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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59화 (15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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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의 연설이 있던 후, 그 날 당일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민들은 대성당을 끊임없이 찾아왔다. 피오렌치아 인들의 신앙심이 갑자기 두터워진 까닭은 아니었다. 아르투르와 거래를 하려는 뱃속이 시커먼 야심가들, 그를 비난하려는 성난 사람들, 진지하게 아르투르를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지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들, 그저 유명인과 한번 이야기나 나눠보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모두 몰려든 까닭이었다.

“아르투르는 물러가라! 사생아 따위가 왕이 될 자격은 없다! 우리는 너를 지지하지 않는다!”

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는 무리들에게 아르투르는 터덜터덜 다가가 말했다.

“자네들 뭔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군.”

“변명은 받지 않겠다! 우리는 공화국 시민이다!”

“짐은 지금 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게 아닐세. 왕은 신의 선택을 받아서 되는 거지, 백성들의 선택을 받아서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미 짐은 피오렌치아의 합법적인 왕일세. 천사의 가호를 받는데다가, 교황 성하의 인정도 받았거든.”

아르투르의 말에 더욱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시위대였다.

“이것 봐라! 놈이 시커먼 뱃속을 드러냈다! 무력으로 도시를 짓밟지 않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아르투르는 친절한 태도로 설명을 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그대들의 전통을 존중해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지, 정당성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피오렌치아의 주권은 짐에게 귀속되어 있는 걸세.”

“우우! 천사고 교황이고 필요 없다! 개소리 집어치워!”

이번에는 오히려 피오렌치아 시민들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이란 거스를 수 없는 구호였다.

“형씨, 그쯤 합시다. 중간까진 좋았는데, 마지막 말은 선을 넘었어.”

“누굴 다 이단으로 만들 셈인가? 썩 꺼져! 이놈들아!”

당황하여 말을 더듬는 시위대.

“어, 어, 음. 아, 아무튼 아르투르는 물러가라!”

아르투르는 피식 웃으며 시위대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음. 신앙심이 부족한 친구들이군. 아무튼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자유 도시의 전통이니 존중하겠네.”

아르투르의 강렬한 반응을 기대하던 반대파는 크게 아쉬워했다. 군주들의 논리와 자유 도시들의 논리는 크게 충돌했으며, 본질적으로 두 계급은 이질적이었다. 이런 면모가 부각 될수록 놈을 쉽게 내몰 수 있었는데, 이렇게 가볍게 넘어가버리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안경잡이 사내였다. 아르투르는 아직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공언해놨지만, 사내는 일부러 왕에게 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레무리아의 위대한 왕이시여! 비천한 당신의 종이 전능한 군주를 뵙나이다!”

케이가 다가와 아르투르에게 귀엣말을 했다.

‘마스터, 저 자는 웅변가로 이름을 날리던 변호사라고 합니다. 꼬투리 잡히시지 않도록 주의하시지요.’

‘변호사가 뭐냐?’

‘재판에서 변호인을 대신해서 말해주는 직업이라고 하는군요.’

‘별 해괴한 직업이 다 있군. 알겠다.’

그렇지 않아도 아르투르는 꼬장꼬장한 표정과 불만 가득 찬 눈빛을 보며 자신의 실수를 유도하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

“일어나게. 그대는 짐의 신하일수는 있어도 종 일수는 없으니.”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허나, 왕이라 함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모두의 경배를 받는 자 아닙니까? 폐하께서 피오렌치아를 다스리신다면 저희가 모두 이렇게 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노골적으로 말꼬리를 잡으려는 의도가 보여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교묘히 웃는 변호사.

“대답해주십시오. 폐하가 왕이 되시면 저희는 종이 되는 겁니까?”

아니라고 하면 왜 무릎을 꿇어야하냐고 따지겠지. 애초에 이런 놈 상대로 필요 이상의 말싸움 해줄 이유가 없었다.

