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60화 (16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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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 아가씨에게 도와달라고 하시죠. 이 상황에서 크게 도움 될 만한 능력과 배경이 되시는 분이니까요.”

아르투르도 항상 염두 해온 선택이었다. 단지.

“이미 그녀에게 정치적인 빚을 너무 많이 졌다. 그런 식이라면 왕이 된 뒤에 뭘 떼어줘야 할 지 몰라. 교황청과의 연결이 강한 것도 큰 부담이야.”

“반대로 생각해보시면, 오히려 밀접한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정론이군.”

아르투르는 팔을 괴었다.

“아직 찾아가지 않으신 건 내키시지 않기 때문이겠죠. 항상 등 뒤에 비수 몇 개쯤은 숨기고 계신 분이니까요. 하지만 고귀한 분들의 관계라는 게 원래 그런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형제인 레오폴트 백작님과의 관계에서도 이해관계는 항상 고려하시잖아요. 이상이 제 의견입니다. 종자가 주제를 넘었다면 죄송하고요.”

공손히 고개 숙이는 케이를 보며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짜식, 내 기분을 배려해주긴.

‘원점부터 점검해보자. 이미 난 그녀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고, 대가를 아직 지불하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이해관계가 겹치는데다가, 미래에도 그럴 공산이 높아. 그런데 왜 그녀는 침묵만 지키고 있지?’

다른 쪽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무언의 압박일수도, 혹은 먼저 탐나는 건 제시해보라는 뜻일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좋아. 난 바로 샤를로트를 만나러 가겠다. 두 사람은 여론의 동향을 좀 더 살펴봐.”

“네. 마스터.”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아르투르가 관저를 빠져나가자 케이는 부재중이란 푯말을 걸어둔 후, 뾰루퉁한 표정으로 카밀을 올려다본다.

“아저씨, 방금 말씀은 좀 무례했어요. 이제 왕이 되실 분이라고요. 그렇게 거칠게 말하시면 안되죠.”

불만 가득한 케이의 목소리와

“왕이 되실 분이니까 더 거친 조언을 해드려야지.”

당연한 듯한 답하는 카밀.

“남들이 보면 우리 마스터는 권위가 없다고 생각할걸요?”

“남들이 있었다면 공손한 척은 했을 거다. 애송아. 잘 들어라. 나리란 분들은 작위가 거창해질수록 고개가 빳빳해진다.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보고, 듣지. 그렇게 자기 세상에 갇히면 통치는 거기서부터 실패하는 거야.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왕이 폭군 밖에 더 될 수 있는 게 있겠느냐?”

해명을 들은 케이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표정은 불만이었다.

“하지만 아저씨 행동은 과했어요. 종신 충성을 맹세한 분다운 태도는 아니었다고요. 특히 아저씨는 굉장한 은혜를 입었잖아요. 그만큼 보답을 하셔야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카밀과

“내가 그분을 모시는 건 내게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신 분이기 때문이야. 물론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목숨만큼은 내어드리겠지만, 자유로운 생각만큼은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다.”

다그치듯 말하는 케이.

“그건 좀 불충한 생각 같은데요? 빨리 바꾸셔야겠어요.”

“양치기 녀석이 기사가 다 되가는구나. 그래. 네 말대로 불충이라도 어쩔 수 없다. 이 나이 쯤 되면 생각은 못 바꾸거든. 말 잘 듣는 충신은 네가 해라. 나는 주군의 심기를 거스르는 쓴 소리를 하는 모난 놈이 되겠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의 케이를 보고 카밀이 말을 이었다.

“이건 진지하게 하는 이야기다. 왕이건 대공이건 권력자들 곁엔 항상 입맛에 맞는 의견만 내는 똥파리가 고이기 마련이야! 주군께서 신하가 부족할 일은 없겠지만, 그들은 모두 주군의 기분에 어울리느라 입도 빵긋 못할 놈들 가득이겠지. 심복이 해야 할 일은 기분을 거스르면서까지 사실을 말해주는 거고.”

“…흐음, 말씀은 그럴듯하신데, 결국 불손한 태도는 하나도 안 바꾸겠단 이야기네요? 그러다가 내치기라도 하시면 어떡하시게요?”

“우리 주군은 도량이 커서 그럴 분이 아니다. 하여간 여론이나 알아보러가자 이놈아. 나는 선술집을 돌면서 알아보겠다. 높으신 분들 만나는 건 네가 하고.”

“네. 그렇게 하죠.”

***

아르투르가 미친 수도승을 잡아들인 이래, 그는 도시 최고의 실권자였다. 실력자들은 각자의 야망을 품은 채 그의 행동을 주목해왔었다. 아르투르가 피오렌치아를 새 왕국의 수도로 삼겠노라 선포했을 때, 피오렌치아의 전통적인 유력자들은 놀라움과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교황 특사께선 왕족들이랑 자라서 정말 이곳 물정을 모르시나봅니다. 피오렌치아 인들이 얼마나 콧대가 높은지 알면 그들을 신민으로 삼겠다는 헛소리를 하진 못했을 텐데. 두라노 촌놈들이나 그런 이야기에 열광하지.”

