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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72화 (17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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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밖으로 나서며 두라노와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참주 루드비코가 눈에 띄는 학정을 벌여, 그를 처형하고 공화파를 집권시켰지만 그들의 통치도 결국 실패, 두라노는 내전에 빠져들었다. 이 혼란을 진정시켜보니 모든 배후에는 피오레 가문이 있었고, 결국 전쟁이 벌어졌다.

‘내가 두라노를 도왔던 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지. 빚을 갚으라며 전쟁을 일으킨 명분은 부당했고, 도시를 파괴하겠다는 전쟁 목표는 부도덕했다. 그걸 방치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끝낼 쯤에는 자신의 생각도 변해있었다. 평화를 이루려면 기사 한 명의 명예로운 행보로는 어림도 없었다. 결국 왕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그때였으며, 두라노 인들도 자신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왔었다. 그들의 지지는 여전할까?

접견실에 도착하자 두 남자가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부진 인상의 열정 넘치는 젊은이와 차분한 인상의 중년 신사였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두라노의 상징인 흰 탑을 그린 문장을 새겨두었다. 각각 조레스와 에렌이었다..

“위대한 레무리아의 왕을 뵙나이다.”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두 사람의 인사에 아르투르는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는 격식도 잊은 채 달려가 활짝 웃으며 에렌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현재 두라노의 거물급 정치인들로, 아르투르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조레스는 순박하지만 다부진 농촌 청년이었고, 에렌은 대장장이 조합의 길드장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고개를 들게. 우리는 같이 전선에 섰던 전우들이 아닌가! 우리끼리만 있는데 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

조레스는 바로 고개를 든 반면, 에렌은 오히려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아르투르를 보며 난처해했다.

“폐, 폐하. 이제는 주군이 되실 분인데 신하라면 언제나 존경을 가지고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체통을 지키십시오.”

아르투르는 그런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어 껄껄 웃으며 어깨를 두들겼다.

“아니야,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네들은 그럴 필요 없어. 다들 충성의 대가로 무엇을 줄 거냐만 따지지만 자네들은 진심으로 나를 따르러 왔잖나? 그런 사람들 앞에서 굳이 무게를 잡고 싶지 않네. 편히 있어. 편히. 그래야 내가 숨통이 좀 트일 것 같으니까.”

조레스는 농촌 청년다운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저와 두라노 인들은 영원히 폐하의 친구이자 충신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르투르는 에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언제까지 무릎만 꿇고 있을 건가? 일어나게!”

“예, 예엡! 폐하!”

“오늘 너무 오래 앉아있었어. 나가서 좀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세나.”

“알겠습니다! 폐하!”

저택 바깥으로 나오자 우아한 정원이 아르투르를 반겨주었다. 밤이 내린 하늘은 어두웠으며 서늘한 겨울바람은 바다 냄새를 몰고 왔다. 내려다보이는 피오렌치아는 실로 거대한 도시였다. 도심에 위치한 번화가는 야음에도 불이 꺼질 줄 몰랐다.

“정말 놀라운 도시입니다. 이런 곳에서 충성을 받아내셨다니 믿기지가 않는 군요. 그 강력하던 피오레 가문조차 통째로 삼킬 수는 없는 곳이었는데요. 실로 대단하십니다. 폐하.”

“운이 조금 잘 따라주었던 점도 있네.”

경탄 어린 눈빛을 보내는 에렌과 달리 조레스는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다.

“흐음, 무언가 못마땅한 게 있나보군. 말해보게.”

“저는 당연히 두라노가 폐하의 수도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는 기회도 주지 않으시다니요!”

시원섭섭한 조레스의 목소리에 아르투르는 경쾌히 웃었다. 반면 에렌은 얼굴이 시퍼래졌다.

“그게 폐하께 무슨 말인가! 좀 더 공손히 말해야지!”

