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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새벽, 아르투르는 아타나시우스의 종교 재판이 열리는 광장으로 가기 전 엘라카르시스를 불러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엘라카르시스님? 들리십니까?”
아르투르가 성검을 몇 차례 흔들자, 녹색 빛이 번득이더니 생명의 여신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부르기 길지 않느냐. 이젠 엘리라고 불러도 좋다. 어머니면 더 좋고.”
“어머니는 조금…. 그렇다고 여신께 무슨 친구 부르듯, 엘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아르투르는 자신을 뒤따라온 힐데군드를 보며 시선을 보냈다. 좋은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신들도 별 거 아니야. 그냥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고, 강할 뿐이지. 친한 동네 누나 한명 생겼다고 생각해.”
아무리 보아도 별 거 같은데. 자긴 도저히 저렇게 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극진히 모시는 것도 답답한 일이었으니, 타협해서 엘리 여신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엘리 여신님, 청이 있습니다. 부디 발타리아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 앞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가짜라고 선포해주십시오.”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엘라카르시스.
“뭐든 돕겠다고 하긴 했지만, 너희 인간들 간의 싸움에 내가 깊게 관여할 수도 없는 일 아니더냐. 정말 급한 일이면 몰라도, 너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식으로 끝낼 거면 진즉에 끝냈을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지금 수만 명이 넘는 광신도들의 추종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난장판이 벌어지는 걸 막으려면 마음부터 돌려 놔야합니다. 더 이상 말로 하는 설득이 통할 단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엘리 여신님께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엘리는 아르투르의 말에도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내키지 않는 것이 있었다.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군요.”
“널 돕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발타리아의 이름을 흉내 내어 달라는 건 들어줄 수 없다. 그건 신들 간의 규약에서 엄격히 금지된 일이야. 설령 금지된 바가 아닐 지라도, 내가 그와 각별한 사이였건만 그의 이름을 팔수는 없다. 너희 인간들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어떠냐?”
입을 굳게 다문 채, 엘리를 올려다보며 입을 여는 아르투르.
“그건 정말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비무장 군중을 성검의 힘으로 학살하란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기사들을 데리고 돌격해서 창으로 노인들을 꿰뚫어야합니까? 둘 다 제 통치의 시작으로 좋지는 않을 겁니다.”
“신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할 순 없구나, 차라리 적당히 꾸미고 군중들 앞에 내 모습을 드러내마. 그럼 녀석들도 말을 듣겠지.”
우려스런 아르투르의 목소리.
“발타리아님의 형상이 아니라도 괜찮을까요?”
엘리는 자신 있게 웃어보였다.
“나도 요즘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요즘 너희는 날개 달린 천사같 은 걸 믿는다지?”
“설마 천사는 없던 겁니까?”
“그래. 어느 기발한 녀석이 우리의 진짜 모습과 인간의 형태로 내려온 모습을 합쳐 그려 놓는답시고 날개 달린 인간을 그려놨지. 원래 천사 같은 건 없었단다.”
옛 추억을 회상하며 웃음 짓는 엘리.
“게다가, 발타리아는 너희가 생각하는 고뇌에 찬 젊은 청년의 모습을 취한 적이 없어. 그는 항상 야성미가 넘치는 형상을 택했지. 너희 식만으로 묘사하자면 고귀한 성기사가 아니라 야만인 전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
아르투르는 굳이 자신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구, 굳이 그렇게 말씀 안 해주셔도 압니다. 아무튼 동의하신거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엘리.
“그래. 날 믿거라. 잘 해결해주마.”
***
엘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이 어리석은 자녀들은 자신을 진정 발타리아의 사자라고 믿으며 엎드려서 빌고 또 빌고 있었다.
“천사님!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저 가짜 예언자가 시킨 바에 따랐을 뿐입니다!”
“지옥으로 보내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단 말입니다!”
이제 와서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체하는 군중을 보며 아르투르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마음 같아서는 레오폴트에게 신호해서 이놈들을 쓸어버리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만 명을 학살하면서 왕으로서의 치세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되고자 하는 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제발 발타리아께 잘 전해주십시오!”
엘리는 그런 모습을 보며 연민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저 자애로운 여신은 인간들의 약한 면모마저 사랑스럽게 바라보아주고 있지 않은가.
- 너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느냐? -
“그렇습니다! 제발 다시 기회를!”
간절히 애원하는 대중을 둘러보는 날개 달린 천사, 엘라카르시스.
- 딱한 아이들 같으니라고. 너희가 그나마 죄를 좀 덜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내 대리인의 말에 따르거라. 그는 나의 의지를 이은 자요, 발타리아의 마지막 유산을 수호하는 자이다. 너희들의 삶과 죽음은 그의 손에 달려 있으니, 내 말을 듣듯이 그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다. -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엘리는 날개를 펼치며 구름 사이로 빠져나온 햇살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 실은 그냥 마법적으로 투영된 형상일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군중들은 천사가 자신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하늘로 떠났다고 생각해 엎드려 절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 여신님. 이런 일을 연출을 한두 번 해보신 솜씨가 아니십니다만?’
