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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75화 (175/248)

175

얼마 뒤, 종소리가 멈추자 거리에 가득 차서 기도를 올리던 사람들은 생업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이다. 성도 사람들에겐 이런 집단 기도가 생활의 일부이고, 경건한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도시를 조용히 유지하는 게 틀림없었다.

“왠지 꺼림칙 하구만.”

아르투르는 성도의 성벽 안과 바깥의 기묘한 분위기 차이에 위화감을 느꼈다. 장사꾼과 매춘부, 거지들이 판을 치는 성벽 바깥에 비하면 성도 내부는 꺼림칙할 정도로 차분하고 신실한 분위기이지 않는가.

교황이 머무르는 궁, 백색 교회로 나아가고 있을 때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에 산전수전 다 겪은 일행은 즉각 무기를 뽑아들고 상황을 파악했다.

“마스터, 저깁니다!”

케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본 아르투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자신의 눈을 몇 차례고 비벼보았지만, 눈앞에 있는 광경은 현실이었다. 속옷만 걸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성도 한복판을 행진하는데,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서로를 후려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아아니, 저거 뭐야, 노, 노예라도 되는 거냐?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아르투르는 실로 간만에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행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온 몸에 상처가 가득 했고 피를 흘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자신들끼리 하는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채찍 고행자들은 처음 보시나봅니다. 저 얼간이들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줌으로서 죄악을 씻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수행에 즉효라는데 개소리지요. 그럴 힘이 있으면 가난한 이웃이나 도울 것이지.”

카밀은 경멸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나머지 일행의 반응도 혐오스러워하거나, 경멸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힐데군드는 큰 소리로 웃어댔다.

“너희 신은 메저키스트냐? 내가 본 종교 중에 제일 특이한데?”

힐데군드가 노골적으로 비웃었지만 아르투르는 뭐라 변호하거나 비난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내 깊숙이 들어갈수록 보이는 풍경들은 더욱 기묘했다. 장엄한 교회에는 도금된 성인의 유골이 걸려있질 않나, 모든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 하며 부르는 모습은 충격과 공포였다.

“여, 여긴, 도시 전체가 하나의 교회로군.”

“성도다운 거 아니겠습니까?”

카밀은 묘한 비웃음을 흘렸다. 평소에 카밀을 못마땅해 하는 레오폴트도 이번만은 그에게 동조했다.

“전 대륙에서 종교에 정신 나간 놈들이 다 이곳으로 모였나본데. 여긴 완전히 미치광이 집합소야!”

레오폴트는 일부러 주변 사람들을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지만, 지나가던 한 수도사 무리는 오히려 그에게 가여운 시선을 보내며 성호를 그었다. 레오폴트는 그들을 불러 세워 예의를 차릴 것을 요구했다.

“왜 멀쩡한 사람한테 성호 긋고 지랄이야, 지랄은?”

“나리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회개하지 않으시면 지옥에 떨어지실 테니까요. 지금이라도 귀한 말씀 접하시고 깨달음을 얻으셔야 합니다.”

그들의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아르투르마저 당황하여 물었다.

“자네들은 내 사촌이 누구인지 알면 기절할지도 몰라. 이 자리에서 자넬 베어 죽여도 면책을 받게 될 만큼 직위가 높거든.”

“어차피 유일신 앞에서는 모두가 형제자입니다. 결국 나리의 권세도 제 육신도 시간이 지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분의 뜻만은 영원합니다.”

아르투르와 레오폴트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눈빛만으로 즉각 대화를 주고받았다.

‘레오폴트. 이 새끼들 건드리지 말자. 제대로 미친 놈들 같아.’

‘씨발. 이딴 게 성도냐!’

수도사는 양팔을 힘차게 벌치며 그늘 한 점 없는 순수한 눈망울로 두 청년을 바라보았다.

“형제님들, 기억하십시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삶의 시작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죽게 되면 영원한 삶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형제님들의 권세는 천상의 군주께서 지닌 것에 비하면 비천하기 그지없으며, 그것마저도 죽고 나서 사라질 미약한 것입니다. 항상 겸손하십시오!”

