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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시험 삼아 공격했던 거요! 아악, 내 손! 아악! 아아악!”
놈은 계속 잘려나간 손을 붙들고 비명을 질렀다. 아르투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미안하게 되었군. 나도 시험 삼아 공격했는데, 자네가 그렇게 느릴 줄 알았으면 살살 휘둘렀을 거야. 자넨 누군가?”
사내는 흐느끼는 와중에도 자기소개를 잊지 않는다.
“피오렌치아의… 보검… 다미노 델 에티오르….”
피식 웃는 아르투르.
“그래, 그래. 피오렌치아의 부러진 보검 다미노. 누가 보냈고, 왜 온 건가?”
“네놈은 내 손을 잘라 검객으로서의 삶을 끝냈다! 내 모든 삶을 말이다! 그런 놈에게 뭐라도 말해줄 것 같으냐!”
다미노가 비분강개하며 외치자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자네는 검을 잡지 못하는 인생을 사느니 죽겠다는 게로군. 칼잡이다운 선택일세. 의향대로 해주겠네.”
획 - !
여명의 날이 그의 두개골을 가르기 직전, 놈이 납작 엎드렸다.
“폐하! 살려주십시오! 상인, 상인 귀족들이 보냈습니다! 피오레 가문의 어르신이, 아니 오르마델로 노인네가 사주한 겁니다!”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다미노의 머리 위를 스치며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나갔다.
“날 웃기려는 거냐? 그 영악한 노인네가 너희를 보내 날 죽이려고 했다고? 대충 지어낸 말이면 곱게 죽진 못할 텐데.”
다미노는 자신의 잘려나간 오른손을 왼손으로 소중히 감싼 채, 허둥대며 말한다.
“그게 분명, 분명 저희가 습격해서 주의를 끄는 사이 본대가 올 것이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거라고 했다고요.”
다미노는 일말의 희망을 품은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원군은 낌새도 없었다. 무언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반면, 아르투르는 확실히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피오레 가문 입장에선 일발 역전을 노리려면 지금 뿐이겠지. 이 녀석의 말이 맞다면 적절한 시기에 치고 들어오기로 한 건 맞아. 동조자들이 얼마나 있을 지가 관건이겠는데.’
“좋아. 일단 네 말을 믿겠다.”
“그, 그럼 저희는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 사이, 습격자들은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혀있었다. 숫자는 아르투르 일행의 몇 배는 되었지만 뒷골목에서 결투 좀 하던 실력으로는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고 거쳐 온 전문 살인자들을 전혀 당해낼 수 없었다.
“정보를 순순히 말해주었으니 목숨은 살려주겠다. 대신, 징벌은 있어야겠지. 왼손을 가져가겠다. 내밀어.”
아르투르가 여명을 치켜들자 다미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원했다.
“아, 안됩니다! 제발! 포로는 항상 명예롭게 대우해주시는 분 아니었습니까?!”
분노를 드러내는 아르투르.
“적대 의사도 밝히지 않고 오밤중에 기습을 해놓고 전쟁 포로 대우를 바라나? 네놈들은 그냥 비열한 암살자들이다. 다 죽여!”
“아, 안됩니다! 으아아악!”
다미노의 왼손이 잘려나갈 때, 다른 습격자들도 저마다 아우성을 치며 애원했다.
“기사도는 비무장한 사람을 죽이는 걸 금지하지 않습니까!”
“집에 가족이 있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한번만 봐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밤중에 자다 깨서 나온 기사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화풀이를 했고, 북구인들은 즐겁게 축제를 벌이듯 목을 따서 한 곳에 모았다. 결국 목 없는 시체가 한 가득 관저 앞에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명예롭다는 말이 뭐든지 다 봐준다는 말로 이해하는 바보들이 꼭 있단 말이지. 원칙에 따라 다스리겠다는 건 냉혹한 말이기도 한 데 말이야. 이번 일로 다들 좀 교훈을 얻길 바래야겠군. 카밀!”
습격자의 목에서 재빨리 단검을 꺼내는 카밀.
“하명하십시오. 주군.”
“상황을 알아보고 오게. 가장 신속하고 빠르게.”
“명령 받들겠습니다.”
