 기사도의 이상이 비웃음거리가 되어가는 시대에, 그들은 사라져가는 가치를 지키고자 투쟁하는 자들이었다. 칼날이 부딪치는 마찰음이야말로 그들의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해주는 노래였다.
부딪치는 칼날 사이로 눈을 마주친 그들은 다시금 아주 맑게 웃었다.
***
아르투르와 마스터 나이트, 바야르 경이 며칠 간 외부인의 출입도 금한 채 둘만의 대화를 나누자 각 세력의 외교관들은 바짝 긴장한 채 들어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정치적 계산에 근거해 나름의 추측을 내놓았다.
새로운 왕이 자신의 옛 스승을 영입하려 한다거나, 마스터 나이트가 대왕의 비밀스러운 전언을 가져왔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이것들은 제법 그럴듯해 꽤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지 중대한 세기의 회담이 이어지고 있을 거라는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하단! 하단 방어가 취약하다!”
어느새 별장 안으로 들어와 있는 레오폴트는 김빠진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 다 그쯤 하지! 고작 검술 지도나 보자고 난리를 피면서 들어온 게 아니라고.”
한창 대련에 집중하던 바야르는 레오폴트의 말에 얼굴을 찌푸리며 뒤돌아보았다. 흐름이 깨진 것에 크게 성을 내는 태도였다.
“분명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해두었는데.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왜 여기 있어?”
레오폴트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할배. 나도 왕족인데 왕실 기사들이 어떻게 나한테 손을 댑니까? 그건 그렇고 말이죠. 왜 나는 안 찾아옵니까? 옛날부터 아르투르만 편애하네요?”
“그야 네놈처럼 덜 여문 녀석이 뭐라도 된 듯 까불어대는 게 보기 싫어서 그렇다. 항상 편한 길, 쉬운 길만 찾는 놈에게 무슨 발전이 있겠느냐.”
레오폴트는 질색한 표정으로 스스로 가슴을 쳤다.
“아, 진짜 답답하네. 체할 것 같아.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할배. 그쯤 나이 드셨으면 이제 좀 유연해지실 때도 된 거 아냐? 내 실력으로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 없단 말이죠.”
“그렇게 잘난 척하다가 한 번에 훅 가지. 아무튼 시끄럽다. 이놈아. 용건이 뭐냐.”
“여태껏 무슨 심각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나 파악하러 왔죠. 그런데 지금 대륙 전체가 전쟁으로 말려들 판인데, 무슨 대련이나 하고 있는 겁니까? 어디까지 상의했어요?”
레오폴트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서서 각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르투르와 바야르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이다.
“상의할 게 뭐가 있는데?”
“전쟁을 멈추기 위한 협상 내용을 가져오셨을 거 아닙니까. 아버지랑 루이스 형님 간의 대화가 단절되었으니 이런 방법으로 접촉해 오신 거잖아요. 더 이상 가족끼리 칼부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바야르는 칼을 검집에 집어넣은 후, 무미건조하게 되돌아봤다.
“제자 놈이 왕이 된다고 해서 축하해주러 왔을 뿐이다. 협상은 없다. 애송이. 전쟁이다.”
“네? 협상하러 오신 게 아니라고요?”
“마스터 말대로야. 레오폴트. 큰형님께서 물러설 수 있는 공간을 전혀 주질 않으셨어.”
자세한 조건을 전해들은 레오폴트는 얼굴에 살짝 노기를 띄었다.
“루이스 형님께서 정말 끝까지 해보자고 하시는 겁니까? 이미 가장 많은 몫을 가진 건 그분이잖아요. 대왕의 칭호도 자기가 받았고. 그쯤이면 만족할 자리인 거 아닙니까? 선왕이 죽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친족들 간에 전쟁을 또 벌이겠다고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바야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최대한 간언해보았지만 내 말은 듣지도 않더구나. 오히려 친족들이 반항할 마음이 없다면 순순히 권력을 돌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하더군. 한 명의 왕이 대륙 전체를 다스려야만 한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야.”
레오폴트는 신랄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냥 대왕께서 다 혼자 처먹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군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데 대공국 하나 못 떼 주겠다고 그 난린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은혜도 모르는 놈일 줄은 몰랐지. 그럼 방법은 하나네요.”
