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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진솔한 눈빛을 담아 샤를로트를 마주 보았다.
“샤를로트. 넌 내가 아는 누구보다 왕비로 적합해. 그래서 권력을 내주기로 한 것이고. 그러니 부탁인데 우리끼린 언제나 불편할 정도로 진솔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전적으로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거든. 집안에서까지 네 의도를 읽느라 머리 쓰고 싶진 않아.”
아르투르의 말에 샤를로트는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분별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앞으로는 명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피오렌치아는 분명히 제 몫으로 약속하셨는데, 자치권을 그렇게 마음대로 주어버리시면 제가 직접 도시를 통치할 수가 없잖아요. 먼저 저와 상의를 하시는 게 맞지 않았을까요?”
아르투르는 이제야 그녀가 솔직하다고 느꼈다. 기분도 꽤 상해보였지만, 그런 점에 신경 써줄 여유는 없었다.
“좋아. 바로 그런 대답을 바란 거야. 나도 원하던 답을 줄게. 샤를로트. 내가 레니에 경을 조금 과하다 싶게 기용한 이유 중 하나는 피오렌치아에 내 사람을 둘 필요성을 느껴서야.”
샤를로트는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피오렌치아의 역대 통치자들이 다 모자란 바람에 내가 기회를 얻긴 했지만,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하고 강력한 곳이야. 입지도 수도로서 최적이라고 할 만하지. 그런 곳을 네 사람들로만 채워지게 둘 수는 없어. 그렇지 않아도 네 입김이 아주 강한 곳이잖아. 그렇지만 약속한 게 있다는 건 맞아. 다른 식으로 네 몫을 보상할 방법을 찾아볼게.”
그녀는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건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하필이면 왜 레니에인데? 그 아저씨는 평생 자유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네게 충성을 바칠만한 인물이 아니야. 충성 서약만 했을 뿐, 결코 네게 마음으로 따를 자가 아니야.”
아르투르는 시선을 돌려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른 후 은수저를 넣어두었다. 독이 들었다면 수저를 통해 드러날 터였다.
“마음으로 따라야만 충성을 하는 건가? 그런 기준이라면 대부분의 신하들은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아. 다들 얻어가는 게 있으니 따르는 거지. 눈에 보이는 것이건, 보이지 않는 것이건 군주가 그들에게 뭔가를 줄 수 있으니 충성 맹세를 하는 거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샤를로트. 넌 나와 결혼을 하고 싶던 게 아니라, 왕이랑 결혼을 하고 싶던 거잖아.”
아르투르는 미래의 왕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샤를로트는 은근슬쩍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나무라는 건 아니야. 나도 더 마음이 가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왕비가 필요해서 결혼하자고 한 거니까. 그러니 서로 이런 걸로 기분 상하지 말자고. 레니에 경과 힘을 합쳐서 잘해봐. 처음에 그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소소한 반항들을 좀 할 거야. 잘 달래든, 협박을 하든, 일을 시키라고. 경을 따르는 사람들이 남아있을 때까진 써먹어야지.”
샤를로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내가 할 생각이지, 네가 할 생각이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레니에 대장과 연출한 그 감동적인 모습이 다 의도한 거였다고? 명예로운 기사가 그런 걸 할 줄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조금 영악하긴 하지만 누굴 속인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했으니 좋게 풀린 거지. 이건 너한테 배운 거야. 아무튼, 우리 사이에 완전히 신뢰가 쌓일 때까지는 나도 어느 정도 견제할 수밖에 없어. 하나씩 세볼까? 교황청의 후견을 받는 입장에, 수도의 막후 지배자, 곧 왕비의 지위까지 얻을 거고. 여기에 왕위 계승자까지 태어나면? 나도 부담되겠군. 사람들은 공동 통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르투르는 가만히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해해주길 바래. 네가 편해지는 만큼 난 불편해질 거고, 네가 불편한 만큼 난 편해질 거야. 그러니 내가 널 믿을 수 있게 제대로 뒤를 받쳐줬으면 좋겠어. 가족의 정이든, 사랑이든, 아니면 정치적 동업 관계든, 무언가를 통해 널 좀 더 믿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좀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할 수도 있겠지.”
샤를로트는 감정을 가라앉힌 채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왕은 확실한 서열 정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아르투르를 보았을 때는 패기가 넘치고 열정적이지만 경솔한 귀족 청년이었다.
‘처음 보았던 대로면 손쉽게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노회한 군주처럼 변했어. 이건 놀라운 일이라고.’
이제 아르투르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었고, 적절하게 다룰 줄 알았다. 이제 그는 옛 신의 가호를 받는 자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왕국을 일궈내는 걸 앞두고 있었다. 교묘한 말이나 미소 따위는 그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되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보기엔 너무 큰 사람이 되었다는 걸.
샤를로트는 치마 양끝자락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몸짓과 목소리엔 진정한 승복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 왕국은 폐하가 세울 곳이고, 왕조는 폐하의 명성에 기대어 이어질 것입니다. 제 자손들은 그대의 이름을 들으며 자라게 되겠지요. 그대는 태양처럼 빛나시는 분이고 저의 보호자이십니다. 지금부터는 저를 온전히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왕이시여.”
고개를 숙인 샤를로트를 향해 아르투르는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드시오. 미래의 부인.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출 필요는 없소. 그대는 왕위 계승자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고, 그대의 성정에 맞게 당당하게 살아가며 통치에 참여하시오. 그러라고 왕비로 뽑은 것이니까. 그렇지만 전향적인 태도로 나와 주니 솔직히 기쁘긴 하군.”