미소를 짓는 피오레 가문의 굴리엘모의 맞은 편에 앉은 것은 중년의 군인과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었다.

“레니에 대장. 당신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소?”

“방심하지 마시오. 그렇게 굴다가 저번 전쟁을 완전히 말아먹었지 않소.”

이마를 꿈틀거리는 굴리엘모.

“탈영병 대장 주제에 그런 소리나 할 자격이 있나?!”

“내 부하들을 화살 받이로 내보내려 한 게 누군데 그러시오? 나는 같은 상황이 되어도 같이 똑같이 할 거요.”

두 사람은 서로 적의가 담긴 시선을 교환했다. 먼저 눈을 내리깐 것은 굴리엘모였다.

“하아. 피오렌치아 인들끼리의 힘겨루기는 여기서 그만두지. 현존하는 문제에 집중합시다. 놈이 대놓고 왕이 되겠다고 한 이상, 우리끼리 힘을 합친다면 외세를 몰아내자는 대세를 만들 수 있을 거요. 당신도 왕을 섬기는 신하나 될 생각은 없지 않소?”

면피용 미소를 짓는 굴리엘모와 달리, 레니에 대장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가식적인 태도가 진의를 못미덥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피오레 가문을 모실 생각도 없단 말이오. 사생아 왕자가 우리 도시를 손에 넣게 된 이유도 당신들의 바보 같은 통치 때문인데, 뭘 믿고 또 맡기란 건지? 답은 하나요. 귀족제를 폐지하고 진정한 자유 도시가 되는 거요. 이제는 소수의 상인 귀족들이나 그 동조자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야 한단 말이오.”

“미개한 수도승 놈이 가난뱅이들을 앞세워서 정부를 전복 시키려고 할 때, 우리 지시만 당신이 따라도 이 사단은 안 났을 텐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나 할 거요?!”

굴리엘모는 분노를 꾹 눌러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레니에 대장은 폭발해버렸다.

“그건 당신들이 수십 년간 애국을 빙자해서 개혁을 거부해온 까닭이겠지! 고생을 좀 해보았으니 당신들도 달라질 줄 알았건만, 변한 게 하나도 없군! 이런 식으로면 협상은 하나 마나다!”

레니에는 즉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의 측근들도 흉흉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레니에 대장! 우리 가문이 힘을 잃은 건 잠깐이지만, 여전히 대륙 각지에 수많은 세력이 있다는 걸 잘 알 거요! 시간은 우리 편이란 점을 명심하시오! 지금 우리 측에 합류한다면 대장과 당신의 측근들도 귀족 사회로 받아주겠소. 새로운 명문가들이 탄생하는거지!”

사나운 시선으로 굴리엘모를 노려보는 레니에.

“지금 네 말이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면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할 거다. 네놈들이랑 함께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야!”

“돌아와! 그런 식이면 우리도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아르투르 놈을 앞두고 우리끼리 분열할 생각이란 말이냐?!”

그러나 레니에 대장의 무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두 집단 간에는 너무 얽힌 바가 많았다.

***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피오렌치아의 동쪽 성벽 끝, 아름다운 백색 저택이 하나 있었다. 라이랜더 가문의 본거지. 지금은 호위병을 제외하면 아무도 머물지 않는 그곳 한 가운데서, 샤를로트는 체스판을 앞에 둔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체스는 흑과 백으로 나뉘어 각자 진영을 이루며 대치하는 게임이었다. 귀족들의 오랜 취미이자, 훈련의 일종이었다. 샤를로트는 생각을 정리해야할 때마다 이 낡은 체스판에서 홀로 수를 계산하곤 했다.

백군이 먼저 시작했다. 백의 졸병들이 전진한다. 이들은 가장 수가 많지만 아주 약했다.

‘피오렌치아의 실력 있는 집단은 셋. 우선 지금 강한 건 레니에 대장을 따르는 민중파야. 숫자도 아주 많고, 군사력도 쥐고 있지. 대장은 매수 될 만한 사람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평범한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는 게 목표일거야. 동시에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이고.’

백이 두었으니 흑이 할 차례였다. 졸병에는 졸로 맞서는 법. 흑과 백의 졸병들이 맞서 전진하며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그러나 흑의 졸들은 백의 졸들의 견고한 연계에 막혀 불리해졌다.

‘피오레 가문이 대표하는 상인 귀족 집단은 수 백 년 간 특권을 누려오던 자들이야. 실질적인 지배자들이었고. 자금이 있고 해외 세력의 지지를 받기에 장기적으론 가장 유리한 집단이야. 특히 불안정한 정국이 오래 지속될수록 이들의 영향력이 확대되겠지.’