“종이라고 부르건 백성이라 부르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짐의 신민들은 누리던 생활을 그대로 누릴 것이고, 짐의 통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온전히 재산을 가지고 떠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자, 다음 사람!”

“제 질문이 끝나지 않았….”

“다음 사람!”

케이에게 끌려 나가는 변호사를 보며 레오폴트는 비웃음을 지었다.

“어디다 대고 말장난이나 치려고.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 패줄까? 아니면 혀를 뽑아?”

“그건 좀 과해. 내버려 둬. 여기 전통이니까.”

“저런 헛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참수하고 싶지 않냐? 어떻게 참는지 모르겠네.”

레오폴트의 생각이 낯설어진 건 언제였을까. 자신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건 양측의 문화가 다르니 조율할 문제였지, 한 측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강요할 문제는 아니었다. 책임감 있는 통치자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했다.

‘녀석과는 분명히 같은 스승들 밑에서 자랐건만, 하는 생각은 이제 정말 달라졌군.’

아르투르는 자신이 노력해야하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타고난 것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좀 더 권위를 내려놓고 다가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이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군. 오히려 홀가분해.’

아르투르는 미소를 지으며 재차 외쳤다.

“자, 다음 사람!”

이번에 들어온 자는 고급스러운 가죽 코트를 입은 뱃살이 두둑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인다.

“저는 직공길드의 대표로서 아르투르 공을 뵈러 왔습니다.”

“예는 그쯤이면 충분하군. 직함을 먼저 말한 걸 보니 무언가 청할 게 있어서 왔겠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짐은 간결하고 진솔한 대화를 좋아하니, 직설적으로 말해주게.”

이리저리 말을 돌릴 생각이던 상인을 헛기침을 했다.

“역시 젊으신 분이라 성격이 급하시군요. 좋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희 직물 상인들은 공을 지지하길 원합니다. 직물 산업 종사자도 많고, 평판도 좋으므로 저희의 지지는 여론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그런데 지지에 대한 대가로 뭐를 내놓을 거라고 물어보는 것이군.

“구체적으로 바라는 바를 말해주게.”

“아니, 보답을 바라고 말씀드린 것이….”

피식 웃는 아르투르.

“자네 상인들의 화법은 짐이 좀 알지. 힘이 있는 자라면 솔직하게 자기 요구를 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다고 한들 자네들을 부도덕하다거나 무례하다고 보지 않을 걸세. 기사들은 훨씬 거친 어투로도 말하거든.”

“그렇다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세 혜택을 주십시오.”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몇 년이나 필요하겠나?”

“폐하의 왕조가 지속되는 한, 영구적으로 말입니다. 이미 서약서도 써놨습니다. 이곳에 서명만 해주시면 저희 직공 길드는 바로 지금부터 폐하의 치세는 위대해질 것이라고 칭송할 것입니다. 대가는 싸진 않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하실 겁니다.”

아르투르는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짐이 숫자 계산엔 능하지 않네만, 그게 말이 되는 요군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게.”

“가격이란 건 언제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입니다. 지금 공께서는 어느 유력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계십니다. 저희의 지지가 더해지면 다른 유력가들도 폐하의 세력에 가담할 지 저울질을 시작할 것이니,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당당하게 말해오는 직물 길드장. 아르투르는 그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어서 웃었다.

“좋아. 솔직하게 말하니 대화가 통하는군. 고려는 해볼 테니 서약서는 두고 가게. 하지만 가능성이 높지는 않군. 자네들에게 그 정도 혜택을 주어버린다면, 피오렌치아의 다른 유력 세력에게도 같은 약속을 해야 할 거야. 그러면 짐은 허수아비 왕이 되겠지.”

“흠. 저희의 지지가 그만한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제안을 무르고, 같은 제안을 피오레 가문에게 하러 가겠습니다.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시는 날이 올 겁니다.”

상인은 쯧, 하면서 혀를 차더니 인사도 남기지 않고 자리를 떴다.

