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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단순히 세력이 강한 사람이 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부 대륙에서 왕권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었고 따라서 신의 뜻을 받들고 있다는 점을 어떤 식으로든 증명해야했다. 지금 각 세력들이 보내오는 말의 요지도 그랬다. 네가 강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네 신하가 될 이유론 부족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는데 호응이 잘 따르질 않는군. 이렇게 된 이상 교회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나.”
케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애초에 대관식은 성하께서 주제하시는 게 아닌가요?”
“그건 똑같은 절차지만 이미 나를 왕으로 추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뒤에 대관식을 치를 경우와, 지지 세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대관식을 치를 경우에 권력 구도가 달라지겠지. 지금 대관식을 치른다면 교회 쪽으로 넘겨야 할 게 많아지겠지”
그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눌 때, 회의실로 샤를로트가 들어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폐하.”
“어서 오시오. 그대에게 사절들을 다시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었지. 당신 수완이라면 잘 해냈을 거라고 믿겠소.”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폐하를 왕으로 모실 확실한 정당성이 있기 전에는 따를 수 없다고 하더군요. 굉장히 완고한 입장입니다. 회유도, 위협도 소용이 없더군요. 본국 쪽으로 직접 연락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투르는 차분하게 되물었다.
“각 세력이 다들 입장이 다를텐데 개별적인 협상이 통하지 않았단 말이오? 당연히 일찍 합류하는 쪽이 향후 권력 구도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게 될 거란 점을 이야기 했을 테지. 분명히 당신이 민간 여론은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 했잖소. 게다가 외교 무대는 당신의 장기고.”
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걸 해보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물론 누구도 왕으로 섬기고 싶지 않은 게 그들의 속내일 수도 있지만, 폐하에게 정면으로 거역할만한 세력은 몇 되지 않지요. 제 의견으로는…….”
샤를로트는 말을 흐리자 아르투르는 손짓했다.
“계속하시오. 까다로운 상황이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주셔야지.”
“……이해관계가 다르던 세력끼리 한 목소리를 내는 걸 보니 필시 구심점이 있을 겁니다. 레무리아에 이토록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건 한 곳뿐이고요.”
아르투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교황청뿐이겠지. 대관식에 앞서 기선을 제압하시겠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지도를 바라보며 상황을 원점부터 재검토했다. 현재 서부 대륙의 정세는 간단했다. 서부 대륙의 모든 지역은 아버지가 세운 거대한 왕국으로 통일되어 있는 반면 레무리아는 수십 개의 자유 도시들과 봉건 영주들로 나뉘어있었다.
이들은 이웃한 이들과 첨예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어느 한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려고 하면 주변이 힘을 합쳐 견제하는 게 이곳의 전통적인 구도였다. 그리고 항상 강자가 나타나기 못하게 만들기 위해 직접 손을 쓴 것은 교황청이었다.
“교황청이 내게 왕을 해보라고 제안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비공개 서한일 뿐, 아직 정식으로 추대한 건 아니지. 그쪽 입장에서는 군주 한 명의 깃발아래 지역 전체가 통합되는 건 위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나.”
샤를로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투르는 표정을 굳혔다. 겉으로 보이는 교황의 권력은 평범한 공작 한 두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 조직의 수장이자, 신의 뜻을 받든다고 믿어지는 직위였다. 위대한 왕들조차 대하기 까다로운 상대인 것이다.
“음. 난처한 상황이군.”
지도를 살펴보니 대부분의 지역은 여전히 반발하거나, 조용히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되었든 정국의 반전이 필요했다. 교황은 자신에게 순순히 왕의 권위를 부여해주지 않고, 공식적인 약속이 아니었다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고립된 상황이었다.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데, 상황이 쉽게 따라주지 않는군.’
다시금 샤를로트가 말을 건네왔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건 교회의 가르침과 구휼입니다. 사절을 보내 성하께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한번 들어보시죠. 교황 성하가 주제할 대관식만이 이 모든 반발을 흩어버릴 수 있습니다.”
