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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74화 (17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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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에 도착한 아르투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백색 성벽, 백색 도시, 백색 교회. 성도는 교회의 심장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우아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찾아, 내세의 구원을 향해 이 영원의 도시로 몰려왔다.

‘대단하긴 하군. 온 세상 사람들이 마음 속의 고향으로 여길 법한 장소야.’

일행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작 교황청으로 다가갈수록 보이는 모습은 달랐다. 순례자들은 거지꼴을 하고 있거나, 그냥 거지가 되어서 길바닥에 눌러앉아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행인의 팔을 붙잡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달라고 사정하곤 했다. 그러나 아르투르 일행에게 다가올 간담을 지닌 자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호객 행위를 했다.

“나리! 선행 좀 하십시오! 복 받으실 겁니다!”

“이게 성인의 엉덩이 뼈입니다! 댁에 놓아두시면 부인께서 순산을 하고 역병을 막아줍니다!”

“오오! 위대한 기사시군요! 왕이 되실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발타리아께서 쓰시던 창을 사십시오!”

아르투르는 그들을 한번 쓱 살핀 후 빠르게 지나쳤고 기사들은 걸인들을 비웃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쫓아오며 호객 행위가 계속 되자, 성질이 난 힐데군드가 검을 뽑았다.

“콱, 씨. 안 꺼져?”

그들은 검이 칼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만 듣고도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자기네들끼리 순례자를 탄압한다니 뭐니 했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아우성이었다. 거지들의 구걸판을 지나자 이번엔 혼란스러운 시장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부 대륙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의 사투리로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차라리 순례 여정에 필요한 생필품이나 승용 짐승들을 파는 상인들은 나았다. 아예 처음부터 순례 따윈 관심 없이 노점상을 할 생각으로 한 보따리 가져온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일 년에만 수십만 명이 성지 순례를 다녀오니까, 장사하는 데 이만한 곳이 없네요? 유동 인구가 많으니까요.”

아르투르는 결코 독실한 신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려서부터 교황청의 경건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었다. 그는 실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황 성하는 왜 이런 걸 방치하신 다냐? 이건 성도가 아니라 장사꾼 판이잖나.”

현지 주민들도 이를 꾸짖기는커녕 나무나 돌로 깎아 만든 조잡한 세공품들을 팔고 있었다. 아니면 어디서 도굴해온 지도 모를 해골이나 낡은 무기를 가져다가 성유물이라면서 팔아먹었다. 그런데 그걸 또 좋다는 사가는 멍청이들이 있는 거 아닌가!

“이거 다 뒤집어엎어버리고 싶은데 말이야.”

카밀은 이 광경이 퍽 마음에 드는 지 털털하게 웃었다.

“나리.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겁니다. 순례자들도 사기인거 알면서 사는 거지요. 자긴 나름대로 기념품 챙겨가서 좋고, 현지 주민들이야 돈 벌어서 좋고, 상부상조 아니겠습니까?”

“끄응. 옛날 성질머리 같았으면 몽둥이로 다 패서 내쫓았을 걸세. 여기가 성돈지, 장사판인지.”

아르투르가 한숨을 쉬며 계속 걷자, 한 무리의 기사들이 일행을 맞이했다. 흰 태양이 그려진 문장을 쓰는 걸 보니 교황청 직속의 수도기사회, 사도기사단이었다.

“백인을 벤 아르투르 공 되십니까?”

“그렇다만.”

선임자로 보이는 수도기사가 앞으로 나서 경례를 했다. 그의 행동과 말 한마디에는 아주 절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달리 말하면 정말 무뚝뚝하고 삭막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는 교황 성하께서 공을 호위하라고 보낸 사도기사단의 제 1검, 프란츠라고 합니다.”

“반갑네. 프란츠 경. 이름과 억양을 보니 중부 출신이구만. 내가 그곳 사람들을 좋아하네.”

프란츠는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태어난 고향은 저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같은 기사단원들이야말로 제게는 고향 친구들이지요.”

민망한 듯 웃는 아르투르.

“아하하. 그런가. 과연 독실하구만.”

프란츠는 아르투르의 일행들을 면밀히 살폈다.

“옆에 계신 분은 레오폴트 백작 각하시군요. 성하께서 두 분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성벽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잠깐, 그런데 지금 그 조신하지 못한 자세로 말을 모시는 아가씨는 어느 가문 분이십니까?”