조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르신. 폐하께서 먼저 물어보신 것 아닙니까. 물어보신 저의는 저희 진심을 알고 싶으신 겁니다.”

“그래도 이제는 왕이 되셨으니 이전처럼 편하게만 대해서는 아니되네! 몸과 마음에 모두 윗사람을 모시는 태도가 깃들어야지.”

“에이, 폐하는 사석에서 과도히 예의를 차리는 건 오히려 안 좋아하실 분입니다. 이번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 말대로 바로 충성을 맹세하러 오는 게 맞았지 않았습니까? 어르신 말대로 꾸물대다가 수도 자리가 피오렌치아 놈들에게로 넘어갔다고요! 완벽한 결정보단 제때 오는 게 중요합니다.”

“끙. 그건 자네 말이 맞았어. 내 인정하겠네.”

아르투르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네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가?”

이번에는 에렌이 재빨리 웃음 지으며 답했다.

“실은 폐하께서 왕을 칭하신 뒤에 저희 도시에서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폐하가 떠나신 후 가장 큰 갈등이었죠. 고성이 오가고 신발이 날아다닐 정도였습니다. 조레스 군과 제가 얼굴을 붉히면서 싸웠죠. 충성 맹세라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그렇지. 일이 이렇게 쉽게 진행될 리는 없었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한들 정치적 이득은 항상 별개였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입었더라도 주종 관계를 공짜로 맺어줄 수는 없는 게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아마 조레스는 의리에 따라 충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겠지.

“아, 그런 거였군. 잘 알겠네. 내 기분은 신경 쓰지 말고 말해보게. 나도 두라노에 그냥 충성을 하라고 할 생각은 없어. 무엇을 바라는가?”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영문 모를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예? 어떻게 저희 두라노 인들이 폐하께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미 진 은혜가 너무 많습니다. 시키면 시키시는 대로 해야죠.”

“그럼 대체 뭘로 격렬한 논쟁을 한건가?”

“조레스 군은 바로 가서 충성 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저는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니 폐하를 도울 수 있는 군대를 모병해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지원이 늦었던 겁니다. 제때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조레스는 목소리로 가득 높여 말했다.

“늦은 만큼 더욱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금 폐하의 뜻에 따르겠다는 두라노 청년 1만 명이 도로를 따라 행군해오고 있습니다. 저희 두라노가 수도가 되는 영광은 잃었지만, 왕의 깃발을 처음으로 들어 올리는 영광은 얻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안이 벙벙해진 아르투르가 되물었다.

“자네들 자치권은 필요 없나?”

강하게 고개를 저어 부인하는 두 사람.

“아닙니다! 저희는 폐하께서 직접 통치해주시는 쪽이 더 좋습니다. 그 편이 더 살기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권리라도 보장받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닌가? 말해보게. 내 기꺼이 들어줄 테니.”

“아닙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아니야! 말해보라니까! 내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다네! 다들 하나 정도는 쥐어주는데, 특별히 충성을 바치는 자네들이면 더 많이 챙겨줘야지!”

“저희는 폐하를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아르투르는 두라노 사절단과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두라노 시민들에게 감세 혜택을 내려줄 수 있었다.

***

두라노의 충성 맹세와 군대의 도착은 지정학적 상황을 급변시켰다. 아르투르는 레무리아의 여섯 자유도시 중 두 도시의 충성을 받고 있었고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군주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프레드가 교황청에게 행한 무력시위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누가 정말로 실권이 있는 지 보여줄 수 있던 것이다.

이제 아르투르를 대하는 모든 세력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속속들이 반가운 소식을 담은 서신들이 날아들었다. 수북이 쌓인 서신을 하나씩 열어볼 때마다 그들은 아르투르에게 충성을 맹세할 테니 어떤 것을 보장받을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해왔다.

아르투르는 그들이 편지를 보낸 시점, 가진 국력, 위상에 따라 각기 다른 답변을 보내고 중요 인물들의 서신을 검토했다. 첫 번째는 만프레드의 서신이었다.

