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71화 (171/248)

171

회의실 안.

“예?! 그러니까 저보고 성도 앞에서 무력시위를 하라고 명령하시는 겁니까?!”

만프레드의 목소리에는 놀라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손을 떨었다.

“어허. 무력시위라니. 짐이 어찌 영적인 아버지께 그런 불경한 짓을 하겠나. 짐은 자네를 무법 상태에 있는 남부 지역을 평정하라고 보내는 거야. 행군 중에 하루정도 성도 앞에서 야영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르투르는 달래는 말투로 이야기하며 시선을 보냈지만, 만프레드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음. 일만 명의 살기등등한 용병을 데리고 성도의 앞을 지나는데 그게 무력시위가 아니라 행군일 뿐이다. 그런 말씀이십니까?”

“아, 그냥 행군이라는데도!”

“그렇다고 치죠. 그런데 폐하, 용병들은 생각 외로 거친 놈들입니다. 부유한 성도를 보며 다른 마음을 먹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르투르는 도로 활짝 웃으며 만프레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참으로 유능한 지휘관이 아닌가! 병력 관리에서 실수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지? 짐은 자네가 용병 부대 전체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네!”

만프레드는 이 곤란한 명령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교황을 위협했다는 불명예를 쓰고 싶지는 않은데요. 저도 기사이자 이제는 제후입니다! 교회와 적대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폐하야 제 책임으로 넘기면 그만이지만, 제게는 계속 교황을 위협한 영주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을 거라고요.”

만프레드는 어쩔 거냐는 듯 아르투르를 바라보았지만, 왕의 표정은 태연했다.

“자네에게는 애초에 명예가 없었지 않은가! 교회도 이미 몇 번 털었는데 그런 오명을 쓰는 것이 어디 대수이겠나? 이런 일에는 자네가 적임자야!”

“아니, 그랬다가 파문이라도 당하면 어떡합니까? 예배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교회의 비난을 받게 될 텐데요.”

아르투르는 고개를 긁적였다.

“미안하네만 용병들이 언제부터 파문을 신경 썼는가? 나는 자네가 상남자인줄 알았는데 겁이 많구먼. 알겠네. 자네가 파문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힘을 써주지.”

만프레드는 계속 아르투르의 표정을 살폈지만 웃고 있는 낯짝이라 반발할 수도 없었다. 아, 이 새끼 치고 싶다.

“…교황께서는 천국문의 열쇠를 쥐신 분 아닙니까. 그분 눈 밖에 났다가는 죽고 나서 지옥행 일텐데요오,….”

“그것도 걱정 말게!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용병일은 그 자체로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야! 이미 더럽혀진 영혼인데 조금 더 더럽힌다고 달라질 게 뭐겠나! 어차피 자네는 믿지도 않는 지옥으로 갈 텐데, 기왕에 날 위해 좀 더 힘을 써주게!”

만프레드는 슬픔에 잠긴 척을 했다.

“저는 그렇다 치는데, 폐하의 영혼마저 더럽혀질 것이 두렵습니다.”

“걱정 말라니까? 짐에게는 성검이 있으니 따로 용서를 빌면 된다네!”

“으으으음….”

만프레드는 계속 말끝을 흐리며 대답을 늦추었다. 아르투르 역시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악명 높은 용병대장이라도 신은 두려운 법이 아닐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신이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한 상식이라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만프레드에게도 이건 넘을 수 없는 선이었던 건가. 마지막으로 제안해보아야겠군.’

“따로 보상금을 지급한다면 어떤가? 금화 30만 개를 주겠네!”

만프레드의 얼굴에는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이 보였다.

“아, 폐하, 제가 고작 돈 때문에 교회에 칼날을 들이댈 무뢰배로 보이십니까?!”

“60만!”

“…저의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르투르는 지독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알겠네. 90만으로 마무리하지. 더 이상은 안돼!”

만프레드는 어느 편이 이득이 큰 지 고려해보았다. 교황청을 위협했다는 불명예와 금화 90만 닢이라.

“보너스 10만개만 추가해주십시오. 폐하.”

만프레드는 이제 활짝 웃으며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그렇지, 이놈이 돈 되는 걸 거부할 리가 있나. 아르투르는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앞으로 자네의 주군이 명령할 때마다 돈을 따로 받을 건가?”

만프레드는 여유롭게 손을 내저으며 동전 모양을 만들어보였다.

“아아, 어찌 제가 그런 불충한 일을 하겠습니까! 저도 어지간한 건 왕명에 따를 것 입니다. 그렇지마는, 이 안건은 다른 제후들은 돈을 받고도 안 해줄 일 아닙니까. 하지만 저는 보상금만 주시면 왕명은 뭐든지 받들 것입니다! 남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일조차 말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충성심의 발로! 왕에 대한 진정한 봉사 아니겠습니까? 성의 표시만 하시면 됩니다!”

아르투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에라이, 이 탐욕스런 놈아. 금화 100만 닢이면 기사 오백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돈인데 그게 성의 표시냐?”

능글 맞은 미소를 유지하는 만프레드.

“에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저희는 다른 것을 택했을 뿐입니다! 폐하는 사후의 명성을, 저는 살아생전의 부귀영화를 말이지요. 폐하의 이름은 천 년간 숭상 받겠지만 전 십년 안에 다들 잊어버릴 겁니다. 게다가, 어차피 지옥 갈 놈인데 살아서라도 즐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만프레드가 고개를 조아리자 아르투르는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한 대 쥐어박으려는 충동을 이겨낸 아르투르는 차분히 숨을 쉰다.

