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76화 (176/248)

176

노구의 교황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보며 눈을 비빈다. 온 몸에 물기가 흐르는 백색의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자신을 아주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게 아닌가. 이따금 몸에서 녹색 광채가 번뜩일 때마다 눈이 부셔서 한쪽 눈을 감는다. 누가 보아도 신성한 존재!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이 어리고 어리석은 자야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내게 선택 받은 아이를 의심한단 말이냐?”

교황, 우르술라 2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크기와 성력을 가늠해보았다. 자신 역시 신비한 체험이라면 여러 번 해보았으며, 교회의 어두운 일을 떠맡으며 세상에서 의도적으로 감춰져 있는 어둠의 존재들과 싸워본 적도 있지 않던가.

‘일개 혼령 따위가 아니야.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힘이다. 게다가 이런 힘은, 구세주의 것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성질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서부 대륙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자, 신의 지상 대리인이었다. 당당하게 나서야했다. 노인은 성호를 그으며 허공에서 몇 걸음 떠 있는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반갑습니다. 신성한 분이시여. 저는 모든 사도들의 후계자이자 유일신의 지상 대리인인 우르술라 2세라고 합니다. 교회의 수장으로서 신도들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고 있지요. 제왕들 또한 교회에선 일개 신도에 불과하니, 제게는 그들이 신의 뜻에 맞는 통치를 할지 지켜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여신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픽-하고 웃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었으며, 우르술라가 자신을 대하길 어려워하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애쓰는 게 귀엽기도 했지만, 지금은 화를 내야 할 시간이었다.

“고작 제사장 주제에 호칭만 아주 거창하구나.”

“그런 칭호는 예전에 폐지되었습니다. 이제는 교단의 황제, 교황입니다.”

엘라카르시스는 일부러 발음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제사장. 긴 말하지 않겠다. 이 아이는 내게 직접 축복을 받았으며, 발타리아의 선택을 받았다. 네놈에겐 무언가를 고려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여신의 목소리가 가지는 설득력은 가히 마법적인 것이었지만, 교황은 아찔해지는 정신을 날카롭게 붙잡았다. 초자연적인 존재들의 위엄과 아름다움은 인간이 맞대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그도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저희 교단의 전통에 어긋납니다! 왕들은 항상 교회로부터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저희가 그분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정체도 밝히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분의 전령이라면, 모름지기 사도인 저를 알아보셨겠지요. 저희에게 믿는 신은 단 한 분, 용살자 발타리아이시며 다른 신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엘라카르시스의 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꿈틀거렸다. 여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자, 주변으로 돌풍이 모여들었다. 사방의 의자와 제대들이 날아다니며 벽에 가서 처박히고, 알현실의 유리창이 일제히 깨져, 유리 조각들이 날아다녔다. 우르술라 교황은 꿈쩍도 않은 채 여신을 올려다보았다.

“아르투르. 요즘 어린놈들은 정말 싸가지가 없구나. 신을 보고도 경외하질 않고, 자신이 옳다고 윽박이나 질러대니 말이다. 발타리아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불경죄로 태워죽였을거다.”

아르투르는 골치 아프다는 듯 성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아… 여신님. 이만 들어가시죠. 제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즘 애들은 여신님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요. 화내셔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엘라카르시스는 싸늘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다면 어느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레오폴트의 이름을 팔아서 네 자식을 핍박하면 넌 뭐라고 반응 할 테냐?”

“아, 그건 못 참죠. 몇 대 패줘야 정신이 번쩍 들겠죠.”

“그래. 내 심정을 이제 네가 잘 알겠구나. 이 건방진 제사장 놈아. 분명히 네가 발타리아의 뜻을 대신 한다고 했겠지.”

긴장감을 침을 삼키는 우르술라.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묻겠다. 발타리아가 용들과 싸울 때 어디 있었느냐? 나는 그의 곁에서 같이 불길을 뿜고 상처를 치유해주며 도와주었느니라.”

“그곳에는 제 전임자들인 전대 사도들께서 계셨습니다.”

“아, 기억이 나는구나. 발타리아의 사도란 놈들은 싸움이 시작되자 쥐새끼처럼 숨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었지. 두려움에 떨면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너흴 이해했다. 신들의 싸움이란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말문이 막혔는 지 머뭇거리던 우르술라는 궁색한 변명을 꺼냈다.

“…저희 기록에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엘라카르시스는 눈을 크게 뜨며 우르술라를 노려보았다.

“그 시대를 살아본 신의 말이 맞을까, 수천 년 간 너희가 써온 경전이 맞을까.”

“당신의 말만 믿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

엘라카르시스의 표정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불경하다!”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활화산 같은 분노가 담긴 고성이 울려 퍼지자, 잠잠해지던 돌풍이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여신의 신형은 돌풍에 휩싸여 서서히 떠올랐다. 그녀는 한 낮의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말했고, 푸른 안광은 주변의 모두를 압도했다.

“하찮은 필멸자야. 잘 들어라. 나는 엘라카르시스, 생명을 어루만지는 자로다. 발타리아와 함께 눈을 뜬 최초의 신이며, 만물의 어머니니라. 나는 발타리아와 함께 태초의 세상을 거닐며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나는 너희의 모든 역사를 합친 것보다 긴 시간을 그와 함께 지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감히 발타리아를 직접 본 적도 없이 감히 내 앞에서 그의 뜻을 들먹여? 죽음을 불허하는 극형을 내려도 모자란 불경죄니라!”