카밀은 건물 사이의 벽과 벽을 타고, 아주 빠르게 이동했다. 오밤중에 칼싸움 소리를 들은 피오렌치아 인들은 창문을 열고 광장을 내다보았고, 펼쳐진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었다. 얼마 뒤, 카밀이 이번에도 벽을 타고 돌아와 아르투르 앞에 섰다.
“어떻게 되었던가?
“주군, 정말로 도시 밖에는 대규모 부대의 주둔이 확인되었습니다. 수십 개의 용병단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숫자는 만 명은 되겠더군요. 그런데 저들은 피오렌치아의 군대를 공격하지도, 시내로 진입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저 제 자리에 서 있더군요.”
“음. 어떤 용병단들이 있던가?”
“금괴 기사단을 비롯해서 어지간히 유명한 용병단들은 모두 있었습니다. 이 정도의 재력과 연줄을 지닌 세력은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아르투르도 고개를 끄덕여 카밀의 판단에 동의를 표했다. 지금 양팔을 잃고 절규하는 저 얼간이의 말이 사실이었다.
“피오레 가문 샌님들이 생각보다 배짱이 좋군. 이런 일발 역전을 노려볼 깜냥은 남아있었다니, 그건 칭찬해줄만 한데,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저항해오면 나도 가혹해질 수밖에 없단 말이지.”
아르투르는 차라리 피오레 가문 사람들이 스스로 검을 내밀며 도전해왔다면 관대하게 뒤처리를 해줄 용의도 없지는 않았다. 당당하고 용맹한 태도는 존중 받아 마땅한 미덕이기도 했고, 자신의 평판을 지키는데도 좋았다. 너그러운 기사왕이란 평판은 각지의 지방 세력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얻어낼 수 있는 토대였다.
“금괴 기사단이 있다고 했었나? 카밀.”
“네. 용병단의 선두에서 깃발을 날리고 있더군요.”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 레오폴트, 시내를 장악해줄 수 있겠나?”
고개를 끄덕이는 레오폴트.
“여기까지 온 이상 당연히 도와줘야지.”
“힐데군드, 너희 동포들을 데리고 좀 따라와 줘라. 용병들을 만나러 가자.”
해맑은 표정으로 묻는 힐데군드,
“그동안 싸움은 안하고 말다툼만 해서 심심했다고. 이제 좀 사람 좀 담그러 가는 거야?”
“아니었으면 좋겠군.”
“에이, 시시하게.”
***
“오, 레무리아의 왕이시여! 간만에 뵙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랑 많이 달라지셨군요.”
만프레드는 자신을 찾아온 아르투르를 보며 넉살 좋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아르투르는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그의 뒤로는 각기 다른 문장을 쓰고 있는 노회한 용병들이 가득 했다. 그들 모두가 용병단의 주요 간부로 보였다.
“나도 반갑네. 만프레드. 자네 친구들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것 같군.”
아르투르는 만프레드의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건틀렛을 낀 손아귀에 미묘하게 힘을 주었다.
“아, 잠, 잠깐만요. 손 좀 놔주실래요?”
하지만 이내 만프레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빼내려했지만, 아르투르는 좀처럼 놔주지 않았다.
“미안하네. 힘 조절을 잘못했네. 요새 힘이 남아돌아서 말이야.”
아르투르는 씽긋 웃으며 손에 쥔 힘을 풀어주었다. 손을 빼낸 만프레드는 아르투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젠장 하며 투덜거리면서도 다시 가식적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만프레드였다.
“큼, 큼, 소식은 들었습니다. 조만간 교황 성하께서 공을 레무리아의 왕으로 추대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우와, 대단합니다. 같은 대귀족 가문의 사생아로서 폐하의 성공은 제게 많은 귀감이 됩니다. 제가 진심으로 폐하의 성공을 축하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만프레드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예리한 눈길로 찌를 듯 쳐다보는 아르투르였다.
“즉, 지금은 자네가 짐을 축하할 수 없다는 이야긴가?”
능청스럽게 답하는 만프레드.
“저희도 폐하의 대관식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드리고 싶지만, 다들 바쁜 용병대장들 아닙니까? 시간이 돈인 사람들이니 말이죠. 큼. 큼.”
아르투르는 용병대장들의 태도를 보았다. 테이블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땅콩을 까먹고 있는 놈, 자기 애인이랑 달콤한 입맞춤을 하는, 놈, 꾸벅꾸벅 졸고 있는 놈, 니가 얼마나 제시할지 보자며 도전적인 눈빛을 내보이는 놈.
