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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도 모두 만프레드와 의견을 함께 하는가?”
아르투르가 용병대장들과 차례로 시선을 맞추어보니, 그들은 대부분 거만한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소수의 인원은 아예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실권은 우리에게 있으니 말이나 들으라는 태도였다. 아르투르는 피식 웃어보였을 뿐이다.
대답이 잠잠하자 만프레드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보셨지요. 폐하. 모두 제 의견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이래 뵈어도 용병 업계에선 평판이 좋은 편이어서요. 기사 가운데 최고가 아르투르라면, 용병 중의 최고는 만프레드라고 할 법 합니다.”
만프레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직속 부관들이 껄껄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이 무슨 최고의 용병입니까? 협잡에서 최고죠!”
“암. 비열하기로도 최고 아니겠어?”
껄껄 웃는 대원들을 보며 만프레드는 못마땅한 행세를 하며 나무라듯 답했다.
“예끼. 이놈들아. 왕께서 보고 계신데 치켜세워줘야 우리 몸값이 올라갈 거 아니야. 게다가 용병의 첫째 덕목은 협잡인 거 몰라? 처절하게 싸워서 이기는 것보단 안전하게 돈이나 타먹는 게 낫다고. 싸우다 다치면 다 니들 손해야.”
동료 용병대장들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피식피식 웃었고,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며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거기에 힘을 얻은 덕인지, 흉터가 많은 위협적인 인상의 거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보았겠지? 애송이 왕! 잔머리를 굴려서 우릴 분열시킬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 용병들이다! 성검을 가졌다고 거들먹거릴 생각은 접어라! 교황의 인정도 아무 소용없다! 우린 단 하나! 힘만을 따른다! 결국 도시의 주인 자리에 누굴 앉힐 지는 우리가 정한다! 얌전히 명분이나 내놔!”
거한의 말에 많은 용병대장들이 따라서 푸하하하 웃으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지만, 만프레드는 일순간에 표정이 찌그러졌다. 그는 벌레를 씹은 표정으로 거한을 바라보았지만, 상대는 아랑곳 않고 득의양양하게 어깨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멍청한 놈아! 용병대장 씩이나 되는 놈이 흥정도 할 줄 모르면 어떡하냐! 방금 한 말은 판을 깨잔 거잖아!’
아르투르는 같이 따라서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를 따라온 북구인들은 배를 잡고 웃으며 바닥을 뒹굴 지경이었다.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긴 시간 막사는 아르투르 일행과 용병대장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만프레드와 그를 따르는 자들만이 경악한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씨발, 저 병신들이. 소문이 거품인줄 아나본데요? 대장, 어쩌죠?’
짜증난 듯한 표정의 만프레드가 조용히 속삭였다.
‘조용히 짜져 있어. 지금 아르투르 저 새끼, 눈알 굴리는 거 보여? 누가 웃고 안 웃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잖아. 입 벌리는 새끼는 내가 귀까지 찢어버린다. 다 입 다물고 있어.’
한동안의 웃음이 끝나고, 거한의 용병대장과 아르투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뭐가 그리 웃기냐? 사생아 왕자 놈아.”
“그 별명을 쓰는 거보니 나에 대한 소문은 들은 것 같은데.”
“아, 백인을 베었다는 그 터무니없는 소문 말이냐? 용병일 하다보면 너처럼 허풍떠는 새끼를 한 둘 보는 줄 아냐. 보나마나 집안 잘 태어나서 술술 풀어가는 도련님이겠지. 네 검이 갑옷을 종잇장처럼 자르고 상처를 치유한다며? 씨발. 그럼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다 쳐 죽였겠지.”
만프레드가 다급하게 끼어들어 말했다.
“폐하, 저 친구가 제대로 된 용병대장이 된 지 얼마 안되서….”
살벌하게 답하는 아르투르와
“자넨 닥치고 있고.”
얌전히 물러서는 만프레드였다.
“넵.”
아르투르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의 체격과 존재감은 용병대장들의 생존 본능을 다시금 자극했다. 몇몇은 망했다고 생각하고 슬금슬금 도망치거나 만프레드 쪽으로 붙었지만, 상당수는 오히려 공포감을 억누르며 앞으로 나섰다.
“하! 네놈 위에 겁을 먹는 건 금괴기사단 같은 계집애놈들뿐이겠지. 그놈들이야 사생아 천지여서 혈통을 존중하는 모양이다만, 우린 안 그래! 우리 유랑늑대단은 누구도 길들일 수 없는 거친 야수들이다! 진짜 용병은 달….”
콰지끈 - !
