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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69화 (16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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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 후 수습이 이뤄졌다. 상인 귀족들 중 유난히 악명이 높던 자들은 목이 잘려 광장에 내걸렸다. 나머지 적대자들은 개인의 처신 및 이해 계에 따라 적절한 처벌을 내렸다. 여전히 피오렌치아에는 정리해야 할 여러 문제들이 잔뜩 남아있었지만 아르투르는 그런 복잡미묘한 일에 직접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

“믿고 맡길테니 성과를 기대하겠소.”

아르투르는 백지 위임장에 서명해서 건네주자 샤를로트는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맡겨만 주시지요. 폐하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8을 확실하게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오르마델로의 죽음은 레무리아 반도 내의 권력의 향방이 어디로 흘러 갔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피오레 가문은 완전한 몰락은 면했지만 힘을 샤를로트에게 완전히 잠식당하며 점차 적당히 위세 있는 상인 가문으로 떨어져갔다. 아르투르는 이제 본격적으로 판을 키울 생각이었다. 도로를 따라 소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제 각지에서 반응이 올 터였다.

***

“샤를로트 아가씨가 왕비가 되실 분이지만 통째로 피오레 가문을 삼키게 내버려 두신 건 좀 위험한 일이 아닐까요. 사실상 주군을 빼면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버릴 텐데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케이는 아르투르에게 물어왔다.

“일부러 2인자 자리를 차지하게 놔둔 거다. 어차피 레무리아에는 상업 세력들이 많아. 그들은 금전의 가치를 높이 여겨 나와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은 유용할 수 있겠지. 그러니 이치에 밝은 사람을 동맹으로 둬서 관리하는 게 나아.”

“그렇다고 굳이 결혼까지 하실 건 없던 것 아닐까요? 분명히 능력 있는 분이지만 마스터를 더 사랑하는 분이나, 마스터가 더 사랑할 만한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케이는 불현듯 아르투르와 연이 있던 여러 여자들을 떠올렸다. 사랑 없는 결혼은 귀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정을 꾸리고 후사를 두는 건 당연한 의무였기에, 혹은 이득을 볼 수 있기에 결혼하는 사례는 양치기들 사이에서도 흔했다. 그러나 아르투르 같은 입장이면 완전히 이야기가 달랐다. 자신의 마스터는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들이 선망할 법한 완벽한 신랑감이었다. 욕심을 조금만 내려둔다면 둘 다 가져갈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항상 눈치가 빠르구나. 케이. 맞아. 별로 사랑이 깊은 결혼은 아니지. 그러나 왕국의 안정과 번영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래도 아내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두는 게 마스터의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요.”

아르투르는 익살맞게 웃으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결혼은 정략적으로 하고 사랑은 결혼 생활 바깥에서 구하면 된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마라.”

“네. 그러면 돼…….아니, 뭐라고요? 마스터? 외도라도 하시겠다고요?!”

어깨를 으쓱이는 아르투르와

“안될 게 뭐냐. 서로 양해했으면 끝난거지. 원래 귀족들은 다 이러고 산다.”

당황한 케이의 표정이 대비되었다.

“아, 아니, 기사도 소설에 보면….”

“그건 소설이고 결혼은 현실이고 임마.”

***

“허어. 피오렌치아가 정말로 복속되었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놈들인데 근거지도 없는 방랑기사의 지배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피오렌치아 함락의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한 이는 레무리아의 실력자로 꼽히는 타에라트 백작이었다. 백작은 젊은 나이에도 벌써 다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그는 정견이 밝고 행동이 노련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따르는 자들도 많았다.

“본인이 말하기론 교황 성하께서 레무리아의 왕위를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교황청에서의 공식적인 선언은 없었습니다. 밀약의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한번 알아볼까요?”

고개를 젓는 백작.

“그럴 필요 없다. 정말로 피오렌치아를 손에 넣었다면 밀약을 시행할 것이고, 밀약이 없었어도 교황 측에서 응할 정도의 성과다. 중요한 건 정말로 피오렌치아를 장악한 게 맞느냐는 거다. 현지 민심은 약혼자를 들여서 얻었다고 치고 민주파의 반발은?”

보고를 하는 정보관도 터무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진짜입니다. 아예 민주파의 수장이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대가로는 남작위와 도시의 한시적 자치권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의 말에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을 짓는 타에라트 백작이었다.

“어떻게 그런 걸로 도시의 충성을 받아내지? 정말 그놈이 신의 축복이라도 받는 거냐? 젠장. 너는 당장 피오렌치아로 가라. 나는 교황청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겠다.”

***

거상들도 새롭게 주판알을 굴렸다. 유난히 소식이 빠른 그들은 교황과 아르투르 간의 밀약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어디 보자. 피오레 가문이 힘을 잃었고 피오렌치아의 새 지배자는 레무리아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묶기를 원한단 말이지.”

주판알을 빠르게 튕겨보는 자들.

“계산 할 게 뭐가 있나. 우리에겐 통합된 시장이 생기니 돈을 더 벌 일만 있는 거지.”

기뻐하는 자들.

“단순히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니야. 정말로 그가 왕이 된다고 해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필거란 보장은 없어.”

경계하는 자들.

“여러 제후 가문들을 놔두고 굳이 라이랜더 가문과 약혼을 발표한 이유가 뭐겠어. 최소한 적대하지는 않겠다는 의사를 내보이는 거지.”

