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58화 (15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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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왕도라고 말한 게 맞아?”

“응. 나도 그렇게 들었어.”

피오렌치아 사람들은 서로 수근거리며 자신들이 들은 말이 맞는지 확인했다.

“저 사생아 왕자가 교황 성하께 대관을 받을 거란 소문이 떠돌던데, 그게 진짜였나 봐.”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 도시 지위는 어떻게 되는거지?”

광장에 가득 찬 피오렌치아 인들은 불신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사실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수십만 개의 눈동자가 불신과 경계를 담아 자신을 향해 쏘아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성난 군중이 야수와 같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제압하려 들거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완전히 물어 뜯겨 사지가 찢겨나갈 터였다.

‘내 콧구멍과 손동작 하나하나를 관찰당하는 건 언제나 불쾌하구만.’

하지만 달리 보면 관심이 집중된 지금이 피오렌치아 인들의 기억에 자신을 각인시킬 둘도 없는 기회였다. 레무리아의 중심은 피오렌치아였으며, 따라서 피오렌치아를 온전히 손에 넣지 않고서는 진정한 왕국을 세울 수는 없었다.

‘어차피 물러날 곳은 없다. 앞으로!’

아르투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우렁찬 목소리로 대중을 향해 소리쳤다.

“그동안 너희들은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으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도자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짐은 그런 식으로 너희의 마음을 얻지 않겠다. 입에 발린 말 따위는 하지 않겠단 말이다.”

아르투르는 차분히 앞 열에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군중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들의 움직임은 변화무쌍해서 지금은 고요하다가도, 언제고 맹렬히 바뀔 수 있었다. 아르투르는 이들의 눈빛에서 상처 받은 자부심을 보았으며, 고귀한 혈통을 혐오하는 맹렬한 의지를 보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고통 받아온 자들의 혹시나 하는 마지막 희망이 담긴 눈초리까지도 볼 수 있었다.

“너희는 새로운 시대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신의 뜻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수도승에게 권력을 몰아주었다. 가장 맹렬히 변혁을 주장하는 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격이 없던 자였다. 너희가 자랑하던 도시의 토대가 무너졌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던 시민들이 끼니를 걱정할 처지까지 몰렸었다.”

식량 공급 문제의 해결사는 자신이었기에, 이것을 환기하는 건 다분히 의도적인 주제 선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너희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지. 하지만 직시해야할 것이다. 과거의 개혁은 모두 실패했으며, 극단적인 변화를 꿈꿨던 수도승은 광인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을. 이유야 여럿 일 테지. 힘과 자질의 부족, 혹은 의지가 부족했을 지도. 어찌 되었든 결과는 같다. 변한 게 없었다. 하지만 짐은 다르노라.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명예로운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비열한 자들은 짐을 두려워하노라.”

즉, 나는 검증된 지도자라는 걸 기억하라는 뜻이었다. 아르투르는 여전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시민들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감에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짐이 아니고서도 피오렌치아의 새 지도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레니에 대장, 좋은 사람이지. 피오레 가문, 영리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도시를 복원하겠다고 말하는 게 전부다. 그러나 짐의 약속은 철저히 다르다. 짐의 영도 아래서 너희는 낡은 것 따위는 물려받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의 후손들이 우리의 시대를 그리워하게 만들 것이다.”

적의가 줄어들었다. 분위기를 잡아냈다고 생각한 아르투르는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짐은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위대한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너희들에게 그 여정에 동참할 기회를 주겠다. 피오렌치아는 일개 도시 국가가 아니라, 새로운 천년 왕조의 수도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 속에서, 너희는 선조들이 결코 누려보지 못한 드높은 영화를 누리게 되리라. 짐을 섬기겠노라 약조한다면 너희의 절망을 짐이 품을 것이며, 주저앉은 이는 일으켜 세워 함께 나아가겠다.”

아르투르는 더 이상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정치적 계산도 그만두었다. 이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이었으며, 남들 앞에 진솔하게 내보일 수 있는 자신이었다.

