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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드의 몸에서 무엇인가가 번뜩인 순간 용병은 곧장 몸을 움직여 피하려했다. 하지만 어느새 졸음이 몰려와 평소보다 행동이 한 박자 느렸다. 그건 죽음을 일으키긴 충분한 시간이었다.
푹 - !
“커, 커흑.. 자, 잔에 수면제를… 비겁하게….”
만프레드는 냉정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피차 이런 직업인거 다 알지 않습니까? 얌전히 눈 감고 천당에서 봅시다. 그쪽 대원들은 최대한 챙겨보지요.”
만프레드가 단검을 빼내자 목구멍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스산한 소리가 들렸다. 이미 막사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단장의 공격을 신호로 금괴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고, 살육이 펼쳐졌다. 용병대장들은 숱한 위험을 거쳐 온 자들이었으나 등 뒤의 칼날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핏빛 파도가 몰아친 뒤, 현장에는 금괴 기사단과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소수의 용병대장만 남아있었다.
“네, 네가 선동해놓고… 우리를… 치다니….”
자신이 아르투르를 꺾고 말 거라며 큰소리치던 젊은 칼잡이가 손을 내밀어 만프레드의 발목을 꽉 쥐었다. 사력을 다해 쥐는 악력이 매서웠지만, 만프레드는 가볍게 발을 털어냈다.
“인마, 용병대장이 눈치가 없는 건 죽을죄야. 그 정도는 알고 들어왔어야지.”
“배신…배신자!”
푸샥 - !
장검이 젊은 용병의 등을 꿰뚫고 나왔고,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숨을 거두었다.
“패자가 말이 많군요.”
마일즈가 냉혹한 태도로 검을 뽑아들 때, 만프레드는 몸을 숙여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농민 출신이라 글도 모르고, 어리니 세상 경험할 시간도 없었겠지. 이런 놈들이 사연이 한 둘이겠냐. 뭐, 다 제 팔자지. 인생 그런 거 아니겠어.”
고개를 돌려 살아남은 용병대장들을 보는 만프레드. 그들은 왕을 모욕하거나, 음모를 꾸미지 않은 자들이었다.
“너희가 살아남은 건 눈치가 빠른 덕택이니, 내가 뭘 말하려는 지도 알 거라고 믿는다. 너흰 이미 다 왕한테 찍혔어. 그러니까 순순히 지휘권 내놓고 얌전히 낙향해. 여태껏 모아둔 재산이라면 여생은 풍족하게 지낼 거 아냐.”
용병대장들이 서로의 눈치를 볼 때, 만프레드가 계속 말했다.
“생활비가 모자라거나 일하다 생긴 원한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와도 좋다. 하지만 다시 군대를 일으킬 생각은 하지 마라. 오늘 너희가 왜 살아남았는지 기억하라고.”
날카롭게 그들을 째려보는 만프레드의 시선을 모두 피하는 가운데,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허탈한 표정으로 묻는다.
“내가 기른 용병단을 데리고 당신 밑에서 일할 수는 없겠소? 내가 젊음을 바쳐 일군 곳이란 말이오.”
만프레드는 손을 내저었다.
“형씨, 목숨 건졌으면 운 좋은 줄 알고 돌아갑시다. 내가 뭘 믿고 당신을 옆에 둬? 정 계속 칼밥 먹고 싶으면 왕을 찾아가서 기사 작위라도 달라고 하시든가. 그런데 이미 눈 밖에 난 당신들을 곱게 봐줄지는 모르겠군. 우리 왕은 상상 이상의 싸이코니까 알아서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결국 살아남은 용병대장들은 묘한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뒤돌아서, 금괴 기사단원들의 감시 아래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만프레드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잘 끝냈는데. 이 정도면 새 고용주에게 보고할만한 면이 선 것 같구만.”
피 묻은 칼날을 기름 먹인 수건으로 닦아내는 마일즈.
“고용주인겁니까. 주군이 아니라.”
만프레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주종 관계건, 계약 관계건 본질은 똑같아. 주는 만큼 받는 거지. 충성은 할 거다. 단 언제나 제 값은 받을 거야. 영주라고 해도 결국 금화 대신 작위와 영지를 받았을 뿐이고, 복무 계약이 종신일 분이야. 다들 우리 신조 기억하지?”
합창하듯 말하는 금괴 기사단원들.
“우리는 항상 대가를 받고 일하며, 계약도 지킬 수 있으면 지킨다!”
고개를 흡족하게 끄덕이는 만프레드.
“자, 그럼 병사들을 설득해볼까.”
다음날 아침, 각 용병단의 병사들은 자기네 막사 앞을 돌아다니는 금괴기사단원들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 기존 용병단은 왕명에 따라 전부 해산. 금괴기사단 신입 모집. 제때 월급 지급. 순직 시 유가족 돌봐줌. 불구가 될 경우 일자리 제공. -
용병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앞 다투어 금괴기사단으로 소속을 이적했다.
