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151화 (15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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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양고기를 대접할까 하는데, 특사께선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라이카의 독특한 서부어 억양에 아르투르도 친절히 화답했다.

“나는 고기라면 무엇이든 좋아한다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식사의 준비 전부터,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혈통과 관심사에 관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교양 있는 행위는 체면치레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서로 말이 통하는 지 확인해보고 깊은 교섭을 할 수 있는 지 알아가는 탐색전의 일종이었다.

두 사람은 붉은 와인이 곁들어진 향신료가 뿌려진 양고기를 즐기며 즐겁게 대화했다. 그들은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서로 친근하게 굴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왕궁에서나 즐겼던 수준의 호화 식사를 간만에 접한 아르투르는 삽시간에 고기를 동내기도 했다.

“먹성이 정말 좋으시구려! 허허허!”

“이게 다 좋은 물건을 취급하는 마라이카 대인 덕 아니겠소?”

능청을 떠는 두 사람은 이 와중에도 협상에 참고가 될 만한 단서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아르투르는 마라이카가 서부 대륙의 상황에 굉장히 밝다는 것과, 부에 대한 종교에 가까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래도 돈을 벌기 위해 위험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공산이 높아 보이는군. 안전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먼 곳까지 저렇게 깊게 알고 있을 공산은 낮지.’

상대도 자신에 대해 많이 알았으리라. 자신은 특히 의도를 숨길 생각도, 표정을 감추지도 않으니 말이다. 덕분에 상대가 자신감을 얻은 탓인지, 화기애애하던 서론을 거두고 살벌한 본론을 먼저 꺼내는 마라이카였다.

“어째서 날 찾고 왔는지 잘 아오. 아르투르 공. 굴리엘모에게 모두 들었지. 피오렌치아 시민들이 굶주리고 있고, 내부에선 광신도들이 폭정을 벌인다지.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오. 나는 절대로 외상으로 물건을 내어주지 않소이다.”

아르투르 역시 침착히 답했다.

“피오레 가문이 이 정도로 몰락하지 않을 거란 건 대인이 더 잘 알잖소? 가장 큰 방해물인 광신도들의 폭정은 내가 왔으니 곧 끝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추가금까지 얹어서 지불하겠다는 제안이외다. 다른 물건 같으면 부탁도 드리지 않았소. 이건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오. 부디 크게 생각해주시오. 대인.”

중년 상인은 곧장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도 자연스러울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돕고 싶지만 아무런 힘이 닿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아르투르는 내심 그가 진짜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지 궁금했다.

“아르투르 공. 미안하지만 이건 원칙입니다. 나도 이 정도 규모의 곡물을 사오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을 들였단 말이오. 말만 믿고 식량을 내주기에는 너무 위험이 크오. 피오레 가문이 제 때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다면 나는 길거리에 나앉고, 처자식마저 팔아야할 거요. 미안하오! 나로서도 너무 중요한 일이라 어쩔 수가 없구려.”

마음을 다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르투르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절대 저렇게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진 못할 것이다. 놈은 절대, 절대 절박하지 않았다. 상업은 몰라도 사람은 알았다.

‘네 직감을 믿어. 아르투르. 저 자는 정말로 절박한 게 아니야. 그랬다면 피오렌치아의 항구에 죽치고 앉아 가장 비싸게 곡식을 팔 기회만을 노리는 게 아니라, 금값으로 치솟은 곡식을 서둘러 팔아버린 후 떠났겠지. 지금 놈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지 묻고 있는 거야. 급한 건 자기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겠다고.’

하기야 놈이야 거래가 틀어져서 이번 일이 실패하더라도 재산을 조금 잃고 말겠지만, 피오렌치아 인들은 떼로 죽어 갈 것이다. 항상 더 많은 걸 지불하는 건 더 절박한 쪽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르투르는 가슴 속에서 짜증이 솟구쳐서, 표정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유가 뭐건, 남의 절박함을 이용해 저렇게 이용해 먹는 놈들을 보면 항상 화가 치밀어 올랐다. 상인이나 용병은 죄다 그런 놈들이긴 했다. 물에 사람이 빠지면 구해주면 얼마 낼 지부터 물어볼 놈들!

