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79화 (17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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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높은 기사, 테라일 바야르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교황청 전체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본인의 명성도 높았지만 대관식을 앞둔 시점에 데네토르 왕국의 사절이 도착했다는 의미가 더욱 컸다. 아르투르에게 충성을 서약하러 모인 레무리아 각지의 대표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바야르 경이 무슨 전언을 가져왔을지 서로 수군댔다.

눈치 빠른 이들은 먼저 대왕의 사절에게 접촉하려고 했지만, 바야르 경은 모든 접견을 거부한 채 공관에 머무르다 아르투르를 가장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먼저 그를 만나기 위해 숱한 선물 공세가 있었지만 바야르 경은 재물을 돌덩이만도 못하게 여겼다. 마스터 나이트의 행차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가 아르투르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인파가 가득 모였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행렬을 바라보던 힐데군드가 케이에게 물었다.

“꼬마야. 저 늙은이가 뭐라고 이런 소란이 벌어지는 거냐? 젊어서 조금 잘 나간 늙은이인가 본데, 지금은 제대로 검을 쥘 힘도 없어 보이는데.”

케이는 갸웃한 눈초리를 보냈다.

“누나, 정말로 저 분이 누군지 모르세요? 마스터 나이트 테라일 바야르 경이잖아요. 기사 중의 기사라고 불리는 분이요. 그쪽에서도 유명한 걸로 아는데, 아닌가?

“아르투르에게 듣기론 자기 스승이라고 하던데, 보통 문명인들이 강하다고 자부해봐야 보통 우리한텐 기본이나 되는 놈들이라 말이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줄은 모르겠네.”

하지만 그녀의 곁에 있던 토르스탄은 반쯤 넋 놓은 표정으로 힐데군드에게 말했다.

“저 노인이 데론 강의 붉은 학살자다.”

힐데군드조차 그 이름을 듣고는 질려버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야기가 다르지. 아르투르 녀석이 어쩐지 다른 놈들이랑 수준이 다르더만, 진짜 괴물한테 배웠군.”

“누나가 순순히 승복하는 건 처음 보네요. 강자를 만나면 일부러 도발해서 싸워보는 게 누나가 주로 하는 짓이잖아요?”

힐데군드마저 이번에는 고개를 저어 강하게 부정의 뜻을 드러냈다.

“나도 목숨 소중한 건 안다. 인마. 쓸데없는 일에서 목숨을 걸고 싶진 않아.”

“세상에, 누나가 그러는 경우도 있네요.”

그나마도 힐데군드와 토르스탄 정도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나머지 북구인들은 노기사의 눈에 띄는 걸 두려워하며 슬금슬금 사라졌다. 케이는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자부심이 솟구쳤다. 가는 곳마다 사고를 일으켜서 수습하러 다니던 자기 입장에선 아주 신기했고,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린 더 강한 사람에겐 닥치면서 살거든. 우리가 왜 아르투르의 말 잘 듣는 용병 노릇을 해주고 있겠어? 보상도 있지만 녀석이 더 강한 놈이니까 그런 거야.”

토르스탄은 진지한 눈빛으로 지나치는 노기사를 계속 노려봤다. 중년인 그는 젊어서 대전쟁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숱한 전우들이 저 노인에게 목이 달아났다. 피의 복수를 하겠다고 천명했지만 너무나 무력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지금 어떻게 해보기엔 너무 강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상대였다.

‘미안하군. 형제들. 나는 아직 죽으면 곤란해서 말이야. 좀 더 기다려주게.’

***

우아하게 꾸며진 정원 한 가운데,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본다. 정원에는 오직 두 사람만 있었고 지저귀는 새 소리조차 없는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한 명은 이제 막 수염을 기르는 젊은이였고, 한 명은 이미 모든 체모가 하얗게 변한 노인이었다. 한 명은 인생의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시기에 있는 반면, 다른 한 명은 과거의 비할 데 없는 영광을 뒤로 한 채 인생의 종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사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내는 검을 뽑아들었다. 노기사가 공격을 시작하자, 강철이 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아르투르는 목젖을 노리는 일격을 비스듬히 쳐낸 후,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노기사는 제법이란 표정으로 웃으며 검을 받아낸 후, 맹렬한 공격을 계속 했다.