- 너도 수천 년 간 주신으로 숭배 받아 보거라. 아이들을 달래는 온갖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지. 아이들의 믿음에 부응해주는 것이야말로 신의 역할이 아니겠느냐. 아무튼 네가 청한 것은 들어주었다. 나는 이제 물러나서 지켜보도록 하마. -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르투르가 고개를 돌려 군중을 바라보았다. 불과 잠깐 사이에, 아타나시우스와 자신의 입장이 정 반대가 되어있었다. 자신을 향해선 순한 양떼와 같은 순한 눈빛을 보냈으며, 옛 예언자를 향해서는 짐승처럼 사나운 시선을 보냈다.
이들은 자신의 손짓과 눈빛 하나하나를 눈에 불을 키고 쳐다보고 있었다. 굉장히 부담될 정도로 말이다.
“저 거짓 예언자를 잡아와라!”
아르투르가 아타나시우스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군중은 성난 황소처럼 대성당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와아아아아 - ! 가짜 예언자를 잡아라 - !”
“악마에게 속아 넘어간 한심한 것들! 싸워라! 저놈들을 다 죽여!”
여전히 아타나시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맹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완장을 찬 경비병들은 대부분 광신도였기에 여전히 아타나시우스를 따랐지만, 수적으로 너무 압도적이었기에 막을 방법이 없었다.
머지않아, 군중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떠받들던 예언자를 밧줄에 묶어서는 질질 끌고 나왔다. 그가 입고 있던 의복은 걸레짝처럼 찢겨있었고, 위엄을 위해 길렀던 수염들은 뭉텅뭉텅 뜯겨져나갔다.
“빌어먹을! 이 세상은 영원한 암흑 속에 갇히고 말거다! 이 악마의 추종자들아!”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아무런 효력을 가지지 못했다. 아르투르는 내심 감탄했다. 이 지경이 되서도 악마 타령을 하는 걸 보니 이놈은 진짜였구나. 집념만큼은 대단하구먼. 이제 그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일 테면 죽여라! 천국에서 이 타락한 세상이 영원한 겨울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을 즐겁게 지켜봐주마!”
아르투르는 그를 비웃었다.
“재촉하지 마라. 언젠가 반드시 죽일 거니까. 단, 모두의 앞에서 네 형편없는 실체를 까발린 뒤가 되겠지.”
“?!”
“너를 대중 앞에서 극적으로 불태워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나? 너는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한 자가 아니라, 그냥 앞뒤 분간을 못한 미치광이지. 그런 놈을 왜 대중 앞에서 태워 죽여서 순교자로 만들어주겠느냐? 여봐라, 놈을 지하 감옥에 처박아라!”
***
아르투르는 신적인 존재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소문과 주요 인물들의 지지 혹은 조력에 의거해 피오렌치아를 빠르게 안정시켰다. 시내에는 레니에 대장이 이끄는 피오렌치아의 군대가 들어와 주둔해 치안을 안정시켰다.
“일단은 폐하께 협조하겠습니다. 단, 아직 폐하를 피오렌치아의 군주로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며, 저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 뜻도 존중하네. 치안만 신경써주게. 우리 간의 의견 차이는 상황이 정리되면 다시 이야기하지.”
다음으로는 항구 지역에 고립되어 있던 자들이 도심지로 돌아와 도시의 기능을 복구시켰다. 피오렌치아의 지도 계층이던 이들은 아르투르가 주도 중인 상황에 큰 반발을 품고 있었고, 레니에 대장이 조기에 개입해서 폭동을 종결시키지 않은 것에도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독단적으로 외부에서 용병들을 불러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했다. 특히 피오레 가문은 도시의 주도권을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교황 특사께서는 성하께서 내려주신 임무를 끝마쳤으니, 돌아가실 때가 된 것 아니겠소? 혼란을 바로 잡아주신 것에 대해선 큰 사례가 있을 거요.”
피오레 가문의 굴리엘모가 찾아와 부탁을 빙자한 통첩을 했지만, 아르투르는 도시의 혼란을 규명하기 위한 재판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답했다.
“이게 뭡니까?”
“어쩌다가 도시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처음부터 밝힐 것이다. 시민들이 이런 정신 나간 광기에 빠져든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겠지.”
지켜보던 한 토착 귀족이 성을 내며 앞으로 내디뎠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교황 특사면 특사답게 행동해라! 만약 주제 넘는 행동을 하면….”
아르투르는 여명의 칼자루에 손을 올리며, 서슬 퍼런 눈빛으로 토착 귀족을 노려보았다.
“하면?”
“….”
“내 결정에 이의가 있으면 둘 중 하나를 해라. 교황 성하께 나를 파면하는 칙서를 받아오던가, 아니면 결투 재판을 치르던가. 날 거역하려 들면 교회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하겠다.”
결국 옛 피오렌치아 지배층도 변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고용한 용병들이 도착하기 전 까지는 말이다.
한편, 아르투르가 가장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한 계층, 피오렌치아의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도시를 혼란에서 구한 유능한 지도자, 우리와 칼을 맞댔던 두라노의 군주. 혹은 신의 가호를 받는 선택 받은 자.
다만, 입장이 어떻건 피오렌치아의 시민들은 아르투르의 유능함과 위세만큼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것이 지금 피오렌치아를 손에 넣을 재료임을 눈치 챘다. 때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도시의 혼란은 완전히 수습되진 않았고, 다들 누군가 움직이나 싶어 주시하던 절묘한 때에, 아르투르가 먼저 행동했다.
“이단자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소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