“짐으로 인해 삶이 구원 받으리란 약속은 하지 않겠다. 그건 여러분 자신과 신의 가호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성패와 상관없이 평생을 기억 할 위대한 여정에 동참하며 살아가게 되리라. 짐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그대들이 짐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결코 과거와 같은 모습을 살지는 않으리라.”

열광적인 반응도, 분노도 없었다. 피오렌치아 인들은 아르투르가 괜찮은 연설을 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연설만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시작일 뿐. 그렇기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청년 한 사람이 손을 든다.

“질문이 있나? 해보게.”

질문하는 청년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내였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위압되거나, 주눅든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당당했다.

“나는 당신과 두라노에서 싸운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도시의 지배자가 되더라도 처벌 받지 않겠습니까?”

청년이 아르투르를 부르는 호칭은 평소라면 무례, 혹은 도발이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으나 아르투르는 자신이 이들의 마음을 정복하러 왔음을 뚜렷이 기억했다. 피오렌치아에선 이들의 문화에 따라줄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지. 짐은 전쟁터에서의 원한을 결코 그 너머로 가져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대는 스스로의 도시를 위해 싸웠을 뿐 아닌가. 명예로운 싸움을 벌였던 거지.”

첫 문답을 주고받은 청년은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간다.

“그건 귀족들의 생각이죠. 제 전우들이 당신에게 많이 쓰러졌습니다. 아직도 그 친구들의 가족은 기일만 되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당신의 통치를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르투르는 재미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지 더욱 흥미진진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것이 자신이었다.

“정당한 싸움이란 개념이 낯설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 그들을 죽게 만든 건 무익한 전쟁 때문이었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과도 없던 건 피오레 가문의 무능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했다면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짐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하지 않은 전쟁을 벌이지도 않을 것이다. 짐을 지도자로 받아들인다면 결국은 더 좋은 일이 될 거라 확신한다.”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것 역시 자네의 자유다. 자네건, 혹은 어떤 원한이 있는 사람이건 원한을 청산하러 와도 좋다. 언제고 결투는 받아주겠다.”

아르투르는 자신이 내비치는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비춰질 여지가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논리로 그걸 정당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건 너무 속이 뒤틀리는 일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젊은 여성이 말했다.

“당신의 말은 모두 헛소리 같습니다. 자유 도시의 시민인 우리가 왜 군주인 당신에게 무릎을 꿇어야합니까?”

아르투르는 이번에도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당돌하고 거침없는 자들이야. 그러나 내심 솔직한 질문을 해주는 이 젊은이들이 고마웠다. 마음속에 앙심을 품은 채 뒤에서 칼을 찌르는 것 보다는, 대놓고 항의하는 편이 나았다.

“짐이 들으니 그대들은 군주를 섬기지 않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더군. 짐은 왕족들과 같이 자라서 왜 자네들이 그렇게 느끼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네들의 관습이라니 존중할 따름이지. 궁금한 것이 있다. 자네는 어째서 자유 도시에서 사는 걸 군주의 신민으로 사는 것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가?”

“그야 우린 노예가 아닌 주인이니까요.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아도 되고, 충성을 맹세할 필요도 없는 자유인들이니까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자신이 정할 수 있습니다.”

아르투르는 슬슬 이 대화가 더 재밌어졌다. 위치는 다르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 간의 대화가 아닌가.

“왕국이라고 해서 군주가 법 위에 설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왕은 법을 수호하고 신민을 지키는 존재지.”

“우린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유 도시의 시민들은 보호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섬기지 않지요.”

“그렇군. 자네 말대로 섬길 필요가 없겠어.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정말로 피오렌치아 인들이 누구도 섬기지 않았다면 피오레 가문은 왜 이 도시를 지배했던 건가?”

“그건 그들이 도시를 잠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왕은 아니였어요!”

“음. 상인 귀족들의 통치가 왕정과 뭐가 그리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지. 다음 질문이다. 정말로 누구의 보호도 필요 없었다면 미친 수도승 한명 때문에 이 사단이 났던 이유는 뭔가?”

“….”

여인은 즉각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고민했다. 그 와중, 아르투르가 즉각 치고 들어온다.