소용돌이치는 돌풍으로 인해 건물이 흔들리며 곳곳에 금이 갔다.

“잘 들어라. 제사장아. 지금 발타리아를 대신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어린 인간인 네가 아니라 발타리아의 유산을 보호하는 나겠지.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그러니 발타리아를 대신해 명하겠다. 아르투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줘라. 네놈들이 정말로 발타리아의 사도라면 말이다.”

겨울의 강물보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여신의 시선이, 예리하게 우르술라의 마음을 꿰뚫었다.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녀의 말에는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권능이 담겨있었다.

“따, 따르겠나이다. 신의 사자이시여.”

우르술라가 승복하자 그제야 돌풍은 멈추었고, 엘라카르시스는 지상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내가 네놈과 다시 대면하게 하지마라. 제사장. 지금도 날 의심하느냐?”

“아,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즐기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만 하여라. 네게서 죽음을 앗아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라.”

교황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내밀어 격렬히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일개 사도인 제가 어찌 그분과 함께 하시던 분을 의심하겠습니까? 뜻대로 하십시오.”

여신은 그제야 저의를 알 수 없는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제사장아, 요즘 말로 처신을 잘하거라. 오늘 내가 보여 준 권능을 잊지 말란 말이다. 널 처벌하는 건 유예되었을 뿐이니라.”

“…믿고 맡겨주십시오.”

여신의 신형은 반투명해지더니, 녹색 빛으로 산화되어갔다. 한 차례 번쩍이자 완전히 변해버린 여신은 성검 속으로 들어갔고, 돌풍으로 인해 떠 있던 모든 도구들이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성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뒤늦게 도착한 호위 기사들은 엉망이 된 알현실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제법 정신줄을 잡고 있는 자는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공이 하신거요?”

아르투르의 태연한 표정이 그의 비위에 거슬린 모양인지, 곧장 검을 뽑아드는 이도 있었다. 아르투르가 대꾸하기도 전, 교황이 다급히 외쳤다.

“그만둬라! 이제 그는 레무리아의 왕이니라! 함부로 대하지 말도록!”

교황은 넋이 나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망연한 표정으로 기사들에게 말한다.

“그저 천사께서 오셔서 내게 꾸짖음을 내리셨음이니라. 레무리아 왕은 그분의 비호를 받는 존재이니, 다들 조용히 하거라.”

노인의 말에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거두며 고개를 숙였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폐하!”

아르투르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사과를 받아들였다. 저 친구들은 그냥 자기 일을 했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미안해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 에헴. 이제 이 몸의 힘이 좀 알겠느냐? 아르투르. 어머니의 말을 잘 들으면 평생이 편해진다. -

의기양양한 엘라카르시스의 목소리가 아르투르에게만 전해졌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신님의 존재는 어지간하면 숨기고 싶었는데 이제 그리하기도 어려워졌군요. 어차피 저 혼자서도 잘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제가 유리한 입장이었고, 교황은 큰소리나 한번 쳐보려던 거라고요.’

-시끄럽다. 실컷 도와줬는데 그런 재미없는 소리나 하다니 섭섭하구나. -

‘그동안 제가 적과 싸울 때는 개입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인간들 사이의 일은 인간들끼리 결정할 일이라고 하시면서요.’

- 그건 지금도 똑같다. 모든 인간들이 내 자식인데, 누군가를 편애해서야 되겠느냐. 그렇지만 우리의 이름을 팔아먹은 건 훨씬 심각한 문제지. 지금 그들이 말하는 발타리아의 뜻은 실제 그의 뜻과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진짜 발타리아의 가르침을 알려줄테니, 이 기회에 교단을 모조리 뒤엎고 바꾸지 않겠느냐? -

아르투르는 아주 강한 부정의 감정을 담아 고개를 뒤흔들었다.

‘아니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듣기만 해도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지독한 일이거든요.’

- 너 역시 발타리아를 믿는데, 어째서 그러하느냐. 그의 진짜 뜻을 구현하고 싶은 것 아니냐? -

아르투르는 내심 웃었다. 인간이 신들을 이해할 수 없듯, 그들도 인간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전능한 존재이기에 순진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이미 수천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를 정확히 재현한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입니까. 중요한 건 교회가 전하는 용살자의 이야기에 담긴 메시지이시오. 설령 그것이 거짓이더라도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깊게 믿게 된 것입니다. 이제 와서 여신님께서 큰 기적을 보여주신다 한들, 믿지 않을 사람이 아주 많을 겁니다.’

대답하는 엘라카르시스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발타리아는 진실만을 전하라고 가르쳤었다. 지금 네 행동은 그의 가르침과 위배된다.’

‘어쩔 수 없지요. 믿음은 용들에게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우리 인간들이 엮어낸 신화가 된 것입니다. 덕분에 아직도 구세주가 된 용살자의 신화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죄송하게 되었지만 이게 저희의 최선입니다. 현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것이니까요. -

여신은 오직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정신적 연결을 통해 그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은 슬픔과 차분히 가라앉은 분노였다. 그 분노의 화살은 향하기도 자신이기도 했으나, 초점은 더 깊은 곳에 맞춰져 있었다. 더 이상 신들을 있는 그대로 경외하지 않게끔 변해버린 세상, 그 자체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