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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77화 (17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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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은 별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어졌다. 두 사람은 방금 전에 있던 일이 없던 것 마냥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주도권은 완전히 넘어간 뒤였다. 몇 차례 논의가 있던 끝에, 아르투르는 두루마리에 쓱쓱 글을 써서 책상 끄트머리로 밀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두루마리를 받아 펼쳐본 교황은 눈살을 찌푸렸다. 외교전의 패배라고 할 만한 조건이었다. 최악은 면했지만, 결코 최선도 아니었다.

“이미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뭘 물어보는가.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여겨야지. 오히려 내가 묻지. 자네는 더 좋은 조건을 강요할 수도 있는 입장인데, 왜 이정도 성과에 만족했나?”

교황의 또렷한 시선을 아르투르가 같은 눈길로 마주보았다.

“전 단순히 교황 성하께 정당성만 얻고 싶은 게 아니라 교황 성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싶은 겁니다. 제가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한 이유입니다. 제가 원하는 통치의 성공을 위해서는 교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교황은 아주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자네는 여차하면 검에 깃든 옛 신에게 부탁해서 권위를 빌릴 수도 있지 않은가? 왜 그렇게 하지 않지?”

“그거야말로 진짜 위험한 일이죠. 권력의 원천을 오직 한 곳에 의존하게 되니까요. 신적인 존재를 여럿 만나본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위험한 면이 좀 있습니다. 사람들을 휘두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죠.”

아르투르의 말에 날카로운 표정으로 반문하는 교황이었다.

“그렇다면 교회도 특별할 것이 없겠군. 신의 뜻을 받드는 건 자네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저한테 성하의 도움은 신의 뜻보다도 백성들이 원하기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고스란히 신의 뜻을 대변한다고 믿지도 않고요.”

“아무리 그래도 주교 임명권을 자네가 가져가겠다고 한 건 심한 처사야! 성직자의 임명권은 고스란히 교회에게 있는 게 맞아!”

아르투르는 능청스럽게 답했다.

“교리와 현실이 다른 일이야 자주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대신 교황령은 신성불가침한 땅이 되었고, 교회는 굉장히 많은 특권을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저한테도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교황은 능청을 떠는 젊은 왕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용맹하지만 정치에는 어두운 기사에게 왕관을 씌워줘 교회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그에게 이용될 판국이었다.

“자네가 말한 건 애초에 협상의 대상도 아니야. 내가 대관식을 해주기로 하긴 했지만, 그 뒤에도 자네를 도와줄 지는 검토해보아야 할 문젤세.”

“아니오. 성하께서는 결국 절 도우실 겁니다.”

교황이 지팡이에 손을 얹은 채, 사뭇 진지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린가?”

“송구하지만 성하, 대화가 진솔해지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는 레무리아식 대화를 싫어하고,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쉽게 승복하셨죠. 어차피 왕위는 주실 거였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며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말을 하라는듯한 시선을 보내다가, 마침내 아르투르가 입을 열었다.

“제 큰형님께서 내전에서 승리했지 않습니까. 레오폴트에게 들었습니다. 사실상 전투가 끝났다고요. 게다가 성하께선 큰형님과 문제가 좀 있으셨고요.”

늙은 성직자는 혀를 찼다.

“레오폴트 백작이 그렇게 붙어 다니는 이유가 있었군. 그래. 이제 내전 종식은 시간문젤세. 그럼 다음으론 뭘 하겠나? 그의 아버지가 시작한 대륙 정복을 완수하려하겠지. 자네의 영토가 그 대상이 될 거고.”

아르투르도 담담히 말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교회도 말 잘 듣는 신하로 만들고 싶어 하실 테죠. 권력을 나눠가질 분이 절대 아니시니 까요.”

아르투르는 교황의 눈에서 심대한 우려를 읽었다. 이 경건한 성직자가 평생 추구해온 일은 교회의 독립성이었다. 그건 이 노인의 정략을 넘은, 순수한 신념이기도 했다.

“루이스 왕이 레무리아를 침공해온다면 이길 수 있겠나?”

“교황청의 안위도 달린 일이니 최선을 다하겠지만, 결과는 장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도 열심히 도와라, 라고 속뜻을 숨겨둔 말이었다.

“교회를 길들이는 건 모든 군주들의 꿈일 텐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왕권과 신권은 어느 정도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분명히 약속드리는 건, 교회는 항상 그 입지에 맞는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성하의 후원을 받고 있던 현지 귀족을 왕비로 맞이한 게 증표가 되지 않겠습니까?”

교황은 젊은 왕의 말에 재차 웃음을 지었다. 평생 권력에 눈 먼 귀신들과 능구렁이들을 보아왔지만 그들의 음모에 비교해도 이 애송이의 그림에는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고, 확실한 명분도 확보해둔 모습은 흥미가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샤를로트는 왕조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되겠지. 이 젊은이는 각 세력마다 큰 양보를 하는 것처럼 행세해놓고, 정작 실권은 자기가 다 가져가고 있군.’

아무리 방안을 모색해 봐도 아르투르의 제안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없었다. 어느 사이 젊은 왕은 자신에게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어. 꽉 막힌 기사도 꼴통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조성한 건가?”

