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78화 (178/248)

178

한 무리의 기사들이 돌로 포장된 가도를 따라 말을 달렸다. 기사들의 숫자는 열댓 명 정도였지만, 기사들을 따르는 종자와 하인들의 무리까지 합치자 제법 큰 대 인원이 되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내며 힘겹게 말을 몰고 있었다. 벌써 반나절 째 쉬지 않고 계속되는 여정이었다.

그나마 말들은 주기적으로 승용마를 갈아탔기에 버틸 만 했지만 기수들은 죽을 맛이었다. 노련한 기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두에 선 기사는 투구의 백색 깃을 휘날리며 계속 말을 몰았다. 백색 깃의 기사는 일행들이 지친 것을 모르는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느 사이 백색 깃의 기사와 일행 간의 사이가 멀어졌다. 처음에 하인들을 비웃던 기사들이었지만 이젠 너무 지친 나머지 투구 눈틈 사이로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나이 많은 기사들이 젊은 기사들에게 뭔가 해보라는 눈빛을 보냈고 젊은 기사들은 종장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종자들도 각자의 나이와 체격에 따라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결국에는 아직 가장 어린 소년이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대장에게 멈춰달라고 할 수 있는 건 너 뿐이다!

소년은 이제 말고삐를 쥐는 것조차 힘들어할 정도였지만, 선임자들의 시선에 떠밀려 온 힘을 쥐어짜내 허벅지로 말을 두들겨 선으로 나갔다.

“헉, 헉, 마스터!”

소년의 말에 선두의 기사가 뒤돌아보았다. 투구 속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퍼졌다.

“무슨 일이냐!”

“일행들이, 일행들이 모두 지쳤습니다. 조금만 쉬어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백색의 기사는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지친 자가 있느냐!”

기사들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힘을 쥐어짜내 답했다.

“없습니다!”

그러자 백색 깃의 투구 속에서 엄한 눈빛이 번득인다.

“종자야, 너만 지친 것 같구나. 평소에 수련을 게을리 한 게 아니더냐?”

소년 종자는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똑바로 말하지 못할까?!”

“…맞습니다! 제가 힘드니 제발 쉬어가 주십시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마스터!”

“나약한 놈 같으니라고. 모두 멈춰라!”

백색 깃의 기사가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고삐를 잡아 세웠다. 영리한 말들도 쉬어갈 때가 된 점을 알자 기뻐했다.

“밤이 다가오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겠다. 발루아누스! 더 나아가지 못한 건 너 때문이니 식사에 앞서 구보를 하고 와라. 지금 당장 말에서 내려 저곳 숲 가장자리까지 뛰어다녀오도록!”

소년 종자, 발루아누스는 잘못했다며 고개를 다시 숙인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제발 식사가 끝난 뒤에 뛰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색의 기사는 투구의 얼굴 보호대를 들어올렸다. 굉장히 다부진 인상의 노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사나운 시선으로 발루아누스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소년은 머리가 새하얗게 되면서 뛰기 시작했다.

“제 때 오지 못하면 저녁밥은 굶어야 할 거다! 서두르도록!”

“예! 마스터!”

소년은 모든 움직임이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든 뛰었다. 소년이 떠나자 노기사는 안장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왕실 기사들의 상징인 황금 망토가 질질 끌리자 다른 종자가 와서 조심스레 망토를 걷어주었다.

“마스터, 아직 어린 분인데 너무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무뚝뚝한 표정의 중년 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그 역시 노인과 마찬가지로 황금 망토를 걸친 기사였다.

“하. 이 정도가 힘들다면 기사 작위 받는 건 때려 치워야지.”

“지금 발루아누스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나이 많은 종자들도 따라가기 힘들어 할 정도지 않습니까. 저러다 몸이라도 성하시면 큰일이 날텐데요. 왕실 구성원들을 지키기로 맹세한 건 저 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스터.”

