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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155화 (15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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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문양이 나타나, 푸른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여신에게 있던 것과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가 자신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었음을 느꼈지만, 정확히 무슨 차이인지 알아챈 건 힐데군드가 유일했다.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힐데군드.

“너도 이제 신의 축복을 받았구나?”

아르투르는 오른손을 내밀고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극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훨씬 활력이 넘치고 강인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작은 상처 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치유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의 축복을 받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내려준 신의 권능을 일부 빌릴 수 있지. 네 경우에는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권능이겠네. 그리고 너는 이제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게 될 거야. 영적인 세계라고 하지.”

갸웃하며 묻는 아르투르.

“좋은 일인가?”

“네 생각에 달렸지. 신들은 많지만 축복을 내려줄 수 있을 정도로 권능이 남은 신은 드물고, 내려줄 의사가 있는 신은 더 드물어. 나도 눈사태 속에 파묻혔다가 종말의 선고자의 선택을 받아서 살아났었거든. 우리는 신과 인간들의 중재자이며, 신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적들과 싸우는 거야. 축복을 누리는 대가로 섬기는 신의 말을 잘 들어야한다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 힐데군드를 보며, 아르투르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거냐? 그런 거라면 받지 않았을 텐데. 그런 거라면, 너는 어떻게 사제 일을 내팽개치고 이곳까지 내려올 수 있던 건데?”

그러자 힐데군드는 표정을 풀고 깔깔거렸다.

“아, 방금은 무게 한번 잡아봤어. 원칙적으론 그렇단 거야. 사실 안 지켜도 돼. 축복은 한번 내려주면 끝이야. 신도 다시 못 거둬가거든. 그러니 이젠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고 싶은대로 살면 된다는거지.”

아르투르도 피식 웃고는, 자신이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된 사람인것 같은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들었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할 것이다. 나는 기사들의 왕인 아르투르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명예가 나를 이끌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이전처럼 나를 대하면 된다.”

***

해가 막 떠오른 이른 새벽, 아타나시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들만의 종교 재판을 위해서였다.

“불로서 정화하라! 죄인들을 불태워라! 신의 진노를 달래야만 하느니라!”

아타나시우스는 탁월한 연설가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달변과 카리스마, 확고할 정도의 자기 확신 말이다. 본디 종교 재판이란 까다로운 절차와 나름대로의 논리를 지닌 신학적 기반 위에 진행되어야 했지만, 그걸 모두 무시할 수 있던 건 그의 재능 덕분이리라.

“저, 예언자님, 이번에 잡혀온 이들은 이전의 죄인들과는 조금 달리 취급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불륜과 매춘으로 결혼의 신성함을 깬 이들은 불타 마땅하다고 치더라도, 이들은 혼인을 약속한 남녀들이니….”

갈수록 종교재판의 범위는 넓어져만 가고 있었고, 처형 방식도 잔인해진 나머지 그의 몇몇 추종자들마저 거부감을 느낄 정도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의 형형한 눈빛 앞에서는 모두가 입을 다물게 되었다.

“자네는 내가 교리와 저차에 따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거구만?”

“아, 그, 그것이 아니오라….”

“그대의 신앙심이 의심스럽군. 내가 신의 말씀을 매일 아침기도 때마다 듣고 있건만, 그분의 말씀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디 제대로 반론해보게.”

인자한 미소를 짓는 아타나시우스였지만, 눈빛에는 악의가 가득 했다. 결국 반론을 제기한 신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벌벌 떨 뿐이었다.

“이놈도 형틀에 묶어라! 작은 죄와 큰 죄가 따로 있다는 나약한 생각이 우리를 죄악의 길로 빠져들게 만든 것이다. 불로서 정화하리라! 죄인은 모조리 불탈 것이다!”

“죄인은 불탈 것이다 - !”

“사, 살려주십시오. 아악, 아아악! 안돼!”

완장을 찬 사내들이 나타나 그의 양팔을 붙잡고 화형대로 끌고 갔다.

“이, 이게 정말 맞는 건가? 이번에 잡혀온 사람들은 그리 큰 죄가 없어 보이는데….”

“쉿. 이건 우리 모두 시험에 들고 있는 걸세.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예언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그,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의 죄에 노해서 신께서 벌을 내리실리가 없었겠지.”

아타나시우스가 초기에 받던 자발적이면서도 열광적인 지지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신의 뜻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도 되나 싶다가도, 옆 사람들이 따라하고 있으니 같이 따라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감히 예언자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신께서 다시금 노하신다면 세상은 암흑 속에 빠지고 말 테니.

“죄인들을 벌하라!”

아타나시우스의 외침.

“벌하라!”

수만 명의 군중이 동시에 외치는 광기 어린 함성은 소름끼치는 공포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한 채, 다 함께 움직였다. 완장을 찬 경비병들이 화형대에 불을 붙이기 직전, 안개 속에서 나타난 거구의 기사가 경비병의 뺨을 살짝 때렸다.

“크억!”

경비병은 머리가 오른편으로 훽 돌아가며 이빨을 쏟아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옆에서 달려들던 자들도 바로 주먹 한 두대를 맞고 몽둥이를 얻어맞은 것 마냥 자리에 나자빠져버린다.

