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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73화 (17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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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일부러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교황령으로 향했다. 교황청을 존중한다는 정치적 표현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겨울에 농민들은 할 것이 없었고 뭐라도 즐길 거리가 있다면 모여드는 법인데, 자신들의 왕을 칭하는 자가 지나간다니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어떤 놈이 온다고 해서 다들 이렇게 난리여?”

“왕, 왕이 온다고 하잖아!”

“뭔 놈의 왕? 하여간 오면 상판이나 보자!”

“쉿. 이제 우리 주군이 되실 분인데 그렇게 말하다간 경을 치는 거여!”

지역 귀족과 주민, 지나가는 행상인들 모두 잔뜩 기대감을 지닌 채 아르투르를 기다렸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상적인 모습의 왕 한명 정도는 품고 있는 시대였다. 그들은 새로운 왕이 자신들의 삶의 고단함을 해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저마다 꿈꾸는 모습은 달랐지만 말이다.

그들에겐 다행히도 아르투르는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해줄 위대한 왕의 꿈을 걸기에 적합해보였다. 왕을 자칭하는 이 젊은 기사는 남자답게 잘생기며 위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낼 줄 아는 쾌남아였다.

아르투르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왕에 대해 들려오던 풍문을 믿기로 했다. 그는 홀로 백인의 도적을 토벌한 자였으며, 가장 비천한 농노를 위해 제후들과 싸우는 고귀한 자였으며, 싸우는 전쟁마다 영광스러운 승리를 일구어내는 불패의 지휘관이었다. 심지어 적들마저 포용하는 칭송해 마지않는 관대하고 자비로운 분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서 오십시오! 폐하!”

이런 기대감이 한껏 퍼지자 아르투르의 행렬이 나타나자마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르투르는 슬슬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나는 모든 이들마다 자신에게 이뤄질 수 없는 기대를 내비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자신은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한 채 그들을 친근히 대했다.

“우와, 저렇게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니 정말 왕답네.”

“뱃살만 나온 우리 영주님이랑은 다르제. 저 팔뚝으로 나쁜 놈들 머리도 깨부술 수 있다나벼.”

에쿠잘루스는 낯선 이들의 시선을 경계하며 신경질적인 눈빛을 드러냈기에 아르투르가 주의를 주어야했다. 레오폴트는 호위 기사들에게 일부러 고압적인 태도를 내비칠 것을 지시했다. 아르투르의 태도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를 부각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뒤따르던 북구인들은 아르투르가 내보인 관대함이 명성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목격하며 놀라워했다. 그들은 강하고 잔인할수록 명성을 얻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고, 아르투르의 행동을 내심 비웃던 자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곳 놈들은 배알도 없나보군. 영주라는 놈들이 칼 한번 맞대지 않고 무릎부터 꿇는단 말이야?”

토르스탄이 불만스럽게 말하는 반면, 힐데군드는 아주 흥미로워했다.

“그릇의 차이랄까, 그런 걸 느끼는 것 같은데?”

“그릇은 쥐뿔. 문명인 놈들은 거짓말 속에 살아가니까 저러는 거다. 진정한 전사라면 아무리 강한 상대더라도 한번은 싸워보고 승복을 해야지.”

한편, 두라노에서부터 아르투르를 따라온 방랑 기사, 시라노는 이 모든 광경을 자신의 일지에 기록했다. 아르투르가 대단한 인물인 건 이미 알았지만, 정말로 왕위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자신은 새로운 왕조의 시작과 함께 하는 진귀한 경험을 한 것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날도 똑같이 어느 마을을 지나치던 시점이었다. 평민치고 괜찮은 옷을 차려 입은 노인이 나타나 아르투르 앞에 고개를 숙였다.

“나리!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마을을 대표하는 촌장입니다. 청원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기사들의 왕, 아르투르 공이 맞으시지요?”

아르투르는 쾌활히 웃으며 답했다.

“제대로 찾아왔네. 이제는 자네들의 주군이 될 사람이지. 무엇이든 원하는 걸 청해보게.”

“저희 마을에 심각한 분란이 생겨서 정리를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여태껏 저희 마을에는 섬기는 주군이 계시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분쟁이 생기면 가장들의 회의를 통해 마을을 이끌어가기로 했습니다. 덕분에 저희 마을은 오랫동안 조화롭게 잘 살 수 있었지요. 부족한 것이 있다면 서로 조금 나누고, 원하는 게 있다면 양보해가면서 말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마을에는 굶주리고 헐벗는 이가 하나 없습니다.”