중년의 기사는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늙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늙은 기사는 오히려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아그라베인. 넌 사람 보는 눈이 늘지를 않는 구나. 발루아누스는 내가 본 종자 중에 최고의 재능을 가진 녀석이다. 자기 조부는 물론이고, 삼촌들마저 뛰어넘었다. 아르투르도 저 정도 자질을 보이지는 못했어. 그런데 딱 한 가지가 부족해. 놈에겐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최고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없어.”

“저 분은 우리 같은 기사들이 아니라 왕이 되실 분이십니다. 언제까지 하루 종일 기사 수련만 시키실 생각입니까? 그러라고 대왕께서 저분을 마스터의 후견 아래 맡긴 게 아닐 것입니다.”

노기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역정을 냈다.

“대왕의 아들이건 노예의 아들이건 나한테는 그저 종자일 뿐이다. 싫다면 나한테 기사 작위를 받는 건 포기해야지. 오히려 최고의 자질을 가진 자를 대충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불충이다!”

좀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던 아그라베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분은 왕세자십니다! 저러다가 부상을 입으시거나 사고라도 당하시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애초에 이런 위험한 임무에데려오지 않았어야 합니다! 마스터!”

젊은 기사의 말에 백발의 기사는 아주 강한 위협을 담아 아그라베인을 노려보았다. 일종의 경고였다.

“아그라베인, 이제 네 마스터에게도 대들 줄 알고 많이 컸구나. 황금 망토를 차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거냐? 불만이면 네 칼을 뽑아라. 누가 맞는 지 바로 시험해보자. 네가 이긴다면 내 모든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할 테니.”

노기사의 말에 삽시간에 아그라베인의 눈살이 다시 꿈틀거렸다. 긴장감이 고조되자 다른 기사들은 잠자코 지켜보기만 할 뿐, 감히 앞으로 나설 생각은 못했다. 한 편을 들기에는 너무 전설적인 자들이었다.

“….”

“왜? 다 죽어가는 늙은 마스터조차 이길 엄두가 나지 않나보지?”

결국 아그라베인이 아주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스승은 젊은 시절에도 알아주는 벽창호였다. 백발의 노인이 된 지금 와서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이유는 없을 터이다.

“제가 어찌 마스터 나이트께 도전하겠습니까. 뜻대로 하시지요. 그렇지만 왕세자 전하를 혼자 보내는 일은 저 역시 곤란합니다. 뒤따라가서 호위를 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옛 종자가 공손한 태도를 취하자 노기사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걱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곁에서 함께 하는 건 허락한다. 단, 절대 돕지는 마라.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기사 서임을 받기 전까지는 왕세자라고 부르는 것도 금지다. 발루아누스는 내 종자일 뿐이다. 알겠느냐?”

“예. 마스터.”

뒤따라가는 아그라베인을 보며 노기사는 혀를 찼다. 저렇게 특별대우를 해주어봐야 어린 왕세자에게 도움이 될 게 하나 없었다. 최고의 기사는 최고의 재능과 노력에서만 나오는 법이었다. 사람은 결핍이 있어야만 노력을 했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자신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영지도 없는 기사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렇기에 더욱 필사적으로 왕의 눈에 들고자 노력했었고, 덕분에 오늘날 마스터 나이트라고 불리며 모든 기사들의 선망을 받는 기사가 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위대한 가문의 자손들은 그렇지 않더군. 그들은 제 선조가 이뤄놓은 발판 위에서 흥청망청 인생을 편히 살 생각뿐이야.’

매년 자신에게 찾아와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종자로 받아달라거나, 가르침을 달라는 대가문의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자신이 기사로 인정해준 사람은 단 둘 뿐이었다. 보통은 스스로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자질이 없어 다른 기사에게 넘겼다. 자신의 아들에게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역정을 내는 자들도 많았지만, 결투 신청 앞에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저 어린 왕세자라면 내 모든 실력을 전수받을 수 있을 텐데. 주변이 도와주질 않는군. 아무리 특별 대접을 하지 말라고 해도 미래 권력에 충성하려는 아첨꾼들이 가득하니 왕세자가 교만해지고 있어. 실전에서 목숨을 구해줄 건 왕세자 스스로의 실력뿐이거늘.’