시선이 돌려 옆을 바라보니 힐데군드가 식칼을 꾹 움켜잡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을 재촉하고 있었다. 입모양을 통해 자신에게 말을 전달해온다.

‘재수 없나 본데, 그냥 죽여~’

자신이 고개만 끄덕이면 그녀는 곧장 식칼을 날려 호위병의 눈을 꿰뚫을 터였다. 순간 마음이 크게 동했지만, 감정적으로 처리하기에 이번 일은 너무 중요했다. 걸린 목숨은 수십만이고, 정략적으론 장차 왕국의 수도가 될 곳이었다.

‘칼을 들이대서 뺏는 건 최악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수다. 도망치기 전에 전부 뺏을 수 있단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 원한을 남겨서 보복을 초래하게 될 거야.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하는데…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미 모험을 떠나오며 다양한 족속을 보아오긴 했지만, 군주가 된다는 건 눈앞의 이 상인 같은 족제비들을 자주 만나리란 것을 뜻했다. 그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런 회색분자들을 다루는 데는 가장 좋은 태도가 있었다.

‘등에는 큰 칼을 메고, 말은 부드럽게 하자.’

아르투르는 자신감 넘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우리 모두 솔직해 집시다. 정말로 대인이 그렇게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닻을 올리고 떠났겠지요. 안전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시내에 굶주려서 폭풍이 났는데, 선원들을 무장시키고 항구에 대기할 이유가 뭐가 있겠소? 대인이 여기 남은 건 정말로 큰돈을 벌 기회를 위해서요.”

마라이카는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침묵을 지켰다. 아르투르는 긍정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내가 당신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당신도 그에 걸맞게 내게 협력해주시오, 당신이 가지고 온 모든 식량과 자금, 병사를 내어주시오, 보답으로는 10 년 간, 레무리아 왕실과의 무역을 전담할 수 있는 독점권 및 영구적인 조계지를 피오렌치아의 항구에 내어주겠소.”

아르투르의 말은 들은 마라이카는 이번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웃음을 참으려는 노력이 역력히 보였다.

“나도 이게 얼마나 황당히 들릴지 잘 아오. 하지만 나는 맹세한 것은 어긴 적이 없으며, 말했던 바는 항상 이루어왔다는 걸 명심하시오. 일개 백작의 일거수일투족도 알고 있는 당신이 나에 대해 조사해보진 않았을 것이고.”

헛기침을 해서 웃음을 가로 막는 마라이카.

“크, 크흠. 뭐, 그. 그래요. 좋소. 하지만 지금 공이 제시한 조건은 그대가 정말로 왕이라고 해도 승낙 여부를 고민해볼 크기의 무게란 말이오. 하지만 아예 자칭하는 왕이라면? 그건 실제로 돈을 투자해야하는 나한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지. 그러니 외상은 안되오. 아니면 더 화끈한 것을 불러서 내가 구미를 당기게 만들어보시오. 중형 도시 하나를 준다거나, 화폐 주조권을 부여한다던가….”

단호한 표정으로 답하는 아르투르.

“지금 무언가 착각하시고 있구려. 대인.”

“?”

아르투르는 거침없이 말의 기세를 이어나간다.

“우선 내가 레무리아의 왕이 될 거라는 건 자칭이 아닌, 확고한 미래요. 레무리아의 전통적 강자, 피오렌치아와 랑트리뷔아체는 스스로 무너지거나 얼마 전에 패배했소. 나머지 세력은 교황이 지지하는 내게 맞설 힘이 없으니 확실한 거지. 명분은 교회의 지지가 있으니 문제될 게 없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을 잇는 아르투르.

“즉, 당신 앞에 앉아있는 건 조만간 대관식을 치르고, 레무리아의 새로운 왕이 될 자요. 자, 다시 봅시다.”

“잠깐….”

아르투르는 목소리를 높여 그의 발언을 막았다.

“짐의 조건을 제시하겠다! 짐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 난 회계니 상단 경영이니 하는 건 잘 모른다, 날 도우면 장부상에선 손실이 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대는 다양한 대륙을 누벼본 거상이니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왕에게 호의를 베풀 기회가 흔하던가? 그렇게 얻어진 왕의 호의가 숫자로 나타낼 정도로 값싼 것이던가?”