아르투르가 슬쩍 마을 사람들의 행색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데,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따르지 않는 패거리가 나타난 겁니다. 심지어 그놈들은 가장도 아닙니다. 그들은 마을 어르신과 부모님의 말도 무시한 채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싫어하는데, 이들을 엄히 꾸짖어 장로회의 말에 따르게 해주십사 합니다.”

레오폴트는 콧방귀를 끼었다.

“그런 건 네놈들이 알아서 해결 할 문제지, 국왕에게 가져올 문제가 아니다.”

“예에… 나리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만… 그놈들이 워낙 말을 안 들어먹어서요. 혹시라도 폐하께서 말씀해주시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 감히 청을 드려봅니다.”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자. 그 패거리들을 불러와라.”

그리하여 약식 재판이 열렸다. 마을 회관의 탁자에 아르투르 일행이 앉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패거리를 이룬 청년들이 불려왔다. 불려온 청년들은 일곱 명이 넘었다. 그들의 눈빛을 보니 서로 간의 유대가 단단해보였다.

“촌장이 자네들이 마을의 합의 사항을 따르지 않는다던데? 아버지 말도 듣지 않는다면서?”

그들 중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서 정확한 예법에 맞춰 고개를 허리를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옷차림도 부티가 나고 살집도 제법 있었다.

“저는 물레방앗간지기 알베르토라고 합니다. 고귀하신 기사왕을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변호에 앞서 우선 폐하께 저희 입장을 고해도 되겠습니까?”

아르투르는 알베르토의 태도를 보며 흥미롭게 웃었다. 말투나 예법이 평범한 농촌 총각이 가질 수준은 도무지 아니었던 것이다.

“고해보아라.”

알베르토의 말을 들은 아르투르는 머릿속으로 사건을 정리했다. 우선 마을에서 방앗간지기는 빵을 제분할 때마다 사용료를 받는 특별한 지위였다.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재산을 모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방앗간지기가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지출을 해야 한다고 여겼다.

“장로회에선 새해맞이 잔치를 온전히 제 재산으로 열라고 합의했습니다. 자기 돈은 땡전 한 푼 낼 생각 없는 노인들이 말이죠. 제가 아버지로부터 물레방앗간을 물려받았다는 이유가 마을의 모든 행사를 책임 져야 될 의무가 되진 않습니다.”

“자네가 수중에 가진 돈이 많다는 걸 마을 사람 모두가 알아! 자네 부친께서는 너그러이 베풀어 마을 사람들의 인망을 사고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는데, 아들인 자네가 모든 걸 망치고 있어. 몰수당하지 않은 걸 다행인 줄 알아야지!”

알베르토는 기가 차서 듯이 말했다.

“뭐? 몰수요? 미쳤습니까? 이건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정당한 내 재산이란 말이오. 폐하! 제가 마을 장로회 따위의 말에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서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빈궁한 이웃을 도우라고도 되어있지!”

빈정거리는 태도로 답하는 알베르토.

“빈궁한 이웃이 신년 잔치는 어떻게 하오? 아버지는 호구처럼 순순히 따랐을지 몰라도, 내 재산을 당신들에게 그렇게 낭비할 생각은 없소!”

“이놈이 어디서 감히! 웃어른한테 말하는 말본새를 봐라! 네놈이 잔뜩 돈을 숨겨둔 걸 안다! 물레방앗간이 어디 네놈 혼자의 것이냐? 마을 모두의 것이다! 우리가 그걸 이용해주지 않으면 네놈도 부자가 못 됐어! 폐하, 저희 마을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던 건 모두가 아낌없이 베풀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가진 게 많다면 더 베푸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을의 조화를 깨뜨리는 저 천둥벌거숭이를 꾸짖어주십시오!”

“그 돈은 낭비할 게 아니야! 이번에 포도밭도 새로 만들고 일꾼도 고용해야한다고.”

알베르토의 친구들도 화난 얼굴로 삿대질을 하며 동조했다.