- 남부의 세력들은 서로 반목하고 있습니다. 일부 세력이 군사적 보호와 공정한 재판을 약속해주시면 충성 맹세를 하겠다는군요. 방침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제 의견으로는 무난하지만요. -

잉크에 깃털 펜을 담근 후 답변을 쓱쓱 써나간다.

-일처리를 잘해주었군. 그들에게 남부의 법정에서는 남부 출신의 판사만을 임명하겠다고 전하게. 아직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대관식에 참석해서 충성을 맹세할 걸 권하게. 그리 하는 자들은 짐의 칙령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자치를 누리게 될 것이다. -

두 번째 서신. 피오렌치아의 레니에 남작.

‘아직 날 싫어하고 있을텐데, 뭐라고 써놨는 지나 볼까.’

- 피오렌치아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소도시와 마을들을 상대로 폐하의 통치가 안전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세율만 보장된다면 기꺼이 충성을 바치겠다고 합니다. -

‘역시 내가 사람은 제대로 보았군.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고, 필요한 일을 할 줄 알아.’

-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피오렌치아의 통치 시절에 비해 세금이 특별한 사유 없이 증액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하라. 짐을 실망시키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계속 충심을 보여주길 바란다. 레니에 남작. -

세 번째 서신. 샤를로트의 전언이었다. 그녀의 서신은 현황에 대한 종합적인 보고서였다. 요점은 이미 대부분의 자유 도시들은 아르투르의 즉위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우호적인 조건으로 왕국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의 인적 관계와 여러 공작 활동이 도움이 되었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자긴 여전히 쓸모가 있으니 약속을 지키란 거군. 그래. 이렇게 깔끔하게 일처리를 해주어야 기껏 정략결혼을 하는 의미가 있지.’

술술 보고서를 넘겨가던 중, 아르투르의 시선이 중간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세에도 불구하고 자유 도시 랑트리뷔아체와 타이라트 백작은 오히려 군대를 소집함으로서 지역에 불안정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군대를 토벌하여 군사적 우위를 다시 한 번 증명해주시면 폐하의 왕위에 이의를 제기할 이들은 누구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

랑트리뷔아체와 타이라트 백작 모두 레무리아 반도에서 힘 좀 쓰기로 유명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순순히 신하로 들어올 생각은 없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고 있었다. 샤를로트의 말대로 실력 행사를 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리라.

반면, 피를 보면서 통합하게 된다면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될 것이었다. 지금의 전략 구도에선 꽤 부담스런 일이 될 수 있었다.

‘레오폴트가 전하길 왕국의 내전이 끝나가고 있다고 했다. 큰형님의 승리가 확고해지면 내게 하이에버 사건의 책임을 물으시려 들 거야.’

아르투르의 머릿속 저울에는 두 상황이 올려졌다. 빠르게 반대 세력을 평정해서 빠르게 지위를 확보해낼 것인가? 아니면 조금 느리더라도 현지 세력들의 반감을 최대한 덜 사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할 것인가?

어느 쪽을 골라도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일장일단이 있는 결정들이었다. 한창 고민하던 아르투르에게, 네 번째 서신이 당도했다. 교황의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는 편지였다.

‘흠. 제때 원하던 답이 왔군.’

교황의 서신은 언제나 그렇듯 장황하고 권위적이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행간에서 교황의 조급함을 읽어냈다. 자신의 도움 없이도 자신이 레무리아를 장악할 수 있을지 몰랐던 것이겠지. 서신의 말미.

-…따라서 영적인 아들 아르투르는 즉각 교황청으로 와서 그대의 의무를 받들 준비를 하라. 그대는 기름 부어진 자로서 레무리아의 왕으로 대관하게 될 것이다. -

아르투르는 소리 내어 웃으며 서신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그렇지. 진즉에 이렇게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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