‘공손할 건 기대도 안했지만, 이 정도는 예상외인데.’
“피오렌치아는 짐의 영토인데, 짐은 그대들을 부른 적이 없다. 왜 이곳에 있는 지 설명해보아라. 누가 고용했고, 무슨 목적으로 왔지?”
그러자 몇몇 용병대장들은 피식 하고 웃었다. 눈빛이 그랬다. 어차피 지금은 병력 하나 없는 놈이란 걸 뻔히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나마 만프레드와 몇몇은 겉으로 공손한 척은 했다.
“아. 우선 제가 라이랜더 가문의 샤를로트 아가씨의 의뢰를 받고 온 것이 시작입니다. 그런데 제가 도착해보니 폐하께서 이미 상황을 정리해두셨더라고요. 그래서 다음 고용주가 생길 때까지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아르투르는 행간에서 상대의 의도를 읽어냈다. 교활한 자는 노닥거린 것이 아니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피오렌치아가 내전 상태로 들어가 저항 능력을 상실하면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이었겠지.
“…점점 다른 용병대들이 하나씩 도착하지 뭡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피오레 가문이 고용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폐하를 위해 그들을 설득했습니다. 피오레 가문보다는 폐하가 더 후한 고용주가 되어주실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피오레 가문의 이번에 공격 명령이 내려오고도 반응이 없던 겁니다. 저희가 큰 공을 세운 셈인데, 보상은 언제쯤 지급이 가능할까요?”
자신만만하게 웃는 만프레드의 눈빛을 보며 아르투르는 의도를 살폈다. 핵심은 그가 피오레 가문으로 갈 용병대를 낚아채 자신과 함께 행동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놈의 진짜 의도는 말하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만큼은 정말 탁월하군. 마음에 들진 않아도 아주 유능한 놈이야.’
그래도 주눅 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일개 용병이라면 그의 행보는 분명 박수칠만한 것이었지만 자신과는 그리고 있는 그림의 규모 자체가 달랐으니까. 자신이 볼 때 만프레드의 구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용병단, 일개 도시나 지방 정도에서나 통할만한 수준이었다.
“말은 똑바로 하자고. 자네들은 누군가를 고용주를 모시려고 기다린 게 아니라 양측이 자멸하면 그때 도시를 약탈할 생각이었겠지. 피오레 가문도 더 이상 옛날만 못하니 따를 이유가 없는 것이고.”
고개를 가로 저어 강한 부정을 드러내는 만프레드가 여전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닙니다. 저희 용병들은 신의가 없으면 시체지요. 저희도 신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건만 양민들의 재산이나 약탈했겠습니까? 아예 피오렌치아를 집어삼킨다면 모를까.”
만프레드는 자신을 향해 능글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놈은 자신이 정색하고 화를 낼 수 있는 단어를 피하며 교묘히 경고해오고 있었다. 제대로 돈을 지급 하지 않으면 다 작살내버릴 수도 있다고.
“들어나 보지. 그래서 너희가 짐에게 바라는 게 뭐냐?”
만프레드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저희를 모두 제후로 임명해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폐하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되어 레무리아 전부를 정복하는데 동참하겠습니다. 작위와 봉토는 용병단 규모에 따라 정하면 될 것 같고요.”
놀란 표정으로 묻는 아르투르.
“너희 전부 말이냐? 제후의 반열에 드는 건 아주 까다롭다. 공적도 있어야 하고, 품행이나 통치 능력에도 결격 사유가 없어야하며, 무엇보다 충성심이 검증이 되어야지. 아니면 혈통이라도 고귀하든가. 이 사항을 모두 충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손을 흔드는 만프레드.
“아니죠! 폐하. 제후란 본디 난세에 힘으로 얻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폐하께는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는 명분이 있고, 저희에겐 군대가 있습니다. 어차피 명분을 얻으셨다한들 군대로 정복해야 할 땅, 저희와 손을 잡으시는 게 합리적이십니다.”
“으음.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생각할 시간을 좀 줘보게.”
아르투르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막사 내에는 긴장이 흘렀고, 몇몇은 무의식적으로 무기 위에 손을 올려두고자 했다. 만프레드가 긴장된 미소를 유지할 때, 마침내 왕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