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레니에는 정처 없이 주둔지를 배회했다. 군홧발에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마음이 부숴 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이념도, 국가에도 열정적인 지지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가 멸망하길 바라진 않았다. 자유 도시에서 왕정으로 바뀌는 것은 단순한 변화라고 여기기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왕의 통치를 받는 신민이 된다니, 이건 상상도 못해본 일이야. 어떻게든 피오렌치아가 자유 도시로 남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수한 별들이 자신의 회한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이시여, 정말로 피오렌치아는 멸망해야만 합니까?
“백인대장님, 날씨도 추운데 안 주무시고 뭐하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안토니오가 있었다. 경계 근무를 서다 나온 이 젊은 병사는 걱정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마음의 추위를 달래고 있다네. 앉아있으면 미칠 것 같거든.”
비탄이 섞인 레니에의 말에, 안토니오는 조심스레 상관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표정은 일찍이 본 적 없었다. 고뇌로 인해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소문대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겁니까? 이렇게 고민이 많으신 모습은 처음 봅니다.”
한숨을 쉬는 레니에.
“부정하지 않겠네. 무엇을 골라야 자네들에게, 이웃들에게 살만한 미래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떤 행동을 해도 불행이 닥쳐올 것 같네.”
“그런 대장님을 보고 반역자니, 비애국자니 지껄이던 놈들은 이미 사생아 왕자의 밑으로 달려가 국왕 폐하 만세를 외치고 있잖습니까. 이제 진짜 애국자가 누군지 밝혀진 겁니다. 대장님이야말로 마지막 애국자세요. 우리 자유 도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건, 오직 대장님뿐이십니다.”
레니에는 경쾌하고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야. 난 우리 도시 모두를 대표할 수 없어. 게다가 애국자도 아닐세. 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자 가장일 뿐일세. 내가 나라에 바라던 건 그저 이웃들이 웃으며 살아갈 수 있는 곳일 뿐이야. 이런 과중한 역할은 맡고 싶지도 않았어.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나 싶군.”
안토니오는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도 제 마음 속의 애국자는 대장님뿐이십니다. 무엇을 명령하시건 저희 병사들은 따를 것이고, 대장님과 운명을 같이할 겁니다. 그게 저희 대장님에 대한 보답이자 도시에 대한 충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단호히 고개를 젓는 레니에.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해선 아니 되네. 그건 정말 큰 비극이야. 내가 뭐라고 자네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나? 직장 상사인 나 따위보단 자네 가족, 특히 자네랑 평생을 같이 할 약혼녀를 생각해. 그녀는 뭐라고 하던가?”
레니에의 말에 안토니오는 표정이 굳어졌다.
“대장님. 제발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기껏 다잡은 마음이 흔들리잖습니까. 저흰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사내들입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은 게 수치라는 건 잘 압니다. 가족들이 뭐라고 하건….”
“아니야.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레니에.
“진짜 수치는 헛된 일에 목숨을 낭비해서 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지,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닐세.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건 자랑스러운 일이야.”
레니에의 말을 들은 안토니오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자신이 레니에 대장의 소집에 응하겠다고 했을 때,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약혼녀는 눈물로 저어했고, 부모님도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다. 동료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월급은 연체된 지 세 달이 넘었다. 그들을 이끄는 건 오직 레니에 백인대장의 인품뿐이었다.
“그것 보게. 내가 두라노에서 뭐라고 했었나?”
머뭇거리다 답하는 안토니오.
“…피오렌치아의 사내가 목숨을 바칠 건 사랑뿐이라고 하셨죠.”
“그래. 군대에서 만난 늙은 아저씨와 아리따운 젊은 약혼녀. 누구를 더 사랑해야겠나? 누가 자네 아이를 낳아주고 백발이 되도록 해로할 사람인건가?”
안토니오는 풉하고 웃고 말았다. 진지해야하는 순간이건만!
“대, 대장님. 분위기 깨지 마십시오! 대장님 좋아서 모인 겁니까! 나라 지키자고 모인거지!”
표정을 붉히며 씩씩대는 안토니오를 보며 레니에는 진심으로 크게 웃었다.
“아네. 알아. 나라가 멸망하면 이전처럼은 살 수 없겠지.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하네. 우리가 왜 나라를 지켜야하는가?”
생각도 못해본 질문이었다. 순박한 청년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야… 그래야 돼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나라가 우리 가족을 지켜주잖아요?”
말을 내뱉은 안토니오는 자신의 발언에 위화감을 느꼈다. 피오렌치아는 무법천지의 혼란 상태로 접어든 지 오래, 가진 자와 힘 있는 자들만을 위한 정부가 된 지 오래였다. 이미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지켜야한다는 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선 상식이 되었다.
“뭔가 이상한 걸 느끼지? 결국 우리의 조국, 자유 도시 피오렌치아는 외적이 침입하기 전에 스스로 이미 무너진 걸세. 우리는 서로를 돌보지 않았으며, 격렬히 증오하며 싸워오기만 했지. 그 대가를 이제 돌려받는 걸세. 우리가 이웃들에게 관심을 내보였다면, 힘들더라도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날은 피할 수 있었을 거야.”
레니에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져가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나라의 멸망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말았으니까. 무슨 방법으로도 자유 도시 피오렌치아는 회생될 수 없었다. 끝이 난 것이었다.
문제는 그걸 수용할 수 있는 지의 여부뿐.
“하, 하지만 아직 대장님과 저희가 있잖아요! 저희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간곡함이 느껴지는 안토니오의 목소리였다. 그 역시 일말의 희망을 바라고 있었다.
“이미 너무 늦었네.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레니에는 안토니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다 같이 힘을 합쳐 사생아 왕자와 피오레 가문을 둘 다 몰아내더라도, 우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거야. 이미 새로운 왕에 대한 지지를 드러낸 사람이 너무 많거든.”