그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 뚜렷한 시선에 마라이카도 주춤했다. 아르투르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때때로 어떤 친분, 혹은 명분은 환산하기 힘든 대가를 가져오곤 했다. 때마침,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또한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왕의 미움을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아주 잘 알 테지. 나는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사람은 아주 경멸하오. 그들의 상업적 성공은 아무런 가치 없는 것에 불과하오.”

마라이카가 대꾸하려던 차, 아르투르는 화살을 떠난 화살처럼 말을 쏟아 대놓고는, 마지막에 가서는 원래대로 돌아 가버렸다.

“내가 식량을 공급하지 않으면 이 도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루트.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요. 당신은 내 약속을 믿고 피오렌치아에 식량을 공급할 테니까. 당신은 명예로운 기사 군주들이 ‘신의 있는 친구’에게 계약을 거저 준다는 걸 알지. 동시에, 분노하는 난폭한 전사 군주들이 어떤 비합리적인 일을 하는지도 익히 보았을 거요. 당신의 화물을 몰수하고 영영 내 영토에는 영원히 발도 못 붙이게 해 버릴 수도 있소.”

아르투르의 확신에 찬 선언을 들은 마라이카는 당황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는 이름 높은 거상답게 여러 강력한 왕들과도 얼굴을 마주하곤 했었다. 그들은 언제나 권위로 자신을 위협했지만 재물이 급한 건 군주들이었기에 언제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자신이 발뺌하며 거부하다보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군주들이란 다들 그렇게 계산적인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진짜다! 한다고 위협만 하는 놈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길 만 한 놈이라고. 이런 건방진 녀석 같으니, 이대로 식량만 들고 떠나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사생아일 뿐인데!, 그럼에도 이 녀석은 대관식 전 부터 왕 타령을 하는데다가, 날 압박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어. 도시가 굶게 되면 레무리아의 왕이 되려는 놈의 계획도 여기서 끝날 텐데.’

오만방자한 사생아 왕자에게 세상이 그의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는 일은 견디기 어려운 달콤함이었다. 그런데 놈을 혼내주고 싶은 자신의 가슴과 달리, 합리적 계산을 마친 두뇌는 이미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10년이 아니라 20년으로 해주시오.”

아르투르는 오만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목소리의 어조를 완전히 하대로 바꾸었다.

“15년으로 바꾸어주마. 당장 특허장을 써주도록 하마. 구두 계약서로는 아무런 효력이 없을 테니까. 잉크와 펜, 양피지 두루마리를 가져와라.”

마라이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깃털 펜과 잉크, 두루마리를 건네주었고, 아르투르가 세 부의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혼내주려던 마음을 따르지 않은 건, 그의 사람에 대한 직감과 거상으로서 판단할 수 있는 잠재적 수익 덕분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이 놈은 진짜야. 다른 군주들이랑 다르게 계산은 집어치우고 원칙을 앞세운다고. 이런 놈은 피해가고, 잘 구슬려서 이득이나 보는 게 최고지. 괜히 거슬려봐야 두고두고 앙갚음이나 당한다.’

동방인 거상, 마라이카는 어느새 몸을 엉거주춤 낮추어 계약서 사본에 서명을 했다. 그것을 본 아르투르도 펜을 들어 계약서를 승인하는 란에 서명을 휘갈겨 썼다.

-레무리아 반도의 합법적인 왕이자 두라노의 국부, 아르투르-

일단 계약이 맺어지자 이행은 신속했다. 선적되어있던 밀 포대들이 상업 지구를 시작으로 도시 전역으로 빠르게 공급되었다. 도시를 좀먹어가던 굶주림의 공포가 사라지자, 피오렌치아 시민들은 광기의 도가니에서 벗어나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타나시우스와 그를 따르는 광신도 무리는 여전했지만, 그들에 대한 지지도는 이전보다 확연히 떨어졌다.

‘승세를 탔으면 그대로 밀어붙여야 하는 법이지.’

아르투르는 장래의 수도를 이런 무질서 상태에 오래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마라이카의 도움을 받아 교외에 위치한 피오렌치아의 군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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