“후우우우우. 그렇다고 치세. 금화 100만 잎에 10만 잎 더 얹어주겠다. 성도 앞을 지나는 만큼 군율에 엄격히 신경 써라.”

“호라! 역시 말이 통하시는군요. 그런데 저야 좋지만은 갑자기 이런 거금이 마련하실 수 있겠습니까?”

“옆 저택으로 가면 샤를로트가 업무를 보고 있으니 그녀에게 받아가게.”

“아, 예비 왕비님이 돈이 좀 많으시긴 하죠. 피오레 가문을 통째로 삼키셨으니. 그런데 돈에 민감하신 분이 이렇게 쓰시는 걸 안 좋아하실 텐데요.”

혀를 차는 아르투르.

“그 재산을 그냥 넘겨줬겠나? 어차피 샤를로트의 재산 절반은 지참금 명목으로 내가 관리하게 될 거다. 거기서 떼라고 하면 내어줄 거야.”

아르투르의 말을 들은 만프레드를 크게 웃었다.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군요. 직접 피오레 가문의 재산을 삼키면 현지 여론이 안 좋아질 테니 현지인을 내세워서 꿀꺽하신 다음, 결혼으로 흡수한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대단한 행보이십니다. 폐하가 꽉 막힌 명예에 미친 기사로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됩니다?”

아르투르는 얼굴에 불쾌함을 드러내며 만프레드를 노려보았다.

“너 아까부터 계속 까분다?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만프레드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고정, 고정하소서! 폐하! 제 말은, 폐하께선 실로 현명하신 분이란 거지요! 기사들에겐 명예를 따르는 진정한 기사로, 백성들에겐 애민 군주의 모습을 보이시지만 통치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분이란 말입니다! 칭찬입니다! 칭찬! 처음 뵈었을 때의 어리숙함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하기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스스로도 그때와는 많이 변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자네를 보며 느낀 게 많긴 하지. 줏대 없는 사람들이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더군.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걸 보았네. 나도 좀 변해야겠지.”

“흐음. 흥미롭군요. 보통 자부심 높은 도련님들은 거의 변하질 않다가 그대로 살다 죽거든요.”

아르투르는 냉소를 지었다.

“같은 사생아 출신끼리 도련님은 무슨. 난 언제나 왕궁에서 천덕꾸러기였다네.”

“어…. 그래도 어지간한 귀족보다 대우가 좋으셨을 텐데요.”

“이 새끼가 자꾸 까부네?”

아르투르가 의자에서 일어나 만프레드를 붙잡으려 들자 그는 황급히 뒤로 돌아 도망쳤다.

“고정하소서! 폐하! 아무튼 보상금의 지불을 약속하셨으니 바로 떠나겠습니다! 명을 받잡아 무력시위……가 아니라 남부의 질서 회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저는 돈만 주시면 뭐든 하는 잡놈 변경백입니다!”

만프레드가 허겁지겁 알현실을 떠나자 아르투르는 화난 척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저런 놈을 변경백을 시켜줘도 되나 싶다가도, 그 능력을 생각하면 결코 버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만프레드와 샤를로트만으로도 이렇게 피곤한데, 봉신들이 많아지면 골 때리겠군.’

왜 아버지와 삼촌이 빨리 늙어 갔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만프레드에 대한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변했다고 했나?’

자신에게 문득 기사 서임을 받을 때의 맹세가 떠올랐다. 많은 맹세가 있었지만 큰 것은 세 가지였다. 용감하게 적들을 마주하고, 명예를 목숨보다 귀히 여기며, 신과 정의 앞에 항상 진실하기로 했다.

지금의 자신은 어떤가?

‘항상 진실하기로 했던 맹세는 깨졌어. 교회를 보호하기로 한 기사가 교황청에 무력시위를 하고 있고, 내 이름은 숨기고 있지. 지금 내가 하는 건 정치적 협잡, 그 자체 아닌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아마 자신을 규탄하며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꽉 막힌 녀석이었다. 지금 이 구도에서 그런 식으로 일을 키워봐야 모두에게 좋을 게 하나 없건만. 아르투르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수염이 꽤 자랐군. 몇 일간 너무 바빠서 면도도 못했군.’

….

아르투르는 손을 들어 턱수염을 쓰다듬어보였다. 기사는 어릴수록 각광 받았다. 젊은이 일수록 혈기가 넘치고 강건한 했으니까. 그게 남자다운 것이고, 기사다운 것이었다. 젊은 기사가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는 건 그런 까닭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왕들은 노회한 중년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던가? 젊어 보이는 왕은 경험이 부족하고 경솔해보일 뿐.’

자신은 스물 둘, 이제 스물 셋으로 넘어가니 성년이 열여섯 살인걸 감안해도 아주 젊은 편이었다.

‘좀 노련한 인상을 주려면 턱수염을 좀 길러야겠어.’

똑똑-

“마스터, 쉬시는데 죄송합니다만, 새로운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긴급한 용건이라는군요.”

그런데 최근 일 때문에 침체되어있던 케이의 목소리가 웬일로 밝았다.

“내일 아침 식사를 하며 이야기하자고 해라. 오늘은 운동이나 좀 하고 자야겠어. 너무 피곤해.”

“이번에는 머리를 전혀 안 쓰셔도 되겠는데요. 두라노에서 오신 분들이거든요. 바로 충성맹세부터 하겠다고 합니다.”

아르투르의 목소리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당장 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