방긋 웃으며 성호를 긋는 수도사를 보며 아르투르는 도망치듯 서둘러 떠났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를 할 이유가 없었다!

“저 새끼들 눈빛 봤어? 이 새끼들은 『진짜』 야.”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자 아르투르는 레오폴트에게 질겁한 채 말한다.

“완전한 미치광이 들인 건 인정을 해줘야겠네. 왕궁에서 정치하는 놈들이나 어떻게 빌어먹으려고 수작부리는 놈들이랑은 궤가 전혀 달라. 저런 놈들을 만나면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까?”

“뭐긴, 시발, 튀어야지.”

“아무래도 튀긴 그른 것 같군.”

레오폴트의 한탄에 눈앞을 바라보니 금실로 수놓아진 굉장히 화려한 의복을 입은 노인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의 뒤편에는 또 다른 수십 명의 고위 성직자, 다시 말해 나이 든 사제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신을 향해 목례했다.

“오오! 보라! 나의 아들이 마침내 나를 방문해주었구나! 이 어찌 기쁜 날이 아니겠느뇨?”

노인은 감격한 미소를 지으며 아르투르에게 뛰어왔다. 치렁치렁한 로브가 발에 걸렸지만 꾸역꾸역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아르투르는 당황하면서도 잽싸게 다가가 교황을 부축했다. 만약 이 노인네가 넘어져서 뼈라도 한 군데 나간다면 삽시간에 교황을 다치게 한 망나니가 되는 것이었다!

“교, 교황 성하! 체통을 지키십시오!”

서둘러 달려온 아르투르가 교황을 부축하자, 그는 메마른 뺨으로 눈물을 흘리며 아르투르를 얼싸 안았다, 정확힌 안으려고 발을 들어 올려도 닿질 않아 아르투르가 몸을 낮추어주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만나는 데 체통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와주었으니 모든 게 안심이다!”

계속 감격의 눈물을 쥐어짜내는 노인을 보며 아르투르는 직감했다. 이 노인네,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닐 거라고 말이다. 아르투르는 이 교활한 노인의 뺨을 때리는 상상을 하면서, 교황이 연출하는 일단의 연극에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주변의 모두가 감격할 법한, 혹은 일부러 감격해줄 수 있을 정도의 부자 상봉이 이어졌다. 교황은 아르투르를 아들이자 유력한 귀족으로서 크게 예우했으며, 아르투르도 영적인 지도자인 교황을 공손히 모셨다. 두 권력자 사이에 있는 노골적인 적대감과 긴장감은 이런 공개적인 연출로 교묘히 가려졌다.

이 모든 행동은 관객들을 속이기 위한 철저히 계산된 연극이었다. 서부 대륙의 누구도 기사와 성직자가 싸우는 혼란 상황을 바라지 않으니, 그들은 관객들을 안심 시켜줘야 하는 역할이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서로 장단을 맞추어가며 덕담을 주고받았고, 구체적인 약속 없이 뜬구름 잡는 공허한 약속만을 나누었다.

환영 행사가 끝나자 교황은 아르투르를 자신의 알현실로 초대했다. 이제 가면을 집어던질 차례였다.

***

교황의 알현실은 백색 교회의 한켠에 있었다. 귀족 가문들은 혈연으로 이어진 선조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장식을 하지만, 교황청은 옛 사도들과 성인들을 다루었다.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들이 아르투르를 맞이해주었다. 하나 같이 절로 미술의 가치가 느껴지는 완벽한 것들이었다.

‘빈민들 구휼한다고 세금을 가져가더니, 다 여기에다가 투입했나 보군. 낭비되는 돈이 왜 이렇게 많아?’

못마땅하게만 보던 아르투르의 시선을 잡아끈 건 천장 벽화였다. 거대한 성당의 돔 전체를 감싸는 그림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풍경을 주었다. 벽화에는 불을 뿜는 검은 용과, 용을 해치우기 위해 검을 치켜든 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서부 대륙을 지배하는 신앙, 용살자 발타리아의 신화였다.