자유 도시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말을 잇는 레니에.
“그 상황에서 자유 도시를 지키는 방법은 하나뿐일세.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던 이들을 모조리 잡아가두고, 추방하고, 처형하는 거야. 그런 짓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우린 자유 도시가 아닐 걸세. 대신 내가 다스리는 참주정이 되겠지.”
레니에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 말을 이어 갔다. 두 사내의 눈시울이 모두 붉어졌다.
“나, 레니에는 이웃과 친구들을 죽이며 추하게 몰락하진 않을 걸세. 좋은 가장, 좋은 이웃으로 남을 거야. 괴물이 되진 않을 거라고.”
“그러면 저흰 이제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대로 얌전히 해산하고 왕의 처분을 기다려야 됩니까?”
혼란스럽고 두려운 표정을 짓는 안토니오.
“그건 아니야. 피오렌치아가 멸망하더라도 우린 삶을 이어나가야지. 패전이 확실하다면 몸값이라도 올려 받아야하지 않겠나. 그게 내 마지막 사명이 될 걸세.”
***
피오렌치아의 대성당 안.
“… 따라서 작금의 상황을 고려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저는 군대를 해산하고 떠나겠습니다. 다만, 제가 내건 조건들을 폐하께서 맹세해주셨으면 합니다.”
레니에는 급조된 나무 옥좌에 앉은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왼편에는 샤를로트가 앉아있었고, 양 옆으로 아직은 앳된 청년 티가 나는 왕의 종자와 용병 출신으로 알려진 중년의 궁수가 기립해있었다.
“자네가 내건 조건들을 간추려보지. 현지 관습을 존중하고, 독립적인 사법권을 보장하며, 세금 인상은 참사회의 동의 아래서만 가능하다. 또한 시내에는 군대를 주둔시키지 마라. 이게 맞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폐하.”
레니에의 막힘없는 시선을 느낀 아르투르는 상반된 감정을 느꼈다. 멋있었고, 재수 없었다.
“레니에 대장. 짐은 자네를 높이 사네만, 이런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폐하께서는 그렇게 느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스러운 말투를 내보이는 아르투르.
“즉, 짐이 어떻게 느낄지는 중요하지 않다?”
레니에는 여전히 막힘없이 답했다.
“폐하께서는 피오렌치아에 자치권을 주시겠다고 대중들 앞에서 약속하셨지요. 말씀하신 바를 공식화하실 것을 요구할 따름입니다. 피오렌치아에 정부가 붕괴한 지금, 군대는 피오렌치아의 민의를 대변할 수 있는 마지막 기관입니다.”
샤를로트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차가운 시선을 쏘아 보냈지만, 레니에와 장교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그건 틀렸군요. 레니에 대장. 새 왕에 대한 지지가 당신들에 대한 지지보다 큽니다. 민의가 어디 있는지는 명확한거죠.”
쓰게 웃는 레니에.
“민중을 대변하는 명문가의 마지막 후예에서 새로운 왕국의 왕비로 모습을 바꾸셨군요. 피오레 가문에게 아주 잘 배우셨습니다. 이젠 제 도움이 없어도 잘 살아남으실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부친께서 원하시던 모습은 아닐 겁니다.”
샤를로트는 처음에 표정이 확 굳었지만,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원래 새로운 집을 지으려면 옛 집을 부숴야하기 마련이죠. 장담컨대 새로운 왕의 통치는 그동안의 혼란보다 훨씬 나은 삶을 가져다 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걸 원하고요.”
어깨를 으쓱이는 레니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희는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만 새로운 체제를 납득하겠습니다.”
아르투르는 짧은 신음을 냈다. 감탄이자 한탄이었다. 도시는 대부분 상공업자들이 지배하는 공간이었고, 이들은 땅에 묶인 농민과 달리 누군가에게 충성을 잘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었다.
“왕비를 피오렌치아 인으로 고른 의미를 알고 있는가? 레니에 대장. 이건 짐의 통치에서 그대들이 특별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조항들을 약속해주실 데 문제가 없으리라 봅니다.”
눈을 찌푸리는 아르투르.
“자유 도시의 시민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바가 없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두라노 인들과 자네들은 정말 다르구만.”
“외람되지만 두라노 인들은 폭정에 익숙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피오렌치아는 도시들의 도시이며, 폐하를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로 만들어드릴 곳입니다. 저희는 자유인으로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가주들도 왕들에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들이 받는 특권에 비하면, 저희의 요구는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아르투르는 불쾌함을 드러내는 거친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은 피오렌치아의 상황과 같지 않네. 공을 세운 선조들이 있거나,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지. 지금 피오렌치아 정부군은 얼마나 많은 기사를 거느리고 있는가? 병사들은 얼마나 자네에게 충성하지?”
자신만만하게 물어오는 아르투르를 보며 레니에는 심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나서는 원하는 바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으리라.
“제가 거느린 군대는 일 만이 넘지만, 예상컨대 절반은 왕비님을 따라 창부리를 돌리겠지요. 나머지 절반은 무서워서 달아날 것입니다. 남은 이들도 얼마나 자유 도시에 충성을 바칠지는 모르겠군요. 그러나 적어도 저는 자유 도시를 위해 싸울 겁니다.”
레니에는 아르투르를 향해 보내는 당당한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아르투르 역시 호기롭게 시선을 맞받아쳤다.
“자네가 요구하는 특권은 기사 한 명에게 내주기엔 너무 크네. 더 이상 제시할 게 없다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겠네.”
레니에가 표정이 굳을 때, 한 젊은 장교가 앞으로 나서 당당히 소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