“그만 둬라! 피오렌치아의 시민들이여! 너희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

아르투르의 등장은 군중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저 사생아 왕자와 이교도 여전사, 두 사람이 수백 명의 경비병을 죽여 버리고 죄인들을 데려간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버리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오히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예언자가 했던 말을 기억하라 놈의 절반은 잔인한 북방의 이교도요, 나머지 절반은 지옥의 악마니라!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사악한 마술을 부릴 수 있겠는가? 인간은 그렇게 많은 병사를 죽일 수 없다! 놈은 악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미 지난밤에 추종자들에게 열심히 아르투르의 정체에 대해 설교해두었다. 인간이 저렇게 잘 싸울리가 없다! 그러니까 악마가 틀림 없다는 논리는 생각보다 잘 먹혀들어갔다. 군중은 겁에 질렸으면서도, 각자 챙겨온 흉기를 꺼내들고 아르투르를 향해 몰려들었다. 양민의 무리에 불과했지만 광장을 가득 메우는 숫자인만큼 기세는 대단했다.

“악마를 퇴치하자!”

“악마와 싸우다 죽는 자는 천국에서도 가장 고귀한 자리에 앉을 것이오, 도망치는 자는 놈과 한패로 취급되어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로 떨어지리니! 형제자매들이여! 악을 정화하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광신에 물든 군중은 아르투르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군.’

아르투르가 우려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자신이나, 힐데군드나 이런 양민들에게 죽기엔 너무 잘 싸웠다. 그가 걱정하고 있는 건 군마에 올라 돌입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레오폴트의 기사들이었다.

‘아르투르. 기사들을 보내서 쓸어버리자고. 저런 놈들이 얼마나 있건 짓밟아버리는 건 어렵지 않잖아. 그냥 미친 군중들일 뿐이라고. 네가 목숨을 걸고 구해주려고 할 가치가 전혀 없어.’

‘맞는 말이다. 저들은 어리석고, 손에는 피가 묻었지. 하지만, 모든 것을 빼앗긴 광신에 빠져든 불쌍한 바보들이라고 볼 수도 있어. 그들 중 대부분은 선량하게 살아갈 수도 있던 사람들일거야. 그러니, 적어도 그런 사람들에게만은 참회하며 살아갈 기회를 주고 싶다.’

‘하, 아주 성자가 나셨군.’

빈정거리는 태도를 취하는 레오폴트.

‘솔직히 털어놔. 비무장 시민들을 상대로 기사들을 데리고 돌격하자는 생각이 마음에 안 드는 거지?’

‘음. 그렇기도 하고.’

‘그래. 뭐. 신의 가호를 받는 분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야지. 단, 네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내 재량으로 개입하겠다. 늦기 전에 끝내.’

‘고맙다. 레오폴트.’

잠깐의 회상을 마친 아르투르는 파도처럼 몰려드는 군중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뒤편을 지키고 서있는 건 힐데군드였다. 그녀라면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살아남을 터였다. 오히려 진짜 전투가 벌어지면 즐겁게 웃으며 저들을 살육할 사람이었지.

‘부디 성공하기를.’

아르투르가 성검을 뽑아들며 강렬한 의지를 가해 마력을 방출시켰다. 그러자 두 사람을 보호하는 황금빛 구체가 형성됨과 동시에, 사방으로 번뜩이는 빛이 퍼져나갔다.

“오, 오오! 이게 뭐지?!”

쟁기와 몽둥이로 무장하고 달려들던 군중은 눈앞에 펼쳐진 기적에 놀라며 행동을 멈추었다.

“악마의 마법이다! 현혹되지 말고 공격해!”

아타나시우스가 그들을 닥달하기 위해 외치자, 군중은 주춤거리면서도 다시 달려들 채비를 취했다.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개인의 무용이 얼마나 뛰어나건 이렇게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군대를 진입시켜 학살한다면? 자신은 영원한 예언자이자 순교자가 되는 것이었다!

“구원을 찾는 자들이여, 내 말을 잘 들어라. 너희들이 따르는 자는 가짜 예언자다. 내가 그 증거를 보여주겠노라. 너희들 가운데 스스로 신의 말을 들은 자가 있었나? 아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너희가 진짜 신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마. 어둠 속에서 깨어나라.”

아르투르가 손에 쥔 성검을 놓자, 눈부신 황금빛을 발하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도시 전체를 뒤덮을 법한 큰 불빛이 한번 번득이고, 모두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다들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도화지처럼 새하얀 백색의 날개를 펼친 여인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가에선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으며, 신성한 후광이 그녀의 태양보다 밝게 빛이 났다. 양손에 각각 길다란 검과 지팡이를 쥔 여인은 지엄한 눈빛을 보낸다.

“오오오오… 천사, 천사께서 내려오셨다!”

“구세주께서 그분의 사자를 보내신거야!”

군중은 환희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아르투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으며, 아타나시우스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부리나케 소리친다.

“천사 따위가 아니다! 저 자는 변장한 악마니라!”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앞의 존재는 사람들이 믿어온 천사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비할 데 없는 백색의 휘광과 신성한 아름다움은 감히 인간의 말 따위가 범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천상에서 너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

천사가 입을 열자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완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천상의 화음이었고, 그 자체로 권능을 띄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었으니까.

- 나의 자녀들아. 어찌하여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느냐? 언제까지 거짓 목자의 우매한 말에 따르며 어둠 속에서 방황할 테냐? -

군중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자신들이 여태까지 신의 뜻을 받들던 게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그 무수한 심판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신의 뜻이 아니었다면, 여태껏 자신들이 저지른 건 끔찍한 죄였다. 배신감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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