***

아르투르가 피오렌치아를 점령한 경위에 대한 소식은 레무리아 전역으로 아주 빠르게 퍼졌다. 레무리아는 상업이 발달한 지방답게 잇속에 밝고 냉소적인 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아르투르의 명예로운 행보나 기적에도 눈곱만큼도 감동하지 않았다. 술집에 모여들어 근황을 주고받는 용병들이 특히 그랬다.

“금괴 기사단이 충성을 맹세했다고? 진짜냐? 나머지 용병대는?”

“같이 있던 용병대는 해산 후 흡수되었다나봐. 이번에도 만프레드 놈이 기가 막히게 동료들의 뒤통수를 친 모양인데.”

“하, 더 이상 용병 업계에 발붙이기 싫단 거야. 뭐야. 우리 용병 형제들의 우애를 배신해두고 이 업계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동료들이 그를 비웃었다.

“덜떨어진 놈아! 변경백 나으리가 용병일을 왜 하시겠냐? 그놈이 제때 용병 생활 청산하고 제대로 한 몫 잡은 거지. 저런 기사도 꼴통이 왕이 되면 우린 장사 어떻게 해 먹냐?”

술잔을 들이키며 자조하는 다른 용병.

“돌아갈 고향도 없는데 뭐 먹고 살아야 되냐? 산적질? 그놈은 혼자서 백 명씩 죽였다던데.”

“잠깐만. 친구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고. 만프레드가 어떤 놈이야? 오직 이득만 바라보는 진짜 용병, 돈 문제로는 의형제도 저버릴 수 있는 지독하기 그지없는 새끼 아니야?”

같이 술을 들이키던 동료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 새끼 이야긴 술맛 떨어지니까 치워! 이젠 업계 사람도 아니잖아!”

“멍청한 놈아. 잘 들어. 하이에나 같은 만프레드가 충성을 한다는 건 그만큼 대가가 돌아올 거라고 판단한다는 거야. 아르투르가 우리 생각보다 덜 꼴통일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차라리 지금 합류해서 한 몫 건지러 가보는 건 어때?”

용병들은 서로 눈을 마주친 후 의사가 같다는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실직자 생활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나을테니까.

***

“두라노의 해방자이신 백인을 벤 기사 아르투르 공께 타에라트 백작이 안부를 전합니다.”

아르투르는 팔을 괸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백작은 짐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

“타에라트 백작 각하께서는 폐하를 존경하시며 또한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질이 있다고 여기고 계십니다. 동시에 각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당성은 자질이 있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며, 충성심은 정당성만 갖춘 이에게 바치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사절의 말장난에 웃었다.

‘협상을 해보자는 거군. 좋다. 쉽게 굴복하는 자는 충성 역시 쉽게 내버리는 법이지.’

아르투르의 생각에 봉건 영주들은 다루기 까다로울지언정 서로 맹약한 바는 대체로 지키는 품위 있는 자들이었다. 사절과 아르투르는 길고 긴 심리전을 벌였다. 외교 협상이 다 그렇듯이 말이다.

“누군가 레무리아의 왕이 된다면 그분께서는 필히 수백 년 간 내려온 이 땅의 질서를 존중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선조들의 유산을 계승하지 않으면서 남들 위에 군림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왕인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대대로 살아온 방식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짐의 생각은 다르오. 왕의 통치는 오직 신과 정의 앞에서만 책임을 질뿐이오. 만약 왕이 예부터 질서를 존중한다면 그것이 옳기 때문이지, 오래 되었다는 이유는 아닐 것이오. 어떤 사람들은 변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내가 왕이 되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먼저 내게 협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저희 가문은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왕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따를 이유가 있나?

“짐에게는 이미 교황 성하께서 약속하신 왕으로서의 권리가 있소. 레무리아의 모든 영역은 짐의 주권 하에 있으며 타에라트 백작령도 예외가 아니오. 오히려 백작은 영주로 남기 위해 짐의 허락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란 말이오.”

지지 않고 답하는 사절.

“공께서는 그런 약속을 받으셨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물론 공의 명예를 의심하는 점은 아니지만 아직 교황청에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던 점을 유념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타에라트 백작과의 협상은 아주 치열했고, 간혹 격렬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사흘에 걸친 협상 결과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 공식적으로 공을 왕으로 인정하신다면 저희 가문도 대관식날 참석해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들이 제때 충성만 바친다면 가문 대대로 내려온 영지를 계속 다스릴 수 있게 허락해주겠소.”

적당한 타협이 이뤄지자, 이번에는 자유 도시 카니아와 랑트리뷔아체의 사절이 도착했다. 교묘한 어법과 우회적인 표현이 반복되는 지루한 외교 무대 속, 아르투르는 그들과 지구전을 벌이다가 본론을 던졌다.

“그래서 귀국이 짐에게 묻고 싶은 게 무언가? 요지를 말해다오.”

“알겠습니다. 기사분이시니 직설적으로 말씀을 드리지요. 두라노와 피오렌치아는 공에게 구원을 받았으니 왕을 섬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 도시를 비롯한 자유로운 영지들이 공에게 충성을 바쳐야하냐는 질문입니다.”

아르투르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느꼈다. 어차피 한번은 넘어가야 할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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