프란츠는 아르투르의 뒤에 있던 힐데군드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 귀부인들은 말의 한쪽 다리로 다리를 모아서 탔는데, 가랑이를 벌리고 탄 것이 눈에 띈 모양이었다.

“지금 보니 무장도 하고 있군요. 신께서 남녀를 나누어두셨거늘 남자 행세를 하고 다니시니 실로 보기가 불경하군요. 어느 가문인지 대답하십시오. 그 가문의 가주께 고해야겠습니다.”

아르투르가 황당하게 그를 노려보는 사이, 힐데군드가 답했다.

“나아? 난 아버지가 누군지 몰라. 어머니는 어려서 죽었고. 참, 얼어붙은 계곡 출신이야. 너희 지도에 끝자락에 나오는 그곳 있지? 일 년 내내 눈이 내리고 멸종된 야수들이 살아가는 거친 곳이지. 괜찮은 출생 아냐?”

힐데군드의 도발적인 대답을 들으며 프란츠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재빨리 뒤편의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레오폴트의 기사들은 하등 이상할 게 하나 없었지만, 걷고 있는 북구인들을 보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네놈들, 옷만 우리처럼 차려입었지 신자들이 아니군!”

프란츠의 말에 그의 동료 기사들이 일제히 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북구인들은 한숨을 쉬었다. 혹시 몰라 현지에 맞게 꾸민다고 노력은 했지만 체구나 행동거지 때문에 너무 티가 났던 터였다.

“뭣들 하는 짓이냐. 당장 칼에서 손 안 때?”

아르투르가 굳은 표정으로 프란츠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프란츠의 눈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아르투르가 분노를 참으며 꾸짖었다.

“너흰 지금 왕을 대하고 있노라. 자중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대의 임무에나 충실하도록. 프란츠 경.”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쌀쌀 맞은 대답이었다.

“당신은 아직 왕이 아니오.”

“?”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왕이 무슨 왕이오? 이교도, 그것도 북구인들과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면 교황 성하께서 잘도 대관식을 치러주시겠군. 어찌하여 저 불경한 자들을 성도 앞까지 데려왔는지 해명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성하께 고하겠소.”

아르투르는 머릿속의 이성을 붙잡고 있는 끈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걸 느꼈다. 아, 분위기 좋다가 꼭 잡치는 새끼들이 있어.

“네놈에겐 어떤 해명도 없을 거다. 너는 일개 수문장이니 네 역할에나 충실해라. 비켜라.”

아르투르가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하자, 좌우의 수도기사가 할버드를 교차시켜 앞을 가로막았다. 양 측의 시선이 서로를 노려보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성도에는 오직 신자들만 들어올 수 있소. 이교도의 출입을 금하는 것은 성도의 오랜 법도요. 저 이교도들은 내버려두고 당신들만 들어오시오.”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내 친구들이며 왕의 호위병들이다. 그들을 가로막는 건 명백히 네 권한이 아닐 텐데.”

“나는 사도기사단의 제 1검으로서 성도에 위험이 되는 자의 출입을 금지할 권한이 있소. 그들은 내버려두고 오시오. 이건 부탁이나 권유가 아니오.”

처음에는 중재를 시도해보려던 케이도 프란츠의 강경한 자세에 뒤로 물러났다. 그가 위협을 한 이상, 기사의 명예가 걸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제 교황청의 규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좋다. 교황령에선 교황령의 법을 따라야지. 가서 성하께 전해라. 짐이 성도에 위험을 가져다주는 존재이기에 성벽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이야. 호위병들이 갈 수 없다면 짐도 가지 않겠다.”

몇몇 수도 기사들은 일이 너무 커지는 것을 느끼며 프란츠를 만류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세등등하게 아르투르에게 따지고 들었다.

“교황 성하를 기다리게 할 셈이오?”

“너는 시킨 일이나 잘해라. 가서 성하께 짐의 전언이나 전하도록.”

프란츠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끓어올랐다.

“당신은 정말 오만방자하군. 왕이 되어선 안될 자야.”

아르투르는 워낙 황당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일개 문지기가 외교를 위해 온 수장 급 인사를 막았다는 이야긴 듣도 보도 못했다. 고작 평기사 주제에 이딴 짓거리를 하지 말고 비켜서라. 네가 수도기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짐의 결투 신청을 받아야 했을 거다.”

