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67화 (16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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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말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용병대장들.

“짐의 영토 내에서 비인가 무장 단체의 결성과 활동을 금한다. 기존의 무장 단체는 왕에게 허락을 받거나, 무장을 해제한 후 완전히 해산해야한다. 대관식 이후에 짐의 허가 없이 무장을 갖춘 집단은 소요 및 반란 혐의로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다. 칙령은 지금부터 효력을 발휘하며, 적용 범위는 레무리아 전역에 해당한다.”

문맹 용병대장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로 물어보았다.

‘비인가 무장 단체? 그게 뭐시다냐?’

‘몰라. 시발. 허락 받으란 거 아냐?’

결국 그들의 시선은 만프레드에게 향했다. 그는 기겁한 표정으로 왕을 보고 있었다.

“현명한 결단이십니다! 질서 확립을 위해선 불법 무장 단체가 난립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런데, 폐하, 칙령은 어떻게 시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걸 위해 자네가 변경백 작위를 받은 것 아닌가?”

“예?”

태연히 답하는 아르투르.

“짐은 이걸 무장 단체 금지 칙령이라고 명명하겠네. 어떻게 각 무장 단체들을 왕의 권위 하에 복종시킬 지는 자네의 재량에 맡기도록 하지.”

“그… 레무리아 전역의 모든 무장 단체라고 하셨잖습니까? 이 드넓은 반도 전체에서 그걸 관철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용병단만 수십이고, 지역에 할거한 조직들은 셀 수도 없을텐데요.”

빙긋 웃으며 만프레드의 어깨를 붙잡는 아르투르.

“자네는 유능한 인재이지 않은가! 그걸 가능하게 할 방법을 찾으리라 믿겠네. 말이 무장 단체 금지지, 사실 그냥 치안만 안정화시키면 되는 거잖아? 교회의 인증을 받은 정규 세력의 군대를 치라는 게 아닐세.”

“…그,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자네 재량으로! 어떤 방법이든 좋아. 무장 단체들을 다룰 때는 조금 거친 방법을 써도 좋다네. 민간인 피해만 나지 않게 해. 알겠나?”

“예, 예. 알겠습니다.”

만프레드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지만, 속으론 이미 왕에게 중지를 치켜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이 씨발. 싸이코 새끼. 한 마디로 자기 손 더럽히기 싫으니 나보고 알아서 치우라는 거잖아.’

“그럼 이 현장도 알아서 잘 처리할 거라 믿겠네. 정식 충성 서약과 작위 수여식은 대관식 때 하도록 하지. 변경백 만프레드!”

굽신굽신 고개를 숙이는 만프레드.

“살펴 들어가십시오. 염려하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재차 그의 어깨를 쳐서 격려했다. 뼈가 골절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만프레드는 끝까지 웃음 지어보였다. 왕이 북구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지휘 막사를 감싸던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양옆으로 비켜섰다.

얼마 뒤,

“……갔냐?”

만프레드는 아르투르가 저 멀리 사라진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용병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우두커니 서서 흩뿌려진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무언가 잡념에 빠져들기 전,

“다들 뭘 그렇게 서 있어? 시체 처음 봐? 대책부터 논의하자고.”

만프레드는 도로 의자 중심부에 앉았다. 그는 깍지를 끼고 냉철한 눈빛으로 용병대장들을 바라본다.

“모두 자리에 앉아. 마일즈, 냄새 역하니까 돌아가신 분들은 저리 치워두고.”

만프레드의 부관, 마일즈가 손을 까딱하자 금괴 기사단원들이 들어와 토막난 시체 조각들을 조심스레 감싸서 나갔다. 곳곳에 흩뿌려진 피는 마찬가지였지만, 용병대장들은 긴장을 좀 풀 수 있었다.

“다들 저 사생아 놈이 얼마나 우리를 무시하는 지 보았을 것이다. 난 분명히 타협을 시도했었다! 공작, 공작을 달라고 한 건 여러분 모두가 영주가 되기에 충분한 땅을 나눠주려면 공작의 작위 정도는 필요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놈은 기어이 날 백작으로 주저 앉혔지.”

격분한 듯 말하는 만프레드.

“백작 작위쯤은 우리 금괴기사단 만으로도 딸 수 있다! 하물며, 우리 일만 명이 넘는 용병들이 모였는데 백작이 뭐냐! 백작이!”

용병단장들은 만프레드의 태도를 보며 혼란스런 감정을 느꼈다. 놈에게 포섭된 것이 아니었나?