무언가 막강한 힘이 거한의 뺨을 강타했고, 놈의 얼굴은 오른쪽에서 철퇴에 맞은 것처럼 왼쪽으로 함몰되었다. 놈은 머리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줄줄 흘렸고, 안구는 보기 흉하게 튀어나와있었다. 뼈는 부러지거나, 피부를 뚫고 나왔다. 아르투르의 건틀릿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갈 곳 없는 들개들이 순한 양들을 괴롭히다보면 자기네가 사자가 된 줄 알지. 그런데 말이야. 들개는 들개답게 떨어진 개똥이나 먹고, 재롱을 부릴 때나 귀여움을 받는 법이다.”
“개, 개자식이!”
거한의 부관이 검을 반쯤 꺼내들었을 때, 아르투르의 기다란 오른팔이 날아들어 놈의 목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커, 커헉, 크컥.”
졸지에 아르투르의 팔에 매달린 모양새가 된 그는 검을 떨어뜨린 채, 양손으로 팔을 붙잡고 떼어내보려 강한 힘을 주었다. 그걸로도 부족하자 가슴을 발로 차보기도 했지만 아르투르는 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들개들이 우두머리 자리를 노리겠다고?”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는 아르투르.
뚜둑 -
목뼈가 부러진 용병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입에서 뻗어나온 혀가 늘어지며 기괴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아르투르는 혀를 거칠게 뜯은 후,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북구인들의 눈빛에 흥미가 돋았다. 특히 힐데군드는 아주 기대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랑 눈 마주치는 놈은 목을 뜯어버리겠다.”
스무 명이 넘던 용병대장들은 모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들은 훈련 교관 앞에 서서 다음 명령만 기다리는 것 같은 태도로 숨을 죽인 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다렸다.
그 중 행동이 재빠른 한 명이 아르투르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간 틈을 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충분히 아르투르와 멀어졌다고 판단한 후, 몸을 돌려 달아나려는 무렵 -
“아아악 - !”
아킬레스건에 손도끼가 박힌 그는 힐데군드의 손에 질질 끌려왔다. 눈을 내리깐 용병들을 보던 아르투르가 살며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나가도 좋다고 했나?”
아르투르는 오른발의 강철 부츠를 들어 곧바로 놈의 목을 짓밟았다. 피가 튀었다. 몇 차례 더 강하게 내리찍자, 한때 사람의 머리였던 유기질이 흉하게 비산되어버렸다. 그를 마무리한 아르투르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용병대장들에게 시선을 옮기자,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떠는 장발의 젊은 사내가 보였다.
“이 개새끼가. 내 말이 장난으로 들리나?”
격분한 아르투르는 바로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칼을 붙잡고 끌어냈다.
“아, 아악. 사, 살려 주십쇼! 아아아악!”
아르투르는 놈의 안면을 무릎으로 올려쳤고, 이번에는 뼈가 으스러지는 굉음과 함께 또 하나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소란을 들은 수백 명의 용병 대원들이 막사 주변으로 몰려왔지만, 그들은 아르투르 앞에서 눈을 내리깐 채 벌벌 떠는 단장들을 보며 그들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이리 와. 이리 와. 한동안 싸움다운 싸움을 못해봐서 몸이 뻑적지근해 죽겠거든?”
그들의 앞을 막아선 힐데군드가 어깨에 장검을 툭툭 치며 손짓했지만, 감히 아무도 앞으로 나설 담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저거 봐라. 불알 떼! 병신들아!”
같이 온 북구인들도 이 상황이 너무 웃기는지 저들끼리 미친 듯이 웃어대었다. 아르투르는 병사들은 그들에게 맡겨둔 채, 다시 단장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좋아. 자기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놈들은 다 뒈진 것 같군. 남은 놈들은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있는 놈들이라고 봐도 되겠지?”
용병대장들은 벌벌 떨면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알겠으면 고개 들고 대답한다.”
수십 년간 전쟁터를 전전한 용병대장들이 신병마냥 기합을 내질렀다.
“네! 알겠습니다!”
만족스럽게 웃는 아르투르.
“좋아. 좋아. 정도를 알아야지. 정도를. 너희가 가진 군대로 협상을 하는 건 봐줄 수 있었다. 그 정도 패기가 없었으면 용병대장으로 아무 쓸모가 없지. 무례한 건 원래 용병이란 게 그런 놈들이니 그렇다 쳐주마. 하지만 감히 짐에게 기어오를 생각은 말아라. 너희 용병 놈들은 무력 빼면 존재 가치가 없는 놈들이다. 그럼 얌전히 더 강한 자의 말에 따라야지. 안 그래?”
모두가 여전히 벌벌 떠는 가운데,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만프레드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실은 지금 그는 무서운 감정보다는 원통한 감정이 앞섰다. 당연히 죽은 동료 동업자에 대한 건 아니었다.
