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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61화 (16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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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체스판 위를 숙련된 시계공처럼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공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아르투르는 손을 뻗어 왕을 잡고 쓰러뜨림으로서 승복 선언을 했다.

“지금의 요구를 위해 정말 오랫동안 준비한 모양이네.”

긍정도, 부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태도.

“사실이야. 그런데 정말로 될 거라는 확신은 없었는데, 정말로 기회가 오니 희열이 드는데?”

슬며시 미소를 짓는 샤를로트를 향해 되묻는 아르투르.

“언제부터 준비한 거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난 약혼자가 있던 상황이었고, 그 뒤에도 성검 한 자루 빼면 아무것도 없던 방랑기사였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공을 들여온 건 좀 이상해 보이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강렬히 마주쳤다. 그녀는 거짓 없는 맑은 태도로 답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이 사람이 어느 정도 그릇인 지, 어디까지 갈만한 잠재력이 있는 지 뚜렷하게 보이거든. 하이에버에서 널 만났을 때 확신했던 건 네가 죽지 않는 이상 성공할 거란 거였어.”

“그래서?”

“내게 가장 오랜 비원이 있다면, 정치적 이상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나는 거였어. 아무리 잘나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으니까. 네가 농노 한 명 구하겠다고 싸우러 간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 믿을까?”

아르투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런 것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건 솔직히 믿기 좀 힘들군.”

그런 아르투르의 반응에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샤를로트는 양손을 양 옆으로 으쓱 들었다.

“하지만 사실이야. 그때부터 네가 잘 되길 바랐고, 기회만 되면 옆자리로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계획을 좀 짜봤을 뿐이야. 어차피 네 성공에 대해선 의구심을 품지 않았지. 농노들을 위해 동료 귀족들을 죽이고 살아나온 사람이라면 뭐든지 가능했을 테니까.”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켰다. 자신이 샤를로트에게 보아온 모습은 권력을 타고 오르려는 모습뿐이었다. 그녀는 이곳의 여느 정치가들처럼 의도를 숨기고, 위장하는 데 능했다. 그러니 진심을 알 수 없는 건 불가피했다. 그녀의 말의 진위를 알고 싶다면 직감에 의존해야했다.

체스판에서 시선을 때어내는 그녀.

“아까도 말했지. 내 아버지도 고귀한 분이셨다고 말이야. 하지만 실패하고 비참히 죽었지. 당시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깨달은 건 때가 올 때까지는 침묵하고 기회를 엿봐야한다는 거였어. 패자의 변명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 아르투르의 눈에 그녀가 나름의 진정성을 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세상으로 정면에 맞서고도 살아남았지. 네 그러한 점을 존경해. 아르투르. 난 해내지 못했던 거니까. 그런 네가 만들 나라가 어떻게 될 지 궁금해.”

샤를로트의 떨리는 눈동자는 거짓 없이 맑았으며, 목소리는 당당했다. 아르투르는 비로소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느꼈다.

“천년을 갈 왕조를 세우겠다고 했지. 나도 거기 함께 하고 싶어. 난 네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고, 내가 요구하는 자리에 합당한 자질들을 가지고 있어. 물론, 기사인 네 입장에선 내가 음험하게 보일 거란 점도 이해해.”

아르투르는 그녀의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느꼈다. 그녀의 재능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었고, 가문의 격, 개인적인 능력, 가치관, 살아온 경험은 모두 신 왕조의 어머니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존중할만한 정치적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조건의 여자를 내 마음이 썩 내켜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마음을 따르자면 자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성적인 매력은 있었지만, 그 이상을 넘지는 못할 호감이었다.

‘지금은 정치적 동료겠지. 하지만 평생토록 그녀를 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조건 없이 날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일까? 침대에서도 머리를 굴려야한다면 그건 영 내키진 않는데.’

궁금하면 물어보면 될 일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전적으로 상대를 신뢰할 수 있을까?”

미묘한 미소를 짓는 샤를로트.