일행들이 입이 근질거리는 지 말을 덧대고 싶어 했지만, 아르투르가 손을 내저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표현하자 다들 침묵을 지켰다.
“아니. 그렇게 하지는 않겠소. 이제야 성하의 노림수가 좀 보이는군. 처음에 왕위를 제안하면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게 이상했었지. 그분에겐 말 잘 듣고 잘 싸우는 변견이 필요했던 게로군. 내가 정말로 왕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해서 왕위를 제안하신 것도 아니고 말이오.”
아르투르는 자신의 순진함을 곱씹으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정치 세계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 교황은 대관식에 앞서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먼저 서신을 보내 입조하겠다고 말해라. 그러면 은총을 베풀어 줄테니.
샤를로트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능숙한 외교관답게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 편인가? 교황과 친밀한 사이지만, 동시에 왕비 자리를 약속받았기 때문에 왕권이 강해지는 편이 그녀에게도 좋았다. 하긴, 샤를로트는 샤를로트의 편이겠지.
“이제 아귀가 좀 맞는군. 당신이 하이에버에서 굳이 날 찾아온 건 교황청을 대신해서 왕국의 계승 전쟁을 더 복잡하게 만들 기회를 찾아서였군. 내전 끝에 큰형님이 승리를 거두면 한 명의 군주가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상황이 되니까, 교회의 독립을 지켜야하는 교황청의 입장에선 큰 악몽이 되는 거겠지.”
아르투르는 교황이 참 교활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의 늙은 정치가들은 길고 오래 볼 줄 알았다. 자신을 포장하는 데도 선수라더니, 이런 의미였던가. 조금만 정략을 아는 자라면 교회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신자들의 안위라는 대의를 위해 일한다고 믿었다.
“그 뒤에 내가 명성을 얻은 건 성하께는 굉장히 기쁜 일이었겠어. 명예에 심취한 기사를 다루는 건 간단하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성검을 가졌다는 건 전설쯤으로 간주하셨을 것이고, 아마 적당한 왕관 하나 씌워주신 다음에 실권을 장악하실 생각이었겠군. 당신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골비고 명예만 쫓는 기사라, 허수아비 왕으로 적당해 보이는군. 지금껏 내가 한 생각이 맞소?”
샤를로트는 고개를 슬쩍 숙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말씀드리긴 송구하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성하께서는 그런 취지로 왕위를 제안하셨고, 저도 개인적 흥미도 있었지만 페하를 얕잡아본 까닭도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만.”
아르투르는 팔을 괴며 냉소를 지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그건 거짓말 같은데?”
“아니요. 이제는 폐하가 왕국을 적절히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란 걸 믿습니다. 제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분이 아니라는 것도요.”
아르투르는 슬며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촌이 그러지 않았던가. 봉신들에겐 늘 적당한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아르투르는 일부러 표정을 구기고, 목소리를 끓게 했다.
“기분이 아주 엿 같군. 원래 그런 거라며 넘어갈 생각은 마시오! 당신들이 순전히 유리할 때 날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라면, 내가 유리해진 지금 당신들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겠소? 당신들에겐 날 막을 군사력이 없단 말이오.”
아주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는 샤를로트.
“그건….”
결국 그녀는 적당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 채 도로 고개를 숙였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어떻게 하면 왕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공연히 화를 내는 것 같아 미안하긴 했지만, 일은 일이었다.
“내가 현지 귀족인 당신과 약혼을 한 건 교황청과 현지 세력들을 존중하겠다는 신호였소. 아직까지 내 존중은 유효하오. 그러니 당신도 책임지고 그들이 나를 존중하게 만드시오. 당신도 줄타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제대로 내 편에 서는 게 좋겠지. 당신이 실패한다면 나도 다른 방법을 찾을 테니 그리 아셔야 할 거요.”
샤를로트는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물러나자 표정을 싹 바꾸면서 신뢰하는 참모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 방법에만 의존할 순 없겠지. 자네들 의견을 묻겠다.”
여태 입을 옴짝달싹하던 카밀이 먼저 말했다.