“맞습니다! 그 북구인 사생아 놈이 우리를 무시한 겁니다!”

분개하듯 소리치는 금괴 기사단원.

“곁에 데리고 다니는 북구 계집이 이교도 사제라던데요. 사실 그놈 이교도인 거 아닙니까?”

“그런 놈이 대왕의 아들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거 꼴 보기 싫어 죽겠습니다!”

호응해서 더욱 큰 소리를 지르는 만프레드.

“그래! 확실해! 그놈은 페르넬 대왕의 아들도 아니다! 북구 여자들이 얼마나 문란한데! 교황 성하께선 그놈에게 속고 있는 거라고! 놈이 들고 다니는 건 성검이 아니라 이교신의 축복을 받은 마검이 분명하다! 이를 당장 교황청에 고발해야 해!”

“옳소!”

금괴 기사단은 거침없이 아르투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왕의 귀에 들어가면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심각한 모욕과 불경한 소리로 가득한 욕설이었다. 이 시대에 교회의 축복을 받지 않고 태어난 사생아라는 건 큰 약점이었고, 하물며 어머니가 이교도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금괴 기사단이 왕을 성토하는 모습을 보며 몇몇 용병대장들은 희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전설의 용병 만프레드라면 저런 괴물에게도 분명히 적대할 방법을 찾아낼 지도 모른다.

“그래! 씨발! 그놈은 내 의형제를 죽였어! 그것도 잔인하게 머리를 터뜨려 죽였다고! 반드시 그놈의 안면도 으깨버릴 것이다!”

한 백발의 용병대장이 일어서서 힘차게 울분을 토해내자, 이래도 되나 싶어 묘한 표정을 짓던 다른 용병대장들도 하나씩 숨겨왔던 본심을 토해냈다.

“군대도 없는 놈이 거들먹거리다니! 정신이 나간 거지!”

“그놈이 아무리 강해봐야 기습하면 꼼짝도 못할 겁니다! 우리도 기습으로 당한 거잖아요!”

“그놈, 데네토르 왕국에서 죄인이 되어있던데 루이스 대왕에게 알리면 어떨까요?”

“아니지! 교황 성하께 알려서 왕위를 취소하는 게 우선이야!”

용병대장들이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자, 만프레드가 식탁을 쾅쾅 두들겨 좌중을 침묵시켰다.

“다들 훌륭한 결단을 해주었군. 용병하면 의리! 의리하면 금괴 기사단이지! 자, 이제부터 우린 하나다! 이곳에 모인 모든 용병들은 힘을 합쳐 서로를 위하자!”

“위하여!”

만프레드의 장중한 외침에, 금괴 기사단들이 검을 뽑아 높이 들어올렸다. 그는 백발의 용병대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 명예에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어르신의 복수는 이뤄질 것입니다!”

“자네 뭘 좀 아는군. 내 후계자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어. 복수를 위하여!”

한편, 이 모든 흐름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용병대장들이 있었다. 그들은 경험이 많거나 신중하기로 정평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꼼짝도 않고 자기들끼리 무언의 경고를 주고받고 있었다.

“겁쟁이들아! 너흰 뭘 하느냐!”

몇몇 의기 넘치는 용병대장들이 그들을 힐난했지만, 그들은 침묵을 지켰다. 만프레드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는 슬며시 웃어 보일 뿐이다.

백발의 용병대장은 힘차게 일어서 용병대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린 늑대다!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자유인이자, 강자들이지. 그런데 우리를 감히 집 지키는 개 취급을 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자기 용력만 믿고 말이야! 두고 보라지, 등 뒤의 칼날에겐 장사가 없는 법이다! 기필코 놈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쓰고야 말 것이야!”

검은 갈까마귀 용병단의 단장 로드릭은 반백년의 용병생활을 해온 업계의 산 증인과도 같은 자였다. 개인적인 용력과 지휘력 모두 뛰어났고, 부하들을 보살피고 동료들과 소통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정세를 읽을 줄 모른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놈은 절대 우리를 길들일 수 없을 겁니다! 수염도 나지 않은 애송이의 발등이나 핥으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래!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있어서 다행이군!”

많은 용병대장들이 로드릭과 만프레드에게 환호했다. 그들은 영주들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높은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런데 아르투르에게 받은 취급은 상상 이하였고, 그들의 뇌는 분을 풀기 위해 시원한 말과 행동을 갈구하고 있었다. 평소의 예리한 생존 감각조차 마비된 채로.

