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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63화 (16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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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에 대장님께선 혼자가 아니시오! 피오렌치아 제 1보병대의 십인 대장, 나, 마르코가 함께 할 것이오!”

아르투르는 고개를 갸웃하며 팔걸이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괸다.

“자네가 누군가를 대신해 지지를 표명할 자격이 있는가? 왕비에게 자네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는데.”

왕의 시선을 받은 마르코는 온 몸을 떨었다. 눈을 부라리는 왕의 모습이, 전장에서의 귀신같은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죽음을 몰고 다녔다. 자기 동료들을 푸줏간 고기처럼 썰어대지 않았던가. 그의 시선을 마주 볼 때마다 다리가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자신의 반응을 아는 지, 왕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짐에게 고하고 싶은 게 있다면 똑바로 고하라. 겁쟁이라면 물러서라.”

겁쟁이라는 말에 발끈한 마르코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 나 마르코는 도시의 군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소.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대대로 시의원을 지내신 뼈대 있는 가문이외다. 게다가 족보를 타고 올라가면 피오렌치아에 처음으로 정착했던 석공이 있으시오. 이 정도면 일부 시민을 대표할 자격이 있, 있다고 생각하오!”

말을 마친 마르코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시선만은 아르투르를 또렷이 쳐다보았다. 왕은 그의 말이 우습게 짝이 없었지만, 의기만큼은 높게 사주기로 했다.

“알겠네. 그렇다고 쳐주지. 그럼 두 사람이 끝인가?”

왕이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자, 레니에의 수행원들은 눈치만 볼 뿐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참석중인 시민들도 자기 일이 아닌 듯 팔짱을 끼고 구경하는 태도였다.

“실망스럽군.”

아르투르가 시선을 거두려 할 때,

“저, 저, 저도 레니에 대장님을 지지합니다!”

레니에의 호위병이 끼어들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정말로 무난한 사내였다. 생긴 것도, 체격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청년. 땀을 삐질 삐질 흘리는 그는 어렵게 말을 이어간다.

“제 이름은 안토니오입니다. 저는 조상이 뭘 했는지는 모릅니다. 폐하. 군대에는 직장이 없어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는 초장이셨습니다. 그렇지만 대장님이 하시는 거라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르투르였다.

“자네의 삶에선 달라질게 없네. 오히려 짐의 통치는 안정을 가져다 줄 거야. 모든 건 원래 있던대로 잘 흘러갈 걸세. 굳이 짐의 눈 밖에 나지 말고 얌전히 물러나게.”

“그, 그렇지만, 저도 대장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돕고 싶을 뿐입니다.”

아르투르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세상 온갖 번민을 다 겪은 표정을 지은 안토니오는 고민 끝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변화가 드러났다. 모두 눈치만 보던 레니에의 수행원들이, 장교들이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우리도 레니에 대장과 뜻을 함께 하오.”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자 왕의 사람들은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르투르만은 호기롭게 웃어보였다.

“레니에. 자네를 따를 사람이 제법 되리라 하던 얘기가 허언은 아니군. 하지만 자네가 요구한 걸 관철시키기엔 너무 모자라네. 짐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아니야.”

레니에는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었다.

“저희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폐하. 피오렌치아에는 아직 자유 도시를 기억하는 50만 명의 시민들이 있고,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합치면 그 두 배가 더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싸움을 시작하신다면 저희는 죽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피오렌치아 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어떤 자인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아르투르의 격정 어린 시선이 쏟아져도 레니에는 버티고 서서 마주 보았다. 자신이 아니면 이 젊은 왕에게 협상을 시도할 수 있는 자는 없었으니까.

“즉슨, 자네의 요구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짐과 싸우겠다?”

레니에 일행은 모두 숨을 죽인 채 대장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대장의 말에 달려있었다.

“저는 폐하와 싸우길 원하지 않습니다.”

레니에는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이내 다시금 당당히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합당한 요구를 무를 수는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마음대로 재산을 빼앗고, 도시의 법을 마음대로 제정하실 수 있다면 저희의 삶과 죽음이 오롯이 폐하에게만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그건 왕과 신하가 아닌,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될 것입니다. 저는 자유인으로서 남을 것입니다.”

레니에의 말을 곱씹은 아르투르는 소리 내어 웃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와해될 군대 아닌가. 정말로 자네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거침없이 답하는 레니에와

“폐하께서도 명예를 위해서라면 물러서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싸늘한 미소를 짓는 아르투르.

“짐의 사촌인 레오폴트 왕자는 반항자들의 우두머리들을 모조리 베라고 했네. 목을 창대에 걸어 내걸면 좋은 본보기가 될 거라고 말이야. 짐이 그리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물론, 폐하라면 능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형편없고 비열한 자들이 폐하의 곁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약속하신 기사왕의 통치가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이쯤 되자 레니에를 제외한 모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처음에는 협상을 중재해보려던 샤를로트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장교들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며 힘써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일 뿐이었다. 레니에도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하하하하하하. 패기가 넘치는 건 보기 좋군.”

그러나, 아르투르는 호쾌하게도 웃고는,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자네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레니에 경.”

아르투르는 그동안 드러냈던 분노를 눈 녹듯이 단숨에 녹여버렸다. 지금까지 드러낸 감정이 모두 연기라는 것 같은 태도였다. 왕의 측근들마저 예상 외라는 표정이었다.