“제가 알기로 교황의 약속은 피오렌치아의 혼란을 정리하면 레무리아의 왕으로 대관해주겠다는 것인데, 맞습니까?”
“정확하네.”
“그렇다면 만프레드 변경백과 함께 교황청으로 군대를 몰고 가시지요. 교황청 앞에 군대를 진주시킨 후 대관식을 요구하면 바로 즉위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아르투르는 유쾌하게 웃었다.
“교회의 수장이 기거하는 성스러운 도시 앞에서 무력시위를 벌인단 말인가? 자네는 언제나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입장 아니었는가?”
카밀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아직도 저희 마을 사제 놈만 생각하면 이가 갈립니다. 교황이라고 해봐야 그런 놈들의 수장이죠. 귀족들은 싸움이라도 하지, 저놈들은 앉아서 경전이나 욀 뿐 제대로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주군. 결국 칼과 돈을 쥔 쪽이 진짜 우두머리입니다. 더 이상 주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하하. 자네는 다 좋지만 가끔 너무 모난 면이 있어. 더 큰일을 하려면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겠군. 이번 말도 취지는 좋았네만 조금 과해. 그래. 케이, 네 의견은 어떠냐? 완전히 울상인걸 보니 카밀과는 의견이 다른가본데.”
케이는 역시 걱정스런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게요. 제 고향에선 왕의 말씀은 몰라도 동네 사제님의 말씀은 다들 들었거든요. 왕이야 평생 얼굴 볼 일도 없지만 사제는 매일 보니까요. 게다가 영주 나리가 수탈하는 것도 막아주시고요. 교황 성하는 사제님들의 수장이시죠? 그럼 당연히 사제들을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민심은 얼마든지 나쁘게 만들 수 있겠는데요.”
카밀은 가당치 않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그건 저 꼬마가 좋은 마을에 살아서 그런 겁니다. 보통 다 같은 한 패입니다. 사제들은 민심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강하게 나가셔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셔야 합니다. 단 세 개, 안전한 국경과 공정한 재판, 낮은 세율만 있으면 민심은 얼마든지 잡을 수 있습니다. 세 가지만 이뤄지면 민초들에겐 가장 좋은 왕입니다. 다른 건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볼 게 분명합니다.”
질색하는 듯 케이는 새파란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 그게 아니라니까요. 험하게 사신 건 이해하는데 교회는 그렇게 무시할 집단이 못 되요. 마스터, 차라리 무력시위를 하시겠다면 교황청이 아니라 근방의 만만한 영지를 대상으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더 효과도 좋을 거예요. 성하를 상대로 무력시위를 하는 왕이 존경받을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껏 힘겹게 쌓아 오신 명예로운 평판에 해가 될 거에요.”
카밀 역시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이야말로 강경하게 나가야 하실 때입니다. 배포를 보여주시는 건 확실한 주도권을 쥔 뒤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왕비님이나, 레니에 남작이나 만프레드 변경백의 경우와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들은 주군의 밑에서 자신의 꿈을 이루려 들어온 거지만, 교황은 아예 주군의 위에 앉으려는 겁니다. 단호히 대처하시죠.”
“아, 아저씨! 그러면 뒷감당이 안된다고요! 지금 정치적으로 위기인거 몰라요?”
“어려운 시기일수록 강하게 나가야되는 법이다!”
차분히 듣던 아르투르가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을 멈춘다.
“두 이야기 다 일리가 있군. 절충을 하자고. 왕이 되기로 한 이상 마냥 착하고 명예로운 길만 갈 수는 없지. 교황청에 대한 무력시위는 예상대로 진행한다. 대신, 내가 아니라 만프레드 변경백이 대신 할 거다.”
“예?”
“그러고 내가 나중에 부하관리를 잘못했다면서 공식적으로 사과하면 그림이 괜찮군. 어차피 만프레드야 파렴치한 용병이라고 욕만 먹던 입장이니 잃을 명예도 없잖나.”
같은 시각, 신병들을 훈련시키던 만프레드는 귀를 긁적였다.
“누가 내 욕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