아르투르는 가슴 속에 풀어놓은 말들을 털어놓았다.
“내가 그대와 혼인하기로 한 가장 큰 동기는 적으로 돌리면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오. 아마 내가 거절했다면 레오폴트나 다른 여러 유력한 군주들이 찾아갔겠지. 그럴 바에야 이쪽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어쩐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군. 레니에 경의 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내게 아내의 사랑을 다할 필요는 없소. 맡은 바 의무에 충실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
샤를로트는 한층 더 몸을 숙였다.
“누그러지신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그동안 제가 조금 주제를 몰랐나봅니다.”
아르투르는 껄껄 웃었다. 이거에 누가 속냐.
“그대가 감정을 표방하는데 능한 건 아주 잘 알고 있소. 그렇지만 잘 지내자는 뜻은 알아듣겠소. 내 생각에 우리 관계는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소. 서로 존중하되,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사이 말이오. 당신과 내가 만났을 때는 자기만 챙기면 되는 청년들이었지. 하지만 이젠 책임져야 할 게 가득하니, 거기 맞춰서 살아갑시다.”
조심히 고개를 드는 샤를로트.
“오늘 말씀하신 것들은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문제가 남았습니다. 상인 귀족들을 어떻게 대하실 의향이십니까?”
“그놈들은 봐줄 이유도 없는데, 어차피 덤벼들 배짱도, 능력도 없는 놈들이니 조금 과하다 싶어도 감히 덤빌 생각은 못할 거요. 그렇다면 좀 밀어붙여야겠지. 땅이랑 재산, 둘 중에 하나를 몰수하면 적당하겠다 싶은데….”
쾅 - !
“마스터!”
케이가 문을 바로 열고 들어오자, 두 사람은 바로 케이에게 시선을 줬다.
“무슨 일이냐? 케이?”
“지금 관저로 무장 괴한들 백여 명이 습격해왔습니다. 마스터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바로 몸을 피하시는…”
…“게 좋지만, 안 그러실거죠?”
아르투르는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몇 번 꺾었다.
뚜둑 -
“한동안 아무 일도 없다싶더니 사고를 치는 놈들이 있군. 앞장서라. 케이.”
다급히 말하는 케이.
“마스터! 갑옷은 입으셔야죠!”
이미 칼부림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시간 없다.”
아르투르는 샌들만 신은 채 관저 바깥으로 설렁설렁 걸어 나갔다. 이미 마당을 보니 경비병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검객들이 보였다. 실력을 보니 나름대로는 잘 싸웠다. 특히 길거리 전투에 특화된 무술을 배운 게 분명했다. 그래봐야 지역에서 좀 잘 나가는 수준인게 문제였지만.
“오밤중에 이런 놈들을 보내 암살을 꾸며? 어느 골 빈 놈이야?”
아르투르는 빈정대며 전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목표 확인! 놈이 나타났다! 집중 공격!”
복면을 쓴 사내들이 아르투르를 노리고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아르투르는 한번 씩 웃어준 후, 각 동작이 매끄럽게 연계되는 유려한 검로를 그렸다. 숙련된 화가가 밑그림을 그리듯 칼날이 허공을 젓고, 핏빛 물감이 채색을 순식간에 끝냈다. 살아있는 검술 교본이 완성되는 것엔 고작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열다섯 명 쯤 되는 괴한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이야기와 다르잖나! 부풀려진 소문이라더니 진짜 괴물이었잖아! 도망쳐!”
“가긴 어딜 가나.”
아르투르 입장에서 이들은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였다. 뒷골목에서 불시에 습격해 칼로 찌르고 달아나는데 최적화된 길거리 싸움꾼들. 치열한 전장의 사투를 몇 번이고 넘어본 자신에게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는 검술에 거의 집중하지 않은 채 손이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횡으로 휘두르면 목이 날아가고, 종으로 휘두르면 목에서 골반까지 두 동강이 났다. 날아오는 볼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쳐내면 그만이었다.
“저, 저놈 뭐야? 칼로 화살을 쳐내다니, 뭐하는 놈이야?”
피식 웃는 아르투르.
“거기 놀라면 안되지. 내가 자란 곳에선 검 좀 쓴다고 하면 다 할 줄 알았거든.”
휙 - !
순간 아르투르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옆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들려온 뒤, 아르투르의 옆구리에 있는 옷깃에 구멍이 났다.
“호오. 세뇨르. 기사치고는 빠르군요. 당신들은 갑옷에만 의존해서 힘만 키우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검술이란 우아하고 날렵해야합니다.”
들려오는 느끼한 목소리. 아르투르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보니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젊지도, 나이 들지도 않은 그는 제법 볼만한 미남자였다.
오른손에는 긴 세검을, 왼 손에는 짧은 단검을 쥔 그는 자유자제로 손을 움직이며 자신을 교란하고 있었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와 몸에 꽉 끼는 가죽 옷은 가벼운 무기로부터 충분한 방호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뭐냐, 너는?”
눈살을 찌푸리는 아르투르.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피오렌치아의 보검, 꽃 중의 꽃, 검객 중의 검객, 다미노 델….”
푸샥 - !
가죽 장갑과 세검을 쥔 놈의 오른손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으아악! 내 손이! 내 아름다운 손이! 이, 이 비열한 자 같으니! 통성명할 때 공격을 하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명예를 아는 기사냐!”
아르투르는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이곳에선 어둠 속의 암습을 결투라고 부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