“이러니까 평생 촌에 갇혀 사는 거지! 언제까지 다 같이 깡촌에서 사는 데 만족할 거요? 지금삶이라고 해봐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것 아니오? 우리 마을에서 그나마 배우고 똑똑한 친구가 돈을 벌겠다는 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거머리마냥 빌붙으려 들지 마쇼!”

“대대로 너희 조상들이 살아온 마을을 깡촌이라고 부르다니! 이 패륜아 놈들 같으니라고!”

서로가 점차 목청을 높여가며 싸우던 차에, 케이가 크게 소리쳤다.

“모두 조용히 하십시오! 왕께서 보고 계씨지 않습니까?!”

그제야 두 집단은 씩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르투르는 고민해보다가, 쉽사리 답이 나지 않아 케이에게 손짓하여 귀엣말을 했다.

‘둘 다 타당해서 결론을 내리기 어렵구나. 시골 마을 정서가 어떤지를 알아야지. 보통 이런 경우에 어떻게 끝이 나느냐?’

‘이런 좁은 마을에서 사는데 가장 중요한 건 이웃 민심입니다. 평생 같이 부대끼고 살 사람들이라 서로 배려해야하거든요. 그런데 방앗간 지기가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걸 보니 바보거나, 이 마을에서 오래 살 생각이 없나본데요.’

아르투르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대충 판결을 내리고 갈 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교황과의 협상에는 국제 평화가 달려있었지만, 마을 신년 잔치를 누가 여는 지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지 않은가. 열던가 말든가 알아서들 할 것이지.

‘니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지나가면?’

‘별 일 아니고, 마을에서 패싸움이 나겠죠? 심해지면 칼부림이 날 수도 있고요.’

아르투르는 작게 신음했다.

‘음. 잔치를 누가 여느냐가 이곳 사람들에겐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문제가 된다는 말이지.’

대충 판결을 내려도 어차피 결과는 같을 터였다. 사건을 친 다음 멀리 도망치거나, 마을 사람들끼리 합심해서 입을 다물면 잡아낼 방도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론을 내린 아르투르는 촌장을 보았다.

“자네들이 원하는 건 마을이 원만히 지낼 수 있는 상태로 유지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청년들을 바라본다.

“자네들은 큰돈을 벌어서 이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고?”

“말씀대로입니다!”

“그럼 중재가 쉽겠군. 우선 물레방앗간은 시세보다 더 쳐서 짐이 구입하겠다. 알베르토, 자네와 친구들은 처분한 돈을 가지고 피오렌치아로 상경하게. 짐의 이름을 대고 왕비를 찾아. 자네들이 성실하다면 직분에 맞는 일거리를 찾아줄 걸세.”

알베르토는 고개를 크게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한편 마을 사람들은 물레방앗간을 왕이 인수한다는 말에 서로 수군거렸다. 비난의 시선이 촌장에게 쏟아졌다. 이건 동네 똥개를 잡자고 사자를 끌어들인 셈이 아닌가! 영주들은 백성에게 동전 한 닢이라도 더 뜯어내려는 족속들이었다. 왕이 사용료를 올리면 자신들은 꼼짝 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터 물레방앗간 관리는 장로회에서 하도록 하게. 이제부터 사용료는 받지 않겠네. 대신 신년 잔치를 열 때마다 왕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는 조건일세.”

촌장은 탄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성,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국왕 폐하 만세!(Long live the King!)”

눈치 빠른 누군가 소리치자, 다른 사람들이 잇달아 열창을 했다.

“국왕 폐하 만만세!

“아르투르 왕 만세!”

청년들, 원로들, 국왕은 각자 원하는 것을 가진 채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아르투르는 많은 곳에서 비슷한 종류의 탄원을 많이 받았으며, 그 때마다 일부러 무언가를 베풀어 해결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오히려 자신이 잔치라도 열어주었다. 어차피 피오렌치아의 금력을 손에 쥔 이상, 이런 소비는 지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푼돈으로 충성심을 살 수 있는 셈이었다.

아르투르가 교황청의 성문에 도달할 때쯤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국왕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아르투르는 “먼 곳의 영웅”이 아니라 “내게 은혜를 베풀어준 주군”으로 인식했다. 이 모든 변화는 사제들을 통해 누구보다 빠르게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그것이 정확히 아르투르가 원하던 바였다.

“백인을 벤 기사, 아르투르는 성하의 궁으로 입궐하시오!”

이제 왕좌로 가는 길은 완전히 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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