“잘 가게! 다음에 또 보지! 자네들은 그러다가 반도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 짐은 피오렌치아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왕이 되는 건 확정이란 말이다!”

이후로도 비슷한 종류의 거래를 제안해온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으나, 대부분은 아르투르가 보기에 요구가 아주 과했다. 이들은 아르투르를 주군으로 모실 여지는 남겨두었지만, 아주 비싼 값을 부를 생각이었다. 그 사이 케이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소문을 염탐해왔다.

“말해봐라. 케이. 다들 어떻게 날 생각하고 있더냐?”

“으음. 다들 마스터가 괜찮은 지도자, 존경할만한 기사라고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들 굉장히 거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말하건데 친근감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왕이 백성의 친구일 수는 없는 법 아닌가?!

….

그래서 사람들이 더 이상 안 오나?

“어쩐지 일반인은 와서 구경만 하다 가고, 뱃속이 시커먼 놈들이나, 날 욕하려는 놈들만 말하고 가더라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 같으냐? 케이?”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 같습니다. 마스터께서는 어찌 되었든 여기서는 외부인이세요. 거기다가 낯선 관습을 가진 사람이니 더더욱 이질적인 사람으로 느껴지겠지요. 대화를 오래한다고 해도, 대단한 분인 건 알겠지만 왕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그렇다고 진짜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

아르투르는 많은 방면에서 케이가 자신보다 감각이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빠른 눈치 파악과 열린 사고는 자신이 결코 가지지 못할 그의 강점이었다.

“카밀, 자네 생각은?”

“정말로 제 의견을 바라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카밀.

“얼마나 매운 말을 하려고 그러나? 아무튼 말해보게.”

카밀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주군께서는 불가능한 과제에 도전하고 계신 겁니다. 도시민들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외지인을 왕으로 섬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은혜를 조금 입었다 한들, 그것이 주인으로 모실 이유는 되지 않지요.”

“내가 조금 도와준 게 아니지 않나?”

“도시 사람들은 낯짝이 좀 두껍습니다. 주군께서 왕족, 기사들과 함께 자라셨기에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다. 차라리 공포로 위압해서 복종을 받아내는 쪽이 현실적인 대안이셨을 겁니다. 이제 와선 누가 되었든 현지 협력자를 구하셔야지요.”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며 한동안 말을 쉬었다.

“자네는 내가 공포로라도 복종을 받아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단호히 고개를 젓는 카밀.

“아니지요. 그렇다면 아르투르가 아닌, 흔해 빠진 영주들 중의 한 명에 불과했을 겁니다. 주군께서는 명예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 길을 가시는 한 저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겁니다.”

달리 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충성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르투르는 그것이 무척 섭섭하게 느껴졌다.

‘내가 카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릎 썼는데, 말을 꼭 저렇게 해야 되나?’

자신이 하이에버에서 그를 구하지 않았어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모가 수려하고 권세 있는 여백작 아델라이데와 결혼해서 지금은 한 명의 제후로서 거듭났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 고생도 안하고 있을 거고.

- 후회하느냐? -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냥 카밀의 말에 아쉬움이 들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생각보다 섭섭한 걸 보니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정말로 눈 먼 충성이었나 봅니다. -

- 너희 마음은 연약하지. 나는 널 이해하노라. -

자기 마음이 섭섭한 건 섭섭한 거고, 해야 할 일은 일이었다. 억울해할 것도 없었다. 자신은 카밀을 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명예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검의 선택을 받지도, 왕위를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에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레오폴트처럼 호쾌하고 빠른 길이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옳다고 믿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새로운 명예를 배웠다.

‘그래.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나아가는 거다. 당장은 답답하고 더딜지라도, 불확실해보일지라도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서. 아르투르, 너는 이미 나는 남들이 몇 번이고 불가능 했던 것을 해냈다고.’

“마스터, 제 의견을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제 생각에는 이 모든 난국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 듯합니다만.”

아르투르는 케이의 똘똘한 눈망울을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들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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