바야르도 동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한번 죽여본 적 없는 놈이 전쟁은 무지하게 좋아하는 게 우스운 일이지. 자기가 뭘 말하는 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놈이 왕좌에 앉으니 이 꼴이 난거다. 왜 하필 그런 놈이 페르넬의 장자였는지, 원.”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큰형님은 무능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자기 마스터와 절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지.
“스승님, 대답은 뻔히 알지만 제안 하나드리지요. 저희 아버지 쪽으로….”
“아니, 됐다. 주군이 서약한 바를 어기지 않는 한, 기사 역시 충성 맹세를 저버릴 수 없다. 이득에 따라 편을 옮기는 비겁한 삶 따위는 한 번도 꿈꾼 적이 없다.”
“공신들을 홀대하는 건 루이스 형님이 먼저 서약을 저버린 거 아닙니까? 오늘 날의 왕국을 만드신 주역들인데 당연히 대접을 받으셔야죠.”
바위 같이 결연한 태도로 답하는 바야르.
“날 흔들려고 시도하지 말거라. 애송아. 공연한 힘의 낭비가 될 테니까 말이다.”
“별 수 없군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저흰 적입니다.”
“당연하지. 전장에서 만나면 우린 적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야.”
레오폴트는 맹수 같이 사나운 눈빛으로 자신의 옛 스승을 노려보았다. 노기사는 그런 도전적인 시선이 마음에 드는 듯 털털하게 웃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지금 이곳에서 결투를 해도 좋다.”
바야르가 칼집에 손을 가져갔지만, 레오폴트는 싸늘한 냉소를 지을 뿐 양손을 들어 빈손을 보이며 자리에서 뒤로 물러났다.
“마스터, 저는 제가 유리한 전장에서만 싸웁니다. 정정당당한 결투는 친애하는 수제자랑 하시고요.”
“흥. 입만 산 비겁한 녀석 같으니.”
씨익 웃어보이는 레오폴트.
“전쟁이 꼭 용감한 놈이 이기는 건 아니죠. 아르투르, 나는 지금 바로 북상해서 군대를 일으키러 가겠다. 너도 대관식을 마치고 따라올 거라고 믿는다. 우리 집안과 네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물론이지. 지금껏 따라와 줘서 고맙다. 숙부께도 감사인사 좀 전해드리고.”
“말이 나온 김에 우리 간의 동맹을 확실하게 하자. 내 첫 딸을 네 후계자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약속하마. 너도 그렇게 해줬으면 한다.”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의 제안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레오폴트는 완벽한 동맹 상대였으며, 금가루로 쓰여진 맹약보다 혈연으로 묶인 유대는 더욱 확실한 동맹의 기반이 되어주는 법이니까.
“그렇게 하마.”
“대관식에 직접 참석하지 못하는 건 양해해다오. 다음번엔 각자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서 만나지. 먼저 간다.”
곧장 뒤돌아서서 떠나는 레오폴트를 보며 바야르는 혀를 찼다.
“제 마스터에게 인사도 안하는 싸가지 좀 봐라. 이래서 내가 왕자들을 제자로 싫어해.”
“할배는 낙마 사고나 조심하쇼! 전장 나올 나이가 아니니까 알아서 몸 좀 사리시고!”
바야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불쾌한 기분보다는 우스운 모양이었다.
“하. 방금 전에 제 입으로 날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 해놓고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이구나. 인생 정말 편하게 사는 놈이야. 이래서 왕족 출신들은 기사로 대성하기 힘들다니까.”
“아득바득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문득 자신의 잉태되지도 않은 자식들이 이렇게 결혼 상대가 결정된 것을 두고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졌다. 나이야 비슷할 테니 다행이지만 이 시점에선 그들이 어울릴지, 서로를 좋아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확실한 건 그런 약속만이 확고한 동맹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 뒤로도 며칠간 아르투르는 마스터와 시간을 보냈다. 마스터는 자신의 모든 기술을 전해주려는 듯 최선을 다해 그를 지도했으며, 아르투르는 다른 모든 안건을 미뤄둔 채 그와의 수련에 집중했다. 남은 정치적 문제들은 샤를로트와 케이가 능숙하게 마무리했고, 마침내 대관식 날이 다가왔다.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었다. 이제 왕으로 등극할 일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