“네가 만인의 명예로운 왕이 되는 게 목표라면, 대관식을 치르는 날부터 너는 누구도 믿지 못 할 거야. 네 신하와 백성들은 너처럼 고귀한 대의를 쫓는 이들이 아니니까. 반면에 네 권위와 힘을 이용하려는 자들은 주변에 가득해지겠지.”

“하기야, 그건 권력을 쥐는 이상 따라올 수밖에 없는 사명인가.”

“동의해.”

모든 기회에는 선택이 있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왕권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이지만, 그렇기에 사람 대 사람으로서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는 잃을 수밖에 없으리라.

아르투르의 머리에 떠오른 건 왕위에 오른 후 변해버린 큰형님이었다. 그 모습이 혐오스러웠건만, 이제는 이해가 가는 면도 있었다. 아르투르는 다시금 원점에서 샤를로트의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기존 왕국의 계승자였다면 무난한 사람, 가령 아델라이데 백작 같은 평범한 아가씨와 혼인을 했어도 아무 문제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은 새로운 왕국을 세워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특출 난 일에는 특출 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상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역할을 수행할 만한 사람이 달리 있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2인자야. 네가 세운 왕국이며,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되지. 네가 원하는 모습이 있으면 그렇게 바꿀 것이고, 불만스러운 게 있다면 고쳐줄 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왕과 왕비는 맡은 임무가 다른 것이지, 상하가 정해진 관계는 아니니까.”

그리고는 잠시 다시 고민하다 아르투르가 입을 열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다른 거다. 우리가 결혼했을 때, 정말로 우리가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그의 말에 샤를로트 또한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구보다 서로를 의지하는 사이는 될 수 있겠지. 우리의 목표는 같으니까. 평화로운 시대를 만들어서 후계자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것 말이야.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 공식적인 왕비의 지위뿐이야. 우리의 아이가 가질 후계자 지위만 확고하다면, 네가 누구를 사랑하는 지는 영영 묻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겠어.”

그리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샤를로트였다.

“이상이 레무리아의 왕께 라이랜더 가문의 가주가 드리는 제안입니다. 충분히 숙고하시고 답변해주십시오.”

그녀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아르투르의 대답이 들렸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지금 제안을 거절하고 배우자를 공석으로 두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기회보다, 당장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득이 훨씬 컸다. 왕이라면 모름지기 적시에 결단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대관식이 열리는 날, 그대는 내 옆자리에서 함께 들어가 왕비의 제관을 쓰게 될 것이다.”

***

며칠 뒤, 시외에 위치한 군대 막사.

“대장님. 정말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계실 겁니까?”

젊은 장교, 마르코는 분개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앉은 레니에를 촉구하고 있었다. 그의 뒤편으로는 다른 수십 명의 동료들이 있었다. 이 막사에 모인 이들이 피오렌치아 군대의 핵심이었다.

“대장님!”

레니에는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장교들을 바라보았다.

“마르코. 아직 난 귀가 멀 정도로 늙지 않았네.”

타이르듯 여유롭게 말하는 레니에의 목소리를 들은 마르코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샤를로트가 변절한 이후 빠른 속도로 왕당파가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민중파가 통째로 넘어갈 지도 몰라요. 멍청한 놈들, 피오렌치아 출신의 귀족을 왕비로 들인다는 소식에 헤벌레해서는….”

레니에는 마르코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피오렌치아 출신의 왕비는 곧, 현지의 관습과 사람들을 존중하겠다는 가장 강력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니 급격한 정국 반전의 한 수였던 것이었고.

“대장께서 내전을 두려워하시는 걸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도시가 멸망하는 걸 보고 계실 겁니까? 이대로라면 군주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놈의 세력이 더 불어나기 전에 쳐야 합니다!”

나지막이 고개를 돌려 묻는 레니에.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마르코는 단호하게 외쳤다.

“즉각 시내로 진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이미 모든 병력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내를 장악해 놈의 일당을 죽이고, 반역자들도 추포하겠습니다!”