“자네가 짐의 왕조에 충성을 바치는 조건이다. 약속의 주체는 피오렌치아 정부가 아닌, 짐의 왕조와 그대 간의 약속이 될 것이야. 즉, 그대가 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피오렌치아 시민들의 권리도 철회될 걸세.”

아르투르의 제안을 레니에는 빠르게 이해했다.

“즉, 제가 죽거나 은퇴하기 전까지 자치권을 약속해주시겠다는 뜻이군요. 제가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정확하게 보았네. 자네가 피오렌치아를 관리하는데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충성 서약을 무르게 할 거야. 도시가 얼마나 오랫동안 자치권을 유지할 지는 자네에게 달려있지.”

“자치권을 연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까?”

“자네의 후계자, 혹은 수도 시민들이 왕실에 유능함과 충성을 증명한다면 연장을 고려해줄 수도 있지. 자유 도시의 가치란 짐에게 별로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는 그걸 목숨을 걸고 증명해보였고, 주장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러니 요구가 화답 받은 것이다. 이제 짐도 그대의 분별 있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네.”

레니에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자신의 생각을 반추하였다. 일이 끝나면 조용히 떠나 한적한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 생각이었건만, 왕을 모시는 굴욕을 겪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길이 없었다.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을 것이고, 자신이 이웃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봉사였다.

“레니에 대장. 왕의 은총이 내려졌는데 즉각 대답하지 않겠나?”

샤를로트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들릴 쯤, 레니에는 앞으로 나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무리아의 왕과 그 후계자께 제 검을 바치겠습니다.”

그의 선언에 아르투르는 앞으로 나서 인장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고, 레니에는 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피오렌치아의 레니에, 그대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인다. 충성에 대한 대가로 피오렌치아 인들은 그대가 요구했던 자치권을 얻을 것이다. 또한 그대의 가문이 피오렌치아의 깃발을 사용할 권리를 주겠다. 그대의 후계자부터는 자치권의 약속을 대신해, 별도의 남작령을 수여받을 것을 약속한다. 충의에는 사랑으로, 용기에는 영광으로, 배신에는 죽음으로 보상하겠다.”

아르투르가 검 등으로 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들긴 후, 레니에는 몸을 일으켰다. 대장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본 병사들도 잇달아 고개를 조아렸다.

레니에 대장이 장교, 병사들을 이끌고 대성당으로 향했다는 소식에, 대성당에 몰려들었던 피오렌치아의 시민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국왕 폐하 만세! 만수무강하소서!”

“왕께서 우리의 청원을 받아들여주셨다!”

민중파의 거두가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식은 즉각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러한 사건은 아주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그 날 저녁부터 많은 사람들이 왕께서 선정을 베푸실 증거라며 떠들고 다녔다.

그날 밤,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주권을 이양하는 행사가 있었다. 레니에는 길다란 황금 지휘봉을 비롯, 각종 상징물들을 아르투르에게 공개적으로 이양했다.

“한때는 시민들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저희의 보호자가 되신 폐하께 군단의 지휘권을 넘깁니다.”

지휘봉을 받아든 아르투르는 높이 들어올렸다.

“어려운 결단을 내린 레니에 경의 결단을 치하하는 바이다. 짐은 약속했던 대로 그대들의 전통을 존중하며, 법에 따라 통치하는 하는 정의로운 군주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그림은 아르투르에 의해 정교하게 기획된 자유 도시에 대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꽃 문양을 휘날리던 도시의 깃발들이 내려갔으며, 탑과 성검의 문양이 그려진 왕의 임시 깃발이 계양되었다. 마음속으론 반항을 꿈꾸던 이들조차 이젠 고개를 조아렸다. 레니에 대장조차 스스로 복종했다면 더 이상의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

행사가 끝난 밤, 아르투르는 거처를 대성당에서 옛 정부 청사로 옮겼다.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있으니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왕의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레니에 대장에게 너무 많은 권리를 내어줬다고 보는데.”

샤를로트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아르투르가 갸웃하는 표정을 지었다.

“넌 언제나 상황을 예리하게 봤잖아. 너답지 않은 판단인데.”

샤를로트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레니에 대장과 그 일파가 반항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거야. 너 스스로 한 약속을 철회해야 할지도 모르고. 네가 절대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니까 우려하는 거야.”

그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아르투르였다.

“피오렌치아의 자치권은 눈속임에 가깝다는 걸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자치권이 있다 한들, 모두 진짜 권력인 왕실에 줄을 대려고 난리를 칠 텐데 레니에 대장 혼자서 뭘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그렇게 예민할 이유가 없잖아.”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그녀를 또렷하게 쳐다봤다. 숨겨진 불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바는 따로 있었다. 진짜 문제는 자치권이 아니겠지.

“모르는 척하면 곤란해. 샤를로트. 넌 정치적으로 아주 영민한 사람이지. 그러니 이 자치권이 명목상에 불과하다는 점도, 레니에를 순교자로 만드는 것보단 적당히 포섭하는 게 낫다는 점도 잘 알겠지. 내가 눈치 챈 걸 네가 모를 리가 있나? 말해봐. 진짜 문제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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