마스터 나이트는 자신의 일행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는 기사들도 아첨을 하는 시대였다. 하기야, 새로운 왕은 기사들에게 강직한 명예로움보다는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니 왕의 눈에 들고 싶은 자들은 잠자코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명예는 잊히고 있었고, 기사들은 왕의 전우에서 충성스런 번견이 되어가는 세상이라.

‘페르넬은 언제나 기사들의 말을 따랐고, 자신이 앞장서서 싸웠지. 하지만 그 아들은 뒤에 앉아 손짓으로 명령이나 내리니 세상이 이 모양이 되어가고 있지. 다시 이교도들이 쳐들어오면 누가 문명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페르넬이 자식을 잘못 길렀어.’

옛 주군이자 친우를 원망하던 노기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식 교육을 망친 건 자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신의 아들들도 진정 위대한 기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 다들 편히 아버지의 업적 덕에 얻은 작위를 가지고 편히 살 생각뿐이었다.

지나간 세월을 한탄하던 노인은 문득 옛 제자, 아르투르가 떠올랐다. 그놈은 항상 눈빛에 간절함이 있었다. 남들이 다 그만두는 훈련은 물론, 자신이 시키지 않은 훈련까지 해서 자신이 쉬라고 명령을 해야 할 정도였다. 훈련 하다 다쳐도 뭐라고 개입하는 사람도 없었고, 항상 자신에겐 고분고분했다.

‘피오레 가문 놈들이 덤볐다가 박살이 났다지. 그놈이 누구 제잔데 돈푼이나 세는 하찮은 놈들 따위에게 지겠어. 이제 왕으로 대관한다고 하던데, 실력은 얼마나 늘었을지 봐야겠어. 정치를 한다고 수련을 게을리 했으면 혼을 내줘야겠지.’

성공한 제자를 만난다는 생각에 마스터 나이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

교황청의 귀빈실.

“확실한 거냐? 레오폴트?”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고급스러운 방 안에 울렸다.

“너도 예상한 바잖아. 루이스 형님이 무언가를 나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 거 아니냐.”

레오폴트의 한탄 섞인 말에 아르투르는 눈가를 묘하게 찌푸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삼촌은 오‘데르만 왕가의 원로이자 공신 아니신가. 그런데 명분도 없이 작위를 몰수하겠다고? 그럴만한 명분이 뭔데?”

레오폴트는 능청스럽게 비꼬듯이 말했다.

“왕에 대한 불충이라고 이름을 붙이셨더군. 지금이라도 와서 엎드려 빌면 대공자리만 뺏고 끝내겠다고 하시더라고. 아무래도 사촌 형님이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앉아있는 지 잘 모르시나봐. 아르투르. 너도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군대를 일으켜야한다. 아버지가 당하면 다음은 바로 너야.”

아르투르는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큰형님, 루이스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명석한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대제후인 삼촌의 영지를 일거에 몰수하겠다는 위험한 수를 던질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방법으론 설령 큰 형님이 승리하더라도 정치적으로 건질 게 없을 텐데. 자기 삼촌조차 명분 없이 내치는 사람을 따를 대 가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전쟁을 뜻했다. 이미 왕국의 제후들의 루이스 대왕의 명에 따라 병력을 소집하고 있다는 소식이 방방 곳곳에서 전해졌다. 정보 공작이라고 보기엔 다양한 경로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한창 정보를 종합해 대책을 수립하고 있을 무렵,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마스터. 급보라서 말씀 드립니다. 지금 루이스 대왕의 사절이 교황청을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다고 하더냐?”

“마스터를 체포해서 넘겨받으러 오셨다는군요. 마스터의 마스터께서 왕실 기사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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