레니에는 흠, 하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보아하니 나머지 장교들의 대부분은 마르코의 강권에 따라왔을 뿐, 미적지근한 태도를 내보일 뿐이었다.

“자네의 열정과 애국심은 존중하네. 헌데, 이 부분은 생각해보았나? 그런 식으로 대낮에 교황의 특사를 참살하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답답한 듯 소리치는 마르코.

“그런 사소한 문제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놈들을 없애고 나서 피오레 가문과 협상하던가 하면 될 일이지요! 왕정보단 피오레 가문이 낫습니다!”

레니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피오레 놈들이 우리에게 특사 살해의 죄를 뒤집어씌워서 숙청한 후 권력을 독점하겠지. 하지만 그전의 일부터 생각해보세. 우리가 포위한다고 아르투르가 순순히 죽어주겠나? 모두 그의 무위를 보았을 거고, 신성한 존재에게 축복을 받는 것도 보았잖나? 그것들은 어떻게 파훼할 건가?”

“그것은….”

결국 마르코도 뾰족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자, 마르코가 다그치듯 말했다.

“답답한 건 아네만 머리를 좀 식히게. 나라고 사생아 왕자가 마음에 들 것 같나?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마리오 형제가 사생아 왕자에게 죽었고, 평생 군 생활을 함께 해온 동지도 여럿 잃었다.”

레니에는 쓴 웃음을 지으며 젊은 장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군대 내부에도 변절자는 충분히 많았다. 이미 민중파의 많은 수는 추상적인 공화국이 아닌, 라이랜더 가문이란 이름에 충성을 바치게 된 지 오래였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보고 아르투르 쪽에 줄을 대러간 자들도 많았다. 전군이 하나가 되어도 해볼까 말까한 일에, 분열부터 되어있다면 지는 건 확정이었다.

‘순진한 마르코 군이 자기 친구들이 이미 배신한 걸 알면 펄쩍 뛰겠지. 우리 피오렌치아 인들은 자기 가족의 안위가 걸렸을 땐 기가 막히게 처신을 잘한단 말이야.’

다시 들려오는 마르코의 목소리가 레니에의 상념을 깨트렸다.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우리가 왕의 백성으로 떨어져야 하는 겁니까? 레니에 대장?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겠다고 하신 게 그런 의미입니까?!”

레니에는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마르코를 노려보았다.

“애송이! 말조심해라! 난 네놈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군 생활을 했어! 자유 도시가 얼마나 소중한 건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머리가 달렸으면 헛소리는 그만하고 생각이란 걸 좀 해라! 나라고 답답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레니에의 호통에 장교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알아들었으면 모두 나가 있어! 중요한 생각 중이니까! 내 명령 없이 군대를 움직일 생각은 꿈에도 말고!”

장교들은 경례를 하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마르코가 마지막으로 나간 후, 레니에는 품에서 봉인된 서신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오늘 오후에 시내에 나갔을 때 아르투르의 종자로부터 전달 받은 서신이었다.

‘주군께서 레니에 대장께 보내는 서신입니다. 꼭 읽어주십시오.’

레니에는 편지 끝에 독이 발라져있을까 싶어 전투용 가죽 장갑을 먼저 착용한 후 봉인을 풀었다.

편지를 읽어내려 갈수록 레니에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그의 눈은 커졌고, 편지를 꽉 쥔 손의 힘줄은 굵어졌다. 마지막 문단에 이른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다, 숨을 깊게 몰아쉬며 편지를 구겨 촛불에 태워버렸다.

타닥 - 타닥.

‘너무나 답답하군.’

레니에는 막사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은 항상 똑같은 자리에서 우아한 빛을 뽐내고 있다. 그들은 인간들의 고뇌 따위에 영향 받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멀리서 관조만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쓴 웃음을 짓는 중년의 군인.

‘새로운 시대의 개국 공신이 되느냐. 아니면 공화국의 마지막 불꽃이 되느냐.’

레니에는 두터운 손을 바라보며 문득 자신이 늙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가 살던 시대는 지나갔으며,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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