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53화 (15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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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로트의 대답에 레니에는 띵한 표정을 짓는다.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의미는 알기나 하십니까?”

“네. 누구보다 잘 알지요. 자유도시 피오렌치아를 끝낼 때가 왔다는 이야기에요. 레니에 대장. 새로운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이건 배신입니다!”

레니에는 흥분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으며, 다른 피오렌치아 장교들도 시선을 마주치며 웅성였다.

“레니에 대장. 난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 내 보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주셨다는 것도, 모두가 잘 살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요. 하지만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 미래를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뒤쳐진 것은 사라지게 될 뿐입니다.”

레니에는 머리가 땡겨오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이마를 주물렀다. 남들이 보기에 그의 표정은 반쯤 넋이 나가있었고, 굉장히 어이가 없어했다.

“아가씨,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유감입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선 그걸 정할 자격이 없으십니다. 아버님의 후광 외에 우리 도시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기에 그렇게 용감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까? 오늘 다시 한 번 훌륭한 이의 자손이라도 그보다 못할 수 있음을 실감하는군요.”

샤를로트 역시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레니에 대장, 나도 이렇게 말하게 되서 미안하지만, 더 이상 당신 의견은 대세에서 중요하지 않아요. 자유 도시는 실패했고, 아르투르에 대한 지지는 반도 전체에 걸쳐서 있습니다. 거기에 교황청의 승인과 군사력이 있으니 그것으로 이미 끝난 이야기죠. 그가 신사적으로 나올 때 적당히 협상하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군대가 제 지휘 아래 있다는 걸 아셔야 할 겁니다! 시민들을 향해 창을 겨눌 순 없지만, 외적을 향해선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르투르는 아직은 지켜보기만 했다. 이건 피오렌치아 인들끼리 풀어야 할 문제였다. 자신이 끼어들어봐야 문제를 더 악화시킬 따름이리라.

“정부가 전복되고, 봉급이 반년 째 밀렸는데 군대가 대장만을 따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말로요?”

레니에는 책상에 올려둔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샤를로트를 노려보았다. 그녀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바라보았지만, 동정심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피오레 가문에서 자라시면서 그놈들에게 물드셨군요. 지금 하고 계신 건 고향에 대한 배신입니다. 천국에 계신 부친께서 보면 크게 혼내실 겁니다. 간곡히 청하건데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은 우리 피오렌치아 인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뇨. 대장께선 시내로 진격해서 폭도들을 제압하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셨어요. 그 때가 자유 도시 피오렌치아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어요. 더 이상 자유 도시는 없습니다. 전 고향을 배신하는 게 아니라, 구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겁니다.”

“그건 옳은 길이 아닙니다!”

“언제나 현실은 당위보다 강하죠. 대장도, 아버지도 그걸 외면하셨기에 피오레 가문을 넘지 못하셨던 거고요. 저는 똑같은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은 옳음도 살아남아야 주장할 수 있는 거지요. 대장, 대장이 늘 말씀하셨잖아요. 대의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봐야한다고요.”

레니에는 배신감 때문에 분노가 섞인 시선을 샤를로트에게 보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아르투르는 그의 눈동자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와 좌절된 꿈에 대한 비탄을 느꼈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달랐지만, 그가 꿈꾸던 것은 분명히 존중할만한 어떤 것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르투르 공께서 레무리아의 왕을 자처하신다면, 그렇게 불러드리겠습니다. 피오렌치아에서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내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희의 자유만은 드릴 수 없습니다. 제왕들은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전쟁을 일삼지요. 제 고향이 그런 꼴이 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 제외해주신다면, 뭐든지 협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오폴트는 아르투르에게 시선을 보냈다. 신호만 내리면 모두 베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모든 군주들은 정복자들의 후손이었고, 기사도라는 가면을 내세울지언정 폭력으로 권력을 얻은 자들이었다. 군주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광경은 납득하기 어려운 광경이리라.

아르투르 역시 그의 태도에 생리적인 반응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꼈다.

‘레오폴트라면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아르투르, 너는 왕의 아들일 뿐, 왕족은 아니야. 사생아에게는 어떤 상속권도 없음을 기억해라. 너를 왕좌의 눈앞까지 가져온 것은 고귀한 출생이 아니라, 네가 비천했기에 스스로를 빛내기 위해 추구했던 것들이다.’

생각을 바꾸자 오히려 절로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낡은 검 한 자루만 가지고 떠났던 여정이건만, 지금은 존중할만한 사람에게 폐하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고, 짐이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허세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세상 물정을 모르며 오만하게 살았다면, 결코 이런 날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레니에 대장. 나는 자네의 말에 그냥 납득할 수는 없다.”

아르투르는 불편하던 표정을 걷어내며 호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자네는 내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모든 일이 끝나면 내가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 도전할 기회를 주겠다. 일 대 일 결투도 좋고, 군대를 일으켜도 좋다. 거짓 충성을 한 뒤에 암살이나 반란을 노려보더라도 정당한 싸움이라고 믿겠다. 혹은 자네가 승복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이든 좋다. 그러니 지금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자. 그대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원한쯤은 접어둘 수 있는 큰 사람이 아닌가?”

“….”

레니에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도시를 통치할 권리는 시민들의 지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혈통이나 신의 뜻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민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지도자를 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하하! 흥미로운 이야기군. 하지만 결코 동의하진 않을 거야. 신의 뜻보다 확고한 정당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군주들은 그런 이야기를 미친 자의 헛소리나 반역적인 이야기라고 간주할 걸세.”