아르투르는 뚜렷한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니요. 지금도 제게는 명예가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칼로 군림하고 싶지 않으면, 고분고분 말해도 따를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깊은 한숨을 쉬는 교황.

“교회의 본분은 지배자들이 정의로운 통치를 할 수 있게 돕는 것일세. 자네는 그런 직분에 어울리는 사내로군. 나로서는 지지하지 않을 방도가 없군. 인정하겠네. 아르투르 왕이여. 이제부터 자네의 행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

노인은 아르투르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왕의 손은 굳은살로 가득해 거칠었던 반면, 교황의 손은 부드러웠다.

“제 통치에 함께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교황 성하. 이제부터 우린 한 배를 탄 겁니다.”

아르투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밝게 웃었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거두면 거기 심취하기 쉬운데, 자넨 노련한 왕처럼 행동하는군. 그런 균형 감각이 정말 마음에 드네. 무엇이 자넬 만들었나?”

아르투르는 골똘히 생각한 후 답했다.

“왕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경험입니다. 성하. 오히려 제가 영지를 받았더라면 아직도 거기 갇혀있었을 겁니다. 이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살더군요. 그들을 포용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노인은 표정을 풀고는 자신의 수염을 가지런히 쓰다듬었다.

“노련함은 나이가 아니라 경험이 만들어내는 법이지. 우린 앞으로도 계속 경쟁하겠지만, 아주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성하의 칭찬이라면 제가 기쁘게 받겠습니다. 영광입니다.”

우르술라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훌륭한 젊은이가 왕을 한다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이런 자가 교회에도 있다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교황은 결국 옛 신의 총애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서 회담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진심으로 납득하게 되었다.

이 젊은이에겐 왕의 기질이 있었고, 자신이 추대한 목적은 이룰 수 있을 터이다. 그것이면 자신이 할 일은 다한 거겠지.

***

회담을 마친 아르투르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혼자 생각을 반복했다.

‘여신님, 들리십니까?’

- 오냐. -

실의에 빠진 여인의 목소리에, 아르투르가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신은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은 채, 무성의하게 답했다.

- 신자 하나 없는 영락한 신에게 부탁할 게 무엇이 있느냐? -

‘당신은 제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제 후계자들도 당신을 기리게 하고 싶습니다. 왕조의 호칭을 당신의 이름으로 정하고 싶은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크, 크흠. 고작 내 이름을 따서 가문 명을 짓는다고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아느냐? 왕조가 오래 가봐야 천년 이상 가겠느냐? 금방 사라질 이름 따위에 내가 기뻐할 리가 없지 않느냐? -

여신의 성난 것 같은 목소리에 아르투르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역시 무리였군요. 죄송합니다.’

아르투르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뒤로 돌아섰다. 하는 수 없이 왕비의 말대로 교황에게 왕조의 이름을 정해달라고 부탁해야하나.

-싫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만. -

‘네?’

-이 눈치 없는 놈아! 사람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느냐? 고마우면 내 교단을 다시 세워달라는 말을 꼭 신의 입으로 대신 해야겠단 말이냐?! -

‘여신님, 시대가 변했습니다. 아무도 여신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데 교단을 어떻게 새로 세웁니까? 심지어 검에 엮인 지박령 같은 상태로 계신 거잖아요.’

- 네가 앞장서서 내 뜻을 전파하면 된다! 발타리아라고 처음부터 이렇게 숭배를 받았던 게 아니지 않느냐! 나도 이렇게 큰 교회에서 숭배를 받고 싶단 말이다! 영원토록 내 이름과 행동이 기억됐으면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너라고 발타리아를 그렇게 독실하게 믿는 것도 아니고! -

사뭇 무거워진 아르투르의 목소리.

‘할 수는 있습니다.’

- 거 봐라. 그렇지 않느냐. 네가 할 수 있는데 왜 못해주겠다는 거야? -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제가 이루려던 걸 모조리 내팽개치고 평생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해야할 겁니다. 그게 정말로 당신이 바라시는 겁니까?’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길게 느껴지는, 실제로는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다.

- 역시 안되겠지? -

이번에 들려온 여신의 목소리는 씁쓸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여신님. 저는 어머니가 누군지 모릅니다. 이제 와서 누군지 안다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 …. -

‘그러니 저를 보호하고 지켜주신 당신을 제 어머니로 모시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제 후손들은 당신을 기억할 테지요. 왕들의 기억은 수백 년을 이어지고, 연대기가 돼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집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당신의 뜻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지 날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 간만에 듣기 좋은 말도 해주는구나. -

여신은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좋다. 너희 가문이 내 축복을 받았다고 주장해도 좋다. 기왕에 내 이름을 왕조의 이름으로 삼는 김에 문장도 정해주마. 붉은 용을 새겨라. 그것이 나의 본래 모습이니. 잘 그리지 않으면 혼내줄 테니 그리 알거라. -

아르투르에게 홀가분하고 시원섭섭한 여신의 감정이 느껴져 왔다.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 최선을 다해 살아다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해다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곳을 향해 나아가다오. 그것이 너희에게 바라는 내 전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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