두 사람은 손과 발, 온 몸의 근육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각각의 완벽한 검술 자세를 만들어냈다. 위에서 내려 베는 것 같다가 아래서 올려 베기도 하고, 얕게 베는 척 하다가, 날카로운 찌르기로 급소를 노리곤 했다. 이따금 칼날이 서로의 얼굴이나 복부를 스치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벌어지곤 했다. 다른 기사들이 보았다면 서로 죽일 듯이 싸운다고 평했겠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도 대련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챙 - !

아르투르는 회심의 일격이 막히자,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곧장 빈틈을 파고들기 위해 다가오는 노기사를 본 아르투르는 날아드는 상대의 검격을 피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의 사거리 안쪽으로 들어가 육박전을 벌인다면 노인을 이길 수 있으리란 심산이었다.

그러나 목에서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느껴졌다. 노인의 신랄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멍청하기는. 아직 맨 몸 격투에만 의존하려는 아주 나쁜 버릇을 못 버렸구나. 기교에서 밀린다고 힘으로 짓누를 생각을 해? 말하지 않았느냐. 무기를 네 몸처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남들보다 강하고 민첩하게 태어났다고 거기에만 의존하면 최고가 될 수 없다. 네 신체적 조건을 활용하는 건 완벽하게 무기를 다룰 수 있게 된 뒤다.”

“하하하. 아직 미완성된 상태로 싸우다보니 안 좋은 버릇이 몸에 굳어버렸나 봅니다. 오랜만에 혼나는 기분도 나쁘지 않군요.”

아르투르의 호쾌한 웃음에 오히려 노기사는 역정을 냈다.

“멍청한 소리나 하긴! 적들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사이 좀 달라졌을까 싶었는데, 힘에 의존하는 습관은 여전하구나. 그걸 고쳐야만 한단 말이다.”

“실전에선 생각 외로 잘 먹히던데요. 쏠쏠하게 써먹었습니다. 게다가 마스터와 마지막으로 대련을 했을 때보단 더 잘 버티지 않았습니까.”

노기사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하! 왕이 되더니 이전보다 입이 살았군. 늘 시키는 대로 하던 놈이 말이야. 좋다. 인정할 건 인정해주마. 이제 네 움직임에도 노련함이 보인다. 하지만 신체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기 전엔 최고가 될 수 없다. 나도 맨 손으로 곰을 때려잡던 젊은 시절엔 너처럼 싸웠지. 하지만 완숙해지니 알겠더구나. 적을 때려죽이면 우월감이야 들지 몰라도, 불분명한 방법이야. 하지만 무기로 죽이는 건 훨씬 쉽고 빠르지. 지금처럼 함부로 육박전을 걸었다가 너보다 힘이 세거나 민첩한 자를 만나면 어떻게 할 셈이냐?”

아르투르는 마스터의 말이 크게 와 닿진 않았다. 살면서 자신보다 체격이 큰 사람은 토르스탄 정도 밖에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말씀이 맞습니다. 더욱 정진하지요. 배움이 모자랐는데 교만했습니다.”

노인은 까칠하게 말하며 검을 거둬들였다.

“흥. 어차피 안 들을 거면서 들은 척하기는. 그렇지만 요즘 젊은 놈들치곤 자세가 되어 있어. 갈수록 더 심해지더구나. 너 때는 속으로만 불만을 표했는데, 요즘 어린놈들은 아예 거친 훈련을 시키면 피하려는 놈들이 나오더군. 힘든 기초는 쌓지 않고 마상창 연습부터 하려는 놈들 천지야. 토너먼트나 연습 경기 따위를 잘하면 실전도 잘할 줄 아는 게지. 정직하게 일 대 일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원.”

아르투르는 슬며시 웃었다. 그의 마스터는 십년 전에도 비슷한 이야길 했었다. 마스터는 절대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기사 중의 기사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기사와 일반 병사의 실력 격차보다 그의 마스터와 일반 기사 간의 실력 차이가 더욱 컸다.

“뭐가 그렇게 웃기느냐?”

역정을 내듯 말하는 노기사.

“세상 사람들은 저를 보고 백인을 벤 기사라고 부르며 누구도 대적할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스터께서는 일흔 살을 바라보는 연세이신데도 한 번도 패배하신 적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배울 수 있는 분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 꼭 최고가 될 생각이 없는 놈들이 그런 변명을 대지. 어쨌든 기사로서의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은 걸 확인해서 기분이 좋구나.”