“고귀한 이들께선 미친 이야기라고 부르시겠지만, 저희 피오렌치아는 수세기간 스스로 지도자를 뽑아서 번성해왔습니다. 아직도 그런 전통을 가진 도시들이 여럿 있지요.”

껄껄 웃는 아르투르.

“좋다. 만약 피오렌치아의 백성들의 뜻이 나를 군주로 모시길 원치 않는다면 그대들에겐 자유를 주겠다. 대신 그대도 결과에 승복할 것을 약조하라.”

이번에는 아르투르의 측근들이 웅성거렸다. 특히 레오폴트는 당혹감을 넘어 심각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샤를로트는 다된 빵을 왜 망치냐는 힐난의 시선을 보냈다.

“이것이 우리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이지, 맞는가?”

경험 많은 레니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진심이십니까?”

“언제나 그래왔듯이 나는 말하는 바를 지킬 걸세. 레니에 대장. 내가 다스리고 싶은 나라는 고작 피오렌치아가 아니야. 레무리아 반도도 지도에서 놓고 보면 하나의 지방에 불과해.”

아르투르는 막사 안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제왕들이 사람들의 목에 예속의 쇠사슬을 걸어왔던가! 그건 너무나 시시한 일이다! 칼날을 겨눠서 받아낸 충성이 무슨 소용이며, 불의로 세워진 왕국이 얼마나 갈 수 있단 말이냐! 이미 그런 건 수많은 정복자들이 해오고, 앞으로도 할 일이다! 짐이 할 일은 다르다!”

아르투르의 선언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놈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위대한 제국들도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다. 짐이 세울 왕조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짐은 나라를 더 크게, 강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지 않겠다. 짐이 원하는 것은 영원이며, 불멸이다! 짐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이 그리워 할 나라를 만들 것이다! 가장 고귀한 이와 가장 비천한 자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곳! 누구든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곳! 현실에 짓눌려 항복해도 되지 않는 곳! 저 마다의 명예를 추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이어진 선언은 실내의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된 이들이 많았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은 소리에 넋이 나갔다. 갈수록 미치광이만 늘어가는 세상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자들도 있었다.

“짐이 꿈꾸는 곳은 그런 곳이다! 꿈에 동참할 이들을 받아들이겠다. 그것이 짐이 선언하는 왕도이며, 왕국의 반석이 될 통치 이념이 될 것임을 만인 앞에 선언하노라! 누구도 강제로 예속시키지 않으리라!”

아르투르의 장광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뭐라 반응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박수를 쳐야하나? 현실성을 지적해야하나? 그래서 우리 피오렌치아는 어떻게 한다는 건지 물어야하나?

내심 호응을 기대했던 아르투르는 썰렁한 반응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하던 반응이 이게 아닌데, 왜 다들 호응을 안하지?

짝 - 짝 - 짝.

“그래야 제 마스터답죠! 그 꿈, 제가 먼저 합류하겠습니다.”

케이에 이어 카밀도 어처구니가 없는 지 슬며시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친 소리는 자주 하시는군요. 어디를 가시든 따를 거라고 약속드렸듯이, 지금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라노를 비롯한 몇몇 기사들, 특히 젊은 기사들은 아르투르의 말에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저도 그런 꿈에 참여할 수 있다면 한평생 즐거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명성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반면, 배를 잡으며 웃어대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경박하게까지 들리는 힐데군드의 맑은 웃음소리였다.

“크크크크크크큭. 아, 아니, 이거 완전 내가 본 놈 중에 최고로 미친 새끼네.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 게 원칙인 세상에서, 키킥, 약자와 강자가 동등하게 대우 받을 수 있는 왕국을 만들겠다고? 네, 네가 거짓말을 할 놈은 아니니까, 키킥, 아, 웃겨서, 말이, 안, 크큭, 나오네. 평생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겼다. 하하하핫! 넌 역시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니까!”

아르투르는 힐데군드의 반응이 기분 좋진 않았지만, 헛기침을 하면서 마구 웃는 다른 한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구겨진 표정이 일품인 레오폴트였다. 그는 아르투르와 시선이 마주치자 오른손가락을 들어서 자신의 옆에 대고 원형으로 쓱쓱 흔들었다.

“너 돌았구나?”

그건 진심 어린 분노나 비웃음의 표출보다는, 말 그대로 황당무계해서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이건 왠지 기분이 나빴다.

“두고 봐라. 절대 가벼운 말로 한 말이 아니니까.”

아르투르의 진지한 말에도 레오포르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을 뿐이었다.

“아, 그래, 그래. 알았다고. 진지하시겠지. 너는 열다섯 살 때는 세계를 정복해서 황제가 되겠다고 했었지. 사춘기가 참 늦게 오신 것 같네.”

레오폴트는 재차 웃다가, 마찬가지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10년만 왕이 되서 나라를 다스려본다면, 오늘 네가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를 했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거다. 그때가 되면 오늘의 너를 떠올리며 이불을 발로 차게 될 거야. 내 말 기억하라고.”

아르투르는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레오폴트는 그렇게 생각할 근거가 있었다.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이었지만, 머리가 좀 식고 보니 자기가 대체 무슨 선언을 한 건지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게 가능은 한가? 이건 왕이 되지 않겠다는 소리가 한 걸 아닌가?

그렇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무렵, 허리춤에 걸려있던 성검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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