이제 나서는 것은 흑의 중요한 장기말들이었다. 기사, 주교, 성 등이 나서자 백의 졸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이미 그들이 고용한 용병대가 피오렌치아로 접근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아르투르를 왕으로 모시자는 파벌. 당장은 수도, 권력도 떨어지지만, 본인이 괜찮은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고 교회의 지지가 있기에 판 자체를 뒤흔들 잠재력이 있다. 문제는 그런 잠재력을 어떻게 현실로 이끌어 내느냐 겠지.’

백군의 입장에서 흑군에게 응전하기 위해 건너편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 굳은살과 잔 상처가 많은 큼직한 손이 백군을 움직였다. 왕이 전면으로 나서는 수였다. 자연스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아르투르.

“생각보단 늦었네. 더 빠르게 날 찾아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는 걸 알잖아. 피오렌치아로 오라고 제의한 것도 너고, 유력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지를 표명했던 것도 너, 교황청이 나를 왕으로 추대할 의사를 밝힌 데도 영향을 끼친 것과 두라노에서 날 도왔던 것까지 합치면 이미 갚아야 할 부채가 가득하잖아.”

아르투르는 고개를 들어 샤를로트를 마주보았다.

“여기서 더 움직여달라고 부탁하려면, 이후에 네가 대체 뭘 요구할까?”

샤를로트는 슬며시 웃더니, 다시 수 싸움을 벌였다. 왕은 강력한 장기말이었지만 움직일 수 없게 포위를 당하면 게임이 끝났다. 상대가 도박적인 수를 낸 이상, 자신도 비슷한 강도로 받아칠 수밖에 없으리라.

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교전.

“그렇지만 나만한 적임자도 없잖아. 현지인들이 친근감을 가지는 토착 귀족에, 기반이 되는 세력도 있고 무엇보다 이곳 사정을 잘 알고 다룰 줄 알지.”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정치적 싸움만큼은 내가 아는 최고 중 하나야. 어디서 배웠나 궁금할 정도야. 게다가 좀 알아보니 네 가문, 이곳 민중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높더군. 귀족 가문임에도 민중들을 위해 움직여줬다는 평판이 있던데.”

쓰게 웃는 샤를로트.

“우리 가문을 몰락시킨 평판이지. 귀족들 사이에서 도드라져서 민중의 편을 들겠다는 건 부주의한 결정이었어. 무모함 덕분에 나는 아버지 얼굴을 동상으로만 보았어. 오빠들은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다 의문의 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지금 연금되어 있어. 내가 마지막 생존자지.”

체스판 모든 곳에 걸쳐서 흑과 백이 교전을 벌였다. 한치 앞을 알기 힘든 계산이 오간다.

“네 부친은 훌륭한 분이던데, 그분처럼 민중을 사랑하나?”

“나도 피오렌치아 인들을 사랑해. 하지만 믿지는 않아. 우리 가족이 위험할 때 지켜주지는 못했거든. 힘이 부족했었는지, 그럴 의사가 없었는지는 모르지. 사실 중요하지도 않고.”

샤를로트는 체스판 위에서 공세의 강도를 높였다. 이번 공세에 판의 승패가 달려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었다. 장기말들이 하나, 둘 판 위에서 사라져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투르.

“그렇게 된 구도였군. 민심이란 건 변덕스런 면이 있지. 가족을 해친 건 피오레 가문일거고, 널 살려두고 후계자와 약혼을 시킨 것도 그런 구도였군. 반대파를 다독이면서 위협할 수 있으니까.”

“역시 궁정에서 자라서 감각은 괜찮네. 덕분에 난 피오레 가문 내에서 아주 미묘한 위치였지. 인질이자, 향후 가문의 일원이 될 거였으니까. 그 시절은 힘들었지만 유익했어. 내가 원하는 걸 얻는데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던 시절이었거든.”

아르투르는 공세로부터 왕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여러 장기말을 내주었다. 샤를로트의 공세는 갈수록 약해져갔고, 왕은 졸병들과 함께 전진했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최고들에게 배울 기회였거든. 공감대도 형성했으니 이제 말해봐라.”

아르투르의 또렷한 녹색 눈동자가 샤를로트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고 날 도왔지? 네게 지금 이상의 조력을 요구하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할 것은 뭐냐? 더 이상 무엇도 숨기지 말고 네 의사를 밝혀라. 신용할 수 없는 자에게 더 이상 빚을 질 수는 없다.”

샤를로트는 흑의 여왕을 들어, 백의 왕의 정면에 강하게 내려두었다. 둔탁한 마찰음이 지나갔다. 체크 상태가 되었으니, 왕이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면 게임은 끝이 나는 상황이었다.

“왕조의 어머니가 되길 원해. 왕국 2인자 자리. 그게 내가 바라는 유일한 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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