노기사는 기대감이 충족되어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아르투르도 같이 마냥 웃고 싶었지만, 마음속의 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큰형님과 삼촌 간에 새 내전이 벌어지려할 때, 대왕의 왕실 기사단장께서 이 먼 곳까지 행차하신 이유가 있겠지요. 그걸 듣고 싶습니다.

노기사는 코웃음을 쳤다.

“긴장할 것 없다. 난 정치꾼이 아니니까. 애송이 왕이 일으킨 불명예스런 전쟁에 끼고 싶지 않아 사절단이란 적당한 핑계를 잡아서 내려온 거다. 겸사겸사 성공한 제자도 보고 싶었고 말이지.”

아르투르는 이야길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자신이 아는 스승은 왕실에 충성스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주군에게 말을 함부로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모르는 척하기냐? 네 형은 형제들과 잘 지내라는 아버지의 유지도 무시하고 선대의 공신들을 홀대하고 애송이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자기 숙부까지 치겠다고 하는데, 내가 곱게 볼 이유가 하나라도 있느냐? 나도 왕실 기사로서 끝까지 데네토르의 왕을 섬기겠노라 맹세한 바가 아니었다면 페르디난트 대공을 지지했을 거다. 관록과 능력 모두에서 대공이 앞선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귀를 다시 한 번 의심했다. 기사 중의 기사로 유명한 자기 스승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굉장히 불만이 쌓인 모양이었다. 둘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반역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위험한 말이었다.

“저는 이제 레무리아의 왕입니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연유가 뭡니까?”

노기사는 털털하게 웃어 보이면서도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 착각은 하지 마라. 그냥 옛 제자를 만나서 흉금을 터놓았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 아무튼 네 형은 내가 모시기로 맹세한 왕이다. 특히 왕실 기사는 평생을 바치기로 했기에 맹세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불만을 표해야지 뭐. 그렇다고 왕국 내 사람이랑 같이 이야기했다간 정말로 반역 모의가 되잖느냐. 어찌되었든 나는 사절로 온 게다. 아르투르.”

“그럼 임무를 수행하시지요. 다른 사람들을 물린 건 비밀리에 제안하실 것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바야르는 흰 수염을 가지런히 쓰다듬었다.

“흠, 흠, 좋아. 넌 눈치가 항상 빠른 편이었지. 공식적인 구실은 널 체포하러 왔다는 거지만, 루이스 대왕이 네게 비밀리에 전하려는 제안이 있다. 요구 사항과 대가 중에 무엇부터 듣겠느냐?”

아르투르는 팔짱을 낀 채 바야르를 바라보았다.

“뭘 주시겠다는 지부터 들어보지요.”

“우선 네 레무리아의 왕 칭호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레무리아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독자적으로 해도 좋다는 제안이다. 단, 대외적으로는 대왕의 봉신을 자처해주는 조건이다.”

“그게 대왕께서 제게 내어주시는 전부라면 아주 실망스러울 것 같군요.”

“요구 사항을 들으면 놀라겠구나. 바로 말하마. 우선 수도로 와서 하이에버에서 벌인 학살에 대해 재판을 받아야한다. 형식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사면 받는 모양새로 가자고 하더구나. 네가 하도 많은 귀족들을 죽여서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면 어쩔 수 없으니 좀 양해를 구하겠다는 모양이야. 대신 따로 이권을 챙겨주겠다는 제안이다.”

“큰형님다운 제안이군요. 합리적이군요.”

“다른 제안은….”

아르투르는 강하게 손을 내저어서 바야르의 말을 막았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무엇인진 몰라도 거절하지요.”

입가에 감정이 뒤섞인 묘한 미소를 짓는 바야르를 보며 아르투르는 당당한 눈빛으로 왕의 사절에게 선언하였다.

“제 제안은 이렇습니다. 숙부의 작위 박탈은 취소하시고, 제가 레무리아의 왕으로 대관했음을 인정해주십시오. 그리 해주신다면 큰형님을 명목상의 주군으로 여기겠습니다. 그게 제가 제안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게 지금 시국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않느냐.”

“예. 사실상 저랑 큰형님은 오늘 선전 포고를 주고받은 셈이 되었군요.”

아르투르의 대답을 들은 노기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야 내 제자답지. 잘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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