만프레드는 자연스럽게 로드릭에게 술잔을 건넸고, 그는 울분을 달래기 위해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어느 사이 금괴 기사들도 자연스럽게 환호하는 자들과 잔을 부딪쳤다.

“크하아. 이 술이 유난히 좀 독하군. 자네는 안마시나?”

“아하하. 저는 오늘 진영에서 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노인은 올라오는 취기를 느꼈다. 용병대장들 사이에서도 알아줄 만큼 주량에는 자신이 있었건만, 정말 세기는 셌다.

“해야 할 일이 무언가? 이 즐거운 술을 미룰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만프레드는 로드릭을 보지도 않은채 담담히 대답했다.

“대청소요. 어르신. 새로운 출발을 할 때는 한 번씩 해줘야 하더라고요.”

다른 용병대장들이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습으로 왕을 치면 놈도 별 수 없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애송이, 이 기회에 피오렌치아 전체를 불태우고 약탈하자는 광인도 있었다.

“어르신, 용병대 일을 오랫동안 하다보면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백발의 용병은 기가 찬 듯이 답했다.

“허튼 소리! 뭘 모르는 놈들이 그렇게 부를 뿐이야. 그놈들은 한 곳에 갇혀 살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잖나. 영주들조차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데, 땅이나 파먹고 사는 새끼들이 감히 우리를 비난해?”

만프레드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어르신 말씀도 옳습니다. 그렇지만 용병일이 좀 험합니까?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을 죽이고, 형제처럼 지내던 동료가 구더기 밥이 되어가는 광경을 분기에 한번 씩은 보죠. 기름 뒤집어써서 병신되고, 적병을 죽이고 그 똥무더기를 뒤집어쓰고 의뢰주에게 돌아가면 전공이 별로라며 보수를 깎기에 바쁘죠.”

쓰디쓴 미소를 짓는 만프레드.

“가끔은 아예 떼먹으려 드는 개새끼들도 있는데, 아주 씨발 놈들입니다. 다 그냥 배때기에 칼침을 놔 버려야 되요, 그런데 정말로 그런 놈들에게 한방 먹여줬다간 사회의 공적이 됩니다. 원래도 돈에 영혼을 팔았다니, 악마의 자식들이니 손가락질 받는 것도 서러운데, 목숨 걸고 번 돈 떼어 먹혀도 호소할 데도 없는 게 우리 아닙니까.”

만프레드가 털털하게 말을 이어나가자 백발의 용병은 클클 웃으며 재차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갈 곳도 없지. 목숨 걸고 번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친지들은 낯설어하지, 땅 파먹고 사는 삶으로 돌아가게 되지. 마음 다잡고 농사 좀 지으면 교회가 떼가고, 영주가 떼가면 딱 입에 풀칠할 만큼만 남는 거지. 미래가 없는 삶이야. 평생 마름에게나 굽신대다가 병나서 죽게 될 그런 삶을 받아들일 용병은 없어! 그런 겁쟁이는 애초에 용병을 못하니까!”

그제야 만프레드는 로드릭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르신도 그러셨군요. 맞습니다. 금의환향을 꿈꾸고 돌아온 우리는 알게 되죠. 결국 용병대야말로 우리 진짜 가족이었다는 걸. 내 옆자리를 지키던 꼴 보기 싫은 놈이 내 형제이며 친구이고, 동전 몇 닢에 헤프게 다리를 벌리던 천박한 매춘부들이 내 누이요, 아내였구나.”

늙은 용병은 잔에 술을 채워주는 만프레드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자네도 이제 진짜 용병이 된 거야. 자네의 금괴 기사단과 우리 검은 갈까마귀 용병단이 힘을 합치면 나머지 용병들도 모두 우리를 따라 올 거야. 이제 우리를 위한 세상,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영주니 성직자니 입만 산 놈들 다 내쫓아! 결국 강한 힘이 곧 정의다!”

만프레드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우매한 자 같으니라고. 왕에게 벌벌 떠는 게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따위 소리나 하고 있나. 영주들이 우릴 살려둔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쓸 만하기 때문이라고.

“말씀 덕에 결심이 굳었습니다.”

노인은 잠이 오는 지 눈을 껌뻑였다.

“어떤 결심 말인가?”

“용병대장으로 지낸 지 십년이 넘었거든요. 더 추해지기 전에 이 생활을 청산해야겠군요. 저는 부하들이 객사나 전사보다는 평온한 죽음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만프레드의 품에서 강철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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