그의 말에 수도 기사는 더욱 흥분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이곳은 성도고, 당신이 북구인 찌꺼끼들을 데려온 건 신에 대한 모독이오. 어찌 인간의 뜻 따위로 이리 오만하게 군단 말인가? 아니면 당신도 북구인 찌꺼기이기 때문에 그들을 감싸는 건가?”

아르투르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검을 뽑아라. 프란츠. 네 말에 책임을 져라.”

프란츠는 콧방귀를 끼었다. 다른 수도 기사들은 재차 말리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프란츠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그러지. 아무래도 신께서 누구 편인지 똑바로 알려주어야겠군. 오만방자한 자들이 성도 앞에선 겸손해야한다는 가르침을 얻게 될 거요.”

수도 기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한편, 아르투르 측의 사람들은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레오폴트는 상대가 무르기 전에 확정해야한다며 입회인을 자처했고, 힐데군드는 아예 배를 잡고 굴렀다. 그런 시선에 아랑곳 않고, 두 기사가 허리춤에서 칼날을 뽑아들었다.

첫 일격이 오가기 전, 아르투르에게 귀엣말이 들렸다.

-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라. -

- 고맙습니다. 여신이시여. -

아르투르는 손짓으로 상대를 도발했고, 그에 응한 상대는 기세를 드높인 채 다가왔다. 발놀림이 매끄러운 걸 보니 숙련자였다. 상대는 교묘한 교란 자세를 취하다가, 결국 우상단에서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놈이 택한 검로는 가장 위협적이고 신속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르투르는 상대의 검로를 너무 쉽게 읽어냈다. 숙련자 간의 대결에서 가장 피해야할 게 의도를 고스란히 읽히는 것인데, 상대는 너무 힘을 잔뜩 싣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가볍게 칼날을 틀어 적의 검로를 봉쇄하며 앞으로 칼날을 내찔렀다. 프란츠의 목 보호대가 조각나 비산했고, 놈은 바닥에 쓰러졌다. 힘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구멍이 꿰뚫려 죽었을 것이다.

“단 합을 못 견디는 얼간이가 말만 많군. 교황청의 근위 기사라고 겉멋만 잔뜩 들어선 말이야. 데리고 가. 얕게 찔렀으니 운이 좋으면 살 거다.”

다른 수도 기사들은 원망을 담아 아르투르를 바라봤지만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한 치도 없었다. 프란츠가 들 것에 실려 나간 뒤, 양측 진영은 서로 단 한마디도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아주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났다.

“성하께서 공이 이교도 호위병들을 데리고 도시로 입성하시는 걸 허락하셨습니다. 단, 이번 경우의 특례입니다.”

그러나 토르스탄과 북구인들은 조소하면서 중지를 들어 올린다.

“조까. 구경이나 한번 해보려고 한 건데 좆 같이 굴긴. 아르투르! 우린 장터로 가서 볼 일이나 보겠다. 일이 끝나면 불러라.”

반면 힐데군드는 아르투르의 뒤를 따랐다.

“난 들어가 보려고. 가죽 판 값은 너희가 알아서 챙겨주고.”

“하. 믿고 맡기는 거냐?”

그런 시시한 이슈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손짓하는 힐데군드.

“알아서 해. 티 나게 때먹으면 손모가지 날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긴 실랑이 끝에, 아르투르 일행은 마침내 성도로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성벽 바깥과 달리, 교황청 내부는 아주 고요하고,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득 풍겼다. 건물마다 종교적 상징을 자랑스럽게 새겨놓았고, 사람들은 발걸음소리도 조심했다. 상점들조차 문을 열고 조용히 영업을 할 뿐, 흔한 호객 행위도 하질 않았다. 아르투르가 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 있을 때, 교황이 기거하는 백색 교회의 종이 울렸다.

땡 - 땡 - 땡.

세 번의 우아한 종소리가 들리자, 도시의 온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무릎을 꿇었다. 도시 곳곳에서 생활을 이어가던 수도사들이 나타나서는 각각이 들고 있는 향로에 불을 붙이자, 하얀 연기가 올라왔다.

수도사들이 향로를 들고 다니며 기도문을 외우자 성도의 주민들은 소리 높여 찬송가를 불렀다. 신의 영광과 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경건한 노래였다. 성도 전체가 집단으로 황홀경에 빠져 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본 아르투르는 뼛속 깊이 스며드는 전율을 느꼈다.

“마스터, 보고 있으세요?”

기가 차오르는 아르투르의 말투.

“그래. 정신이 멎을 것 같구나. 여기, 성도에 사는 놈들은 대체 뭐하는 작자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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