***
콰앙 - !
북구인 거한인 토르스탄이 휘두른 망치가 번개와 같은 굉음을 내며 저택의 문을 쳐부수었다. 그 뒤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와 최정예 전사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침입자다! 남김없이 죽여라! 다 쏴버려!”
핑 - 피핑 - 핑!
석궁 탄환들이 침입자들을 환영해주었지만 그들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제각기 최고급 판금 갑옷에 방패까지 들고 온 이상, 공성 병기가 아니고서야 유효한 원거리 타격 수단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거구의 흑인 경비병들이 달려들었다.
“뭐야, 얘들, 피부가 왜 이렇게 까매? 사람 맞아?”
힐데군드는 도끼를 던지려다 말고 신기한 지 눈을 껌뻑였다.
“그냥 빨리 죽여!”
아르투르의 외침에도 힐데군드는 설렁설렁 싸우며 상대의 전투 방식을 살피다가, 별로 특이한 게 없자 흥미가 식은 듯 목을 그어버렸다.
“얘네 덩치는 좀 큰데, 별 볼일은 없네. 근데 피부가 왜 이렇게 까마냐?”
아르투르와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하는 힐데군드를 뒤로 한 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동료 북구인들도 저택의 화려함에 입을 떡 벌리며 감상하다, 전리품을 기대하며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쓰러진 흑인 경비병에게 눈길을 때지 못한 채 툭툭 칼로 찔러보았다.
‘피도 나오고, 살점도 있고, 뼈도 있고… 이거 인간인가?’
“!”
획 -
어지럽게 얽힌 시체 사이에서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그녀는 간단히 쳐서 검을 저 멀리 날려보냈다. 그녀는 곧장 시체 더미로 손을 내밀어 공격자를 끄집어냈다.
“아악 - ! 놔, 놔주십시오! 전 싸우기 싫습니다!”
“뭐래. 먼저 공격해놓고는.”
힐데군드가 비웃으며 복부를 칼로 헤집어놓으려고 할 때, 그녀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넌 왜 이렇게 누르스름하게 생겼니? 너 사람 맞아?”
끌려나온 칼잡이는 소년이었는데, 자신들의 하얀 피부와도, 죽은 사람의 꺼먼 피부와도 달랐다. 이건 탄 피부도 아니고 안 탄 피부도 아니고 반쯤 타다 만 것 아닌가. 힐데군드는 신기해서 뺨을 때려보았다. 그러자 피가 터지면서 앞니가 깨져 나왔다.
“악, 악!”
신기한 듯 보는 힐데군드,
“피 흘리고, 이빨 뽑히는 거 보니 신체 구조는 우리랑 비슷하네.”
“저, 저도 사람입니다! 사람 맞아요! 쟤들은 태양에 너무 가까이 살아서 까매 진거에요! 피부 색깔만 다를 뿐이라고요!”
힐데군드는 소년이 애원하듯 말하는 모습에 더욱 흥미를 보였다.
“나도 이곳저곳 가봤는데, 너희 같은 애들은 본 적이 없거든? 좀 더 말해봐라.”
얼마간의 대화가 오간 후, 소년은 자신이 인간의 일종이란 걸 납득시킬 수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끝없는 모래바다가 나오는 거 아니었어? 거기 사는 애들은 너랑 다르던데.”
“저는 그보다 더 동쪽에서 왔습니다. 끌려온 거지만요….”
“흠. 동쪽에서 더 동쪽으로 가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다. 게다가 남쪽으로 항해하면 엄청나게 더운 나라들이 나오고, 이렇게 시커먼 인간들이 나온다는 거네. 다들 멀쩡히 눈 두 개, 팔 두 개, 다리 두 개, 성별 나뉘고. 맞지?”
“가끔 사람을 잡아먹는 악마 같은 놈들이 있긴 하지만, 정리하신 게 맞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툭툭 치는 힐데군드.
“내가 살던 옆 동네 애들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 걔들도 다, 먹고 살려고 그러는 거라니까?”
“…….”
“자, 네가 아는 걸 다 말해봐. 너희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산다고? 이야기가 마음에 들면 살려줄게.”
***
힐데군드가 이국인에 대한 흥미를 불태우는 사이, 기사들은 요새화된 피오레 가문의 저택을 자기 집 안방마냥 휘젓고 다녔다. 이미 샤를로트에게 매수된 내통자들이 자진해서 문을 열어주었고, 경비병들은 조금 싸워보다가 도망쳤다. 충성심을 세뇌 받은 노예 병사들은 분투했지만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러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 경호에도 좀 투자를 했어야지.”
레오폴트는 검을 휘두르며 빈정거렸다. 그와 아르투르는 적을 상대하는데 결코 두 합을 넘기지 않았고, 기사들은 두 사람을 전면에 세운 채 저택의 깊은 곳에 단숨에 이를 수 있었다.