“아름다운 벽화이지, 그렇지 않은가?”

옆에서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르투르는 벽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왼편에는 지옥 불에 불타는 죄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자네는 저 그림을 두려워 할 필요 없네. 교회의 비호가 함께 하니까. 죽은 뒤에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갈 거야.”

“두려운 게 아니라 저 그림에서 좀 거슬리는 게 있군요.”

“?”

“용의 혀는 저렇게 뱀처럼 길지 않습니다. 날개도 훨씬 커서 자신의 몸집 두 배 면적이 넓습니다. 그러니까 저 그림은 잘못 그려진 겁니다. 화가를 다시 부르셔야겠습니다. 성하.”

“!”

교황의 눈이 놀라움과 의심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마치 용을 보았던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네. 직접 제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성하께서는 직접 이 풍경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르투르는 뒤돌아서 교황을 단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꿈을 꾸며 받은 계시에서 본 적이 있네.”

아르투르는 재차 날카롭게 공격했다.

“직접 보신 것은 아니로군요. 그랬더라면 저 벽화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겠죠.”

교황은 여유롭게 웃어보였다.

“계시를 해석할 때는 비유와 상징을 잘 이해해야만 한다네. 실제로 용이 어떻게 생겨먹은 지와 계시를 통해 보여 지는 모습이 다를 수 있어. 그건 당연한 걸세. 게다가, 자네가 본 용의 모습이 진짜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가?”

“저는 성검을 통해 직접 계시를 받았습니다.”

“갑옷을 종잇장처럼 벤다는 자네의 검은 성유물일 수도 있지만 그저 잊힌 고대의 마법검 일수도 있지. 오‘데르만 왕가의 비밀 창고에 그런 검이 몇 자루쯤 있다고 한들, 대왕이 승하하시면서 그분의 총애하는 사생아에게 한 자루 쯤 건네주었다고 한들 무엇이 이상하겠나?”

지금 교황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떠보고 있었다. 아까의 천진난만한 행세를 하던 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름기가 가득한 눈매는 무척 예리했으며, 느껴지는 정신력은 아주 강인했다.

“왠지 말장난처럼 들립니다만. 직접 제 성검이라도 받아가서 연구해보시겠습니까?”

“잠깐만, 그건 나중에 해야 할 이야길세. 권력 배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지. 성유물의 해석은 순전히 교회의 소관이지, 자네가 마음대로 성검이니 아닌가를 선포할 화제가 아니라는 걸세.”

희미한 미소를 짓는 아르투르.

“권력 배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전에 누가 정말로 신의 뜻을 대신하고 있는 지를 따지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교황 성하?”

작게 신음하는 교황.

“음. 교회의 영역을 침범하겠다는 거라면 그만 두게. 자네 아버지도 그건 못한 일이거든. 어차피 누가 신의 대리인인지는 인간은 알 수 없는 법이야. 그렇다면 사람들이 신의 뜻을 대신한다고 믿는 쪽이 그렇게 되는 거야. 아무리 자네의 명성이 높아도 교회의 영향력에 비할 바는 못될 걸세. 함부로 넘보진 말게나.”

아르투르는 방긋 웃었다.

“아, 바로 그 점 말인데요. 제가 아는 신께서 성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 군요.”

교황은 신랄하게 비꼬는 어조로 답했다.

“허. 자네가 신의 말을 듣는다고? 기사왕도 모자라 이제는 예언자 왕까지 겸할 건가?”

“제가 중간에 끼어서 입장이 좀 곤란하군요. 두 분이서 직접 대화하시죠.”

아르투르가 성검을 뽑아들며 나는 서슬 퍼런 소리가 나자, 대기하던 근위병들이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성하!”

그들은 곧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눈앞에서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 한 자루가 빛을 내뿜으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황금빛 속에서, 녹색 광채를 내뿜는 신성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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