‘용병대장이라면 의뢰주의 급수나 성향쯤은 알았어야지! 저 놈 호군데, 비위만 맞춰주면 배포를 보여준답시고 손해 보는 거래도 맺어보는 개호구 새끼인데! 굳이 성격을 건드려서 이 사단을 내?!’
만프레드는 혹여나 자기 용병단의 사람들이 헛짓거리를 하나 싶어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자신의 용병단에는 그 정도 미친놈은 없었다. 그 때, 정면을 보고 있던 만프레드의 시야에 아르투르의 악의 어린 표정이 불쑥 들어왔다.
“만~프레드. 내 친구.”
“옙. 말씀하십시오. 폐하.”
다소 급하게 말하는 만프레드의 목소리와 달리,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편안했다.
“지금 이곳에 모인 병력이 얼마나 되지?”
바짝 긴장하여 또렷하고 맑고 빠르게 답하는 만프레드.
“기사가 이백 명, 기병이 삼천 명, 보병이 만 명입니다. 대부분 장비도 좋고, 실전 경험도 갖춰진 정예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만큼은 확실히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만프레드의 말에 아르투르가 더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대단해! 대단하네! 만프레드! 짐을 위해 훌륭한 군대를 모병해왔군. 자, 이제 다음 임무를 내리도록 하겠네.”
“예? 우선 보상에 관해 이야기해야 되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말을 끝내는 만프레드와 달리, 아르투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새 잊어버린 겐가? 자네가 얼마 전에 짐에게 찾아와 맹세를 했었잖나? 레무리아 반도가 짐의 통치 아래 평화를 되찾게 되는 그 날까지 자네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싸우겠다고 말이지. 이제 돈만을 쫓아다니며 싸우기보다는,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검을 바치고 싶다고 말이지!”
만프레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아니,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 그렇다고 치죠. 그럼 군자금은요?”
“저런,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고 했으니 자네의 재산도 바치겠다고 한 것 아니었나?”
“예에?!”
놀란 만프레드의 말을 들은 아르투르는 그의 어깨 갑옷에 각각 손을 올렸다.
“짐이 좀 기억이 나는데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만.”
아르투르가 힘을 주자 철판 어깨 보호대가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만프레드의 표정이 새하얗게 변하는데는 눈 깜짝할 시간이면 충분했다.
“나, 날법도 한데요. 그, 그러면 제가 대가로 무엇을 받기로 했었죠?”
“음. 백작 작위를 받기로 했었네. 하지만 짐의 명령을 잘 이행하지 못하면, 평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니 어떤 작위도 가질 자격이 없다며 자네의 전 재산에 걸고 맹세했지. 짐은 진심으로 탄복했네. 콘도티에로인 자네가 목숨 바쳐 모은 돈을 걸고 맹세를 하다니!”
미묘한 표정을 짓는 만프레드.
“기억이 거의 날 것 같은데… 혹시 공작자리가 아니었습니까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는 아르투르.
“아니, 아니야. 자네는 공작은 너무 높으니 백작에만 머무르겠다는 겸손함을 보였어.”
만프레드는 입술을 질끈 물고 말했다.
“공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폐하!”
“뭐라고? 잘못 들었는데?”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의 어깨를 한층 강하게 짓눌렀다.
“아, 아아악! 공작자리를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말해보게!”
한층 더 강한 힘으로 내리누르는 아르투르.
“고오오오오옹-자아아아악!”
만프레드의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울려 퍼진 뒤, 그는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자빠진 만프레드는 엄혹한 아르투르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아, 죽는 건가. 제기랄. 그냥 백작 할 걸 그랬나. 신은 왜 저런 막무가내 놈에게 성검을 줘서는 이 사단이 나게 만든거야.’
“짐이 잊은 게 있었던 것 같군.”
역시 공작인가?! 끈기는 승리한다!
“앞에 변경자를 붙이는 걸 깜빡했어. 즉, 백작이 아니라 변경백 자리를 주기로 약속했었네!”
“……정말 공작은 안됩니까? 대공도 아니고요.”
표정을 찌푸리며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대는 아르투르.
“처신 잘하게. 성검 맛 좀 볼 텐가?”
결국 만프레드는 길고, 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여 승복의 의사를 표했다.
‘시발, 명예에 정신 나간 미치광이 새끼.’
흡족한 미소를 짓는 아르투르.
“좋아. 좋아. 아주 잘 되었군. 그러면 제후로서 짐의 칙령을 받들 준비가 되었나? 변경백 만프레드.”
“…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주군”
“짐의 첫 칙령을 발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