“이 방이군.”
아르투르는 지쳐 있는 토르스탄에게 망치를 건네받은 후, 문을 거칠게 연타했다.
쾅 - 쾅 - 쾅!
정확히 세 번째 일격에 철문이 으스러지며 뒤로 넘어갔고, 아르투르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르마델로! 도망갈 곳은 없다!”
“나는 도망갈 생각이 없네. 젊은 왕이여.”
피오레 가문의 가주, 오르마델로는 아주 화려한 복장을 입은 채 창밖으로 어둑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음료가 담긴 유리잔이 들려있었다. 방 안에는 소란에도 태연한 늙은 하인이 한 명 있었을 뿐이었다.
“당신 성격이라면 끝까지 저항할 줄 알았지. 어쩐 일로 포기했나? 이대로라면 목이 잘릴 텐데.”
“이미 자네가 비밀 통로를 장악했는데 도망쳐서 무얼 하겠나. 그런데 대체 거긴 어떻게 알아낸 건가? 샤를로트는 물론이고 내 가족들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는데. 하여간, 여유를 좀 가지세. 젊은 왕이여.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의 권력자가 바뀌는 순간인데, 감상에 좀 젖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태평한 노인과 달리, 아르투르는 예리하게 노려보았다.
“그런 말은 내게 허튼 수작을 부리기 전에 했어야지. 그런데 말이야. 네가 무언가 숨겨둔 패가 있을 것 같거든. 네 목이 바로 잘리기 전에 그걸 보여주는 편이 좋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나?”
“피오레 가문은 음모로 도시들을 지배했지. 그런데 그런 곳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 했다고 보기엔 일들이 너무 어설펐거든. 길거리 싸움에 특화된 검객들을 보내 날 암살하려고 하고, 용병들을 고용해서 최후의 한 수로 쓴다? 누구보다 용병을 잘 알 당신이? 너무 이상하단 말이지. 자, 말해봐. 내 마지막 인내심이 소진되기 전에.”
아르투르의 말을 들은 오르마델로는 껄껄껄 웃어댄다.
“내가 수염도 자라지 않은 애송이에게 비웃음을 당하게 될 줄이야. 애송아. 지금은 온 세상이 네 것 같겠지. 모두가 널 좋아하고 널 따르겠지. 게다가 스스로는 정당해보이고 말이야. 하지만 너도 조만간 알게 될 거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배신하는 지, 욕망을 어떻게 정당화하는지 말이야. 꼭대기에 있다 보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지.”
“네 궤변이나 듣고자 물은 게 아니다. 당장 네 목을 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요구한 거지.”
아르투르의 조용한 경고에도 오르마델로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너는 젊고 강하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게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까? 처음에 너는 나를 보고 악마라고 했지. 인정한다. 나는 탐욕에 찌든 늙은 괴물이지. 그런데 우린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네가 한 건 동족 혐오지. 결국 너도 나와 같은 사람이다.”
점점 혼잣말에 가까운 주절거림으로 변해가는 오르마델로의 말을 들으며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그런 거 말고. 널 살려둘 이유를 대라고.”
“너도 결국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 말을 따라주지 않으면 심사가 뒤틀리는 심성의 소유자다. 내가 패배한 건 단지 늙고 노쇠해서지, 네가 옳아서가 아니야. 네 버릇을 봐라. 남들이 네 말에 따르지 않으면 칼부터 뽑고 보지 않느냐? 결국 너도 나처럼 될 거야. 누구도 믿지 못하고, 뭘 위해 싸우는 지도 알 수 없지만 권력에 취해 하루하루 연명하는….”
아르투르는 성큼 다가가서 오르마델로의 목을 붙잡고 번쩍 들어 테라스로 들고 나갔다. 노인의 발버둥은 아르투르에게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컥, 컥 -! 컥컥-!”
“아, 하나 깜빡할 뻔했군. 네가 죽는 이유 말이야. 너는 이 저택을 요새로 바꾸면서 공사에 참가했던 석공과 인부들을 모두 숙청 했었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말이야. 그런데 설계도가 나한테 들어왔어. 왤까?”
아르투르는 베란다 밖으로 오르마델로를 내밀었다.
“네가 죽인 석공의 아들이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 친구가 네게 전해달라더군. 보잘 것 없는 석공 집안이지만 아버지의 원수만큼은 반드시 갚는다고 말이야.”
아르투르가 손을 놓아버리자 오르마델로는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머리부터 떨어져 돌에 부딪치자, 피가 흥건히 묻었다. 아래층에 있던 카밀이 발로 차서 오르마델로를 뒤집어보고는, 손가락으로 X표를 쳤다.
“쯧. 흥분해서 죽여 버렸군. 광장에서 목을 쳤어야 하는데 말이야.”
아르투르가 피오레 가문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수평선 너머에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