“정말로 자네가 이전 시대가 좋았다고 생각하면 짐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 충성할 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지. 허나, 짐을 주군으로 맞이하더라도 여러분이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군신 관계는 예속을 뜻하긴 하지만, 노예 상태를 뜻하진 않는다. 이 자리에서 약속하마. 피오렌치아의 전통은 이어질 것이고, 왕의 질서 아래 최대한 많은 자치권을 보장할 것이다.”

아르투르가 자신 있는 내뱉은 약속에도 사람들은 못 미덥다는 표정이었다.

“군주의 약속을 어떻게 믿습니까? 나중에 가서 딴 소리를 하는 게 그들의 특기 아닙니까?”

아르투르는 재차 지체 없이 답한다.

“짐은 기사 서임을 받은 이래 단 한 차례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노라.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라 맹세하겠다. 짐은 기사이며, 죽는 날까지 그러할 것이다. 스스로 명예를 잃느니 죽음을 택할 것임을 기억하라. 그대들도 소문을 통해 짐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테지.”

“….”

“자, 다른 질문도 흔쾌히 받아주겠다.”

남녀 한 쌍의 질문이 끝났지만, 질문은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앞선 젊은이들이 용감했을 뿐, 교황의 비호를 받는 최강의 기사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아르투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피오렌치아 인들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군. 좋다. 앞으로 수달 간 대성당에서 기거하며 그대들의 방문을 받겠다. 지위와 빈부, 시간을 막론하고 누구나 친구로서 환영받을 것이니 기꺼이 들리도록 해라. 한 끼 식사와 더불어 뭐든지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정치적인 것이 아니어도 좋다. 인생에 고민이 있더라도 찾아와라!”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돌아가다가, 뒤로 돌아서 중요한 걸 잊었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말했다.

“아, 한 명의 기사로서 신께 맹세드릴 것이 있다. 만약 민의가 짐을 환영하지 않는다할지라도, 무력으로 충성을 요구하진 않겠다. 피오렌치아는 짐이 세울 천년 왕조의 수도가 되는 특권을 가질 자격이 있지만, 이곳만이 유일한 장소는 아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 정하라. 그대들의 자부심을 가지는 자유 도시의 전통대로 말이지.”

유유히 사라져가는 아르투르의 모습을 보며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부분의 말은 냉소적으로 보던 사람들도, 마지막 발언만큼은 아주 파격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에, 최고의 계약은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이었다. 잉크로 써진 계약서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북북 찢고는 했지만, 신의 이름을 건 맹세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증인이 없다면 모르겠으나, 십 수만의 대중 앞에서 공개 맹세를 해버린 이상 그걸 깰 수 있는 군주는 최악의 멍청이 말고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방금 들었어? 군주치고는 파격적인데.”

“어디 군주 사이에서 뿐이겠어? 툭 하면 여러 당파들이 무력으로 도시를 장악하겠다고 위협했었잖아. 왕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저런 점만큼은 본 받을 만 해.”

“그건 그렇고, 어느 쪽이 우리한테 좀 더 이득이 될까?”

“이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린 자유 도시라고!”

“내 생각에는….”

아르투르가 떠나자 광장에 모여들었던 시민들도 흩어져 자신들의 일터나 집으로 돌아가며 의견을 나누었다. 이미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이야기는 깔끔하게 잊혀진 뒤였다. 대화의 초점은 놀랍도록 빠르게 사이비 예언자에서 사생아 왕자로 넘어갔다.

피오렌치아 시민들은 종말 후에 새로운 세상이 찾아올 것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뒤집어지면 좋겠다는 감정의 분출구로는 좋았지만, 당장의 빵과 집을 해결해주진 못할 것이란 걸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무관심 속에서, 아타나시우스 일파는 모조리 참수된 뒤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그걸 아는 직접 본 사람도 이단들의 목이 날아가서 시원하다고 박수나 쳤을 뿐, 아타나시우스의 마지막 외침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거나 그들의 죽음을